"침묵으로... 그대를 사랑했소."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그는 아프리카 흑인의 후손이었다. 그의 외증조부 아브람 페트로비치 가니발은 아프리카 흑인으로 러시아에 온 후,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아 노예 신분에서 면천되고, 유럽에 유학을 하여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었다. 볼테르로부터 ‘계몽주의의 검은 별’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가문은 이후 러시아의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된다.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의 신분으로 로마에 와서 원로원 귀족의 자비로 로마의 대표적 희곡작가가 되었던 푸블리우스 테렌스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테렌스는 서양 최초의 흑인 극작가가 되었고, 러시아에 끌려온 흑인 노예의 증손자 푸시킨은 러시아 현대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푸시킨의 짧은 삶은 고립과 방황, 고난의 연속이었다. 운명은 그에게 너무도 가혹했다. 왜소한 체구와 흑인의 피가 섞인 외모로 어린 시절의 그는 늘 동년배 친구들에게 놀림과 따돌림 대상이었다. 반면에 여자 아이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었던 까닭에 그의 젊은 시절은 문란한 성적 유희의 분위기로 가득했다. 푸시킨은 어머니의 할아버지였던 흑인 가니발에 대해 그의 미완성 역사소설 ‘표트르 대제의 흑인’ (1827)에서 무한한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러시아의 ‘백색 주의’ 속에서 그에게 일말의 열등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던 자유주의 사상은 그의 이단적 천재성과 더불어 제국의 아웃사이더로 성장하는 토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개인적 배경은 그의 모순된 시 세계를 설명하는 실마리가 된다. 정치적인 시와 음란한 시를 번갈아 발표함으로써 그는 러시아의 정치 체제, 종교적 근본주의의 반항아로 낙인찍히고 길지 않은 삶의 많은 부분을 오지에 보내져 고립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뇌와 번민 속에서 푸시킨은 삶이 언젠가는 그에게 보답하리라 믿었는지 모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푸시킨은 19세기를 한 해 앞둔 1799년 러시아의 모스크바,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37년 38세의 이른 나이로 고뇌에 가득 찬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는 시인이었고, 소설가였으며 희곡작가였다. 그 당시의 러시아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프랑스어를 배웠고, 아버지의 서재에서 마음껏 독서를 즐겼으며 그의 집을 방문한 많은 유명 작가들과 교류할 기회도 가졌다. 외할머니의 장원에 머무르며 농노들과 대화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던 조숙하고 상상력이 넘치던 청년이었다. 12세 되던 해 그는 황실 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한다. 1814년 열다섯이 되던 해에는 서간체의 시집 ‘나의 친구 시인에게’를 출간한다. 1820년에는 러시아의 민요를 배경으로, 전설적 영웅 루슬란과 그의 신부 이야기를 서술체 형식으로 그려낸 시집 ‘루스란과 루드밀라’를 출판하였다. 이 시집은 당대 러시아의 고전주의자와 감상주의자들에 의해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되지만 오히려 그것이 푸시킨에게는 작가로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열여덟이 되던 해 푸시킨은 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 공무원으로 취직한다. 이 기간 중에도 그는 문학 서클에 가입해 문학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는데, 특히 1818년에 결성된 소위 ‘초록 등’ 모임은 문학이나 역사에 대한 토론을 넘어 일종의 정치결사체로 변하였고, 푸시킨은 자신의 시나 글들을 통해 이 모임의 정치적 지향을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반정부적 글들로 인해 푸시킨은 1820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당한다. 몇 년 뒤 이 모임에 참여했던 다수의 회원들은 니콜라이 1세의 제정에 항거해 일으킨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12월의 난)에 연루된다. 푸시킨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지역으로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페테르부르크의 반정부 사건에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했고 그것이 그에게는 동료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남게 된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 동지들에게 전하는 그의 시는 자유에 대한 절박한 염원을 담고 있다.
시베리아의 광산 저 깊숙한 곳에서
의연히 견디어주게
참혹한 그대들의 노동도
드높은 사색의 노력도 헛되지 않을 것이네
불우하지만 지조 높은 애인도
어두운 지하에 숨어 있는 희망도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나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은 오게 될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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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생활의 초기, 건강이 악화되었던 푸시킨은 기력을 회복하면서 코카서스 북부와 크리미아를 여행하게 되는데 이때 얻은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남부 연작시’(Southern Cycles)들을 써내게 되고 이 시들로써 1820년대를 대표하는 젊은 시인으로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1823년 5월 그의 대표작인 ‘예브게니 오네긴’의 저술을 시작한다. 시로 써진 이 소설의 작업은 1831년까지 무려 8년여에 걸쳐 이루어진다. 환멸에 사로잡힌 냉소주의자 주인공 오네긴, 낭만적이고 자유를 사랑하는 시인 렌스키, 사랑스러운 러시아 여성의 전형인 여주인공 타티아나. 이들의 사랑과 미움, 아쉬움과 그리움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아름다운 러시아의 전원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이어지는 전통적 배경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푸시킨의 긴 유형 생활은 그로 하여금 저작에 몰두할 시간을 주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젊은 시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고독과 그리움의 여정 속에서 썼던 고뇌에 찬 편지들, 유형지 몰다비아와 오데사에서의 금지된 사랑, 음주, 도박, 폭력, 결투들이 젊은 푸시킨을 끊임없이 압박했다. 그의 마지막 유배지는 어머니의 장원이 있던 미하일로브스코예라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초의 희곡 ‘보리스 고드노브‘(1825)를 발표한다. 1826년 니콜라스 1세는 마침내 푸시킨을 기나긴 유형에서 풀어준다. 그러나 푸시킨의 모든 작품들은 출간 이전에 황제 자신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이렇듯 제한적 자유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사면은 기성체제의 권력에 대한 푸시킨의 반항적 태도를 순화시킨다. 그리고 그는 표트르 대제의 치세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깊이 침잠한다.
푸시킨이 운명의 여인 곤차로바를 만난 것은 1828년의 12월이었다. 16세에 이미 러시아 사교계에 널리 알려졌던 그녀의 아름다움에 푸시킨은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푸시킨의 방탕한 생활과 러시아 정부와의 갈등을 걱정해 딸과의 만남을 거부한다. 1830년 그는 긴 여행 끝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다시 곤차로바를 찾아간다. 곤차로바에 대한 그의 열렬한 구애에 설득당한 그녀의 어머니는 마침내 결혼을 승낙하지만 그 해 푸시킨은 아버지가 물려준 볼디노의 영지를 방문했다가 콜레라의 발발로 발이 묶여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하지만 짧은 3개월의 시간은 대단히 생산적인 시간이 되었다. 그는 오네긴의 마지막 부분을 마무리하고, 산문집과 짧은 희곡들 그리고 여러 편의 시들을 써냈다. 푸시킨과 곤차로바는 이듬해인 1831년 2월 마침내 결혼식을 올린다.
푸시킨은 결혼 이후부터 그가 세상을 뜨는 1937년까지의 6년여를 대부분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낸다. 하지만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이 시기 그는 러시아의 통치에 항거한 폴란드의 봉기, 콜레라 폭동 등을 겪으면서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체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그의 시들은 1820년대 그의 낭만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시를 사랑하던 독자들과의 사이에 균열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권위를 거부하는 그의 기질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었다. ‘푸가체프 반란사’(1834), ‘대위의 딸’(1836) 등의 소설에서 권위주의 체제에 항거하는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1833년 푸시킨은 러시아 학술원의 일원으로 임명되지만, 젊은 시절의 그 자유분방한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독자들은 그의 새로운 산문들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스페이드의 여왕’도 대중의 호웅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독자들은 젊은 시절의 그 낭만적이고 저항적이었던 푸시킨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가족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길 원하였으나 황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푸시킨이 페테르부르크를 떠나고 싶어 했던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 곤차로바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소문은 심지어 니콜라이 1세와의 염문으로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프랑스 기병대 장교 출신으로 러시아 황실의 근위대에서 일하던 단테스와 아내 사이의 불륜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를 극도의 질투심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단테스가 곤차로바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그의 동서가 되었으나 그와 곤차로바 사이의 소문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그는 단테스와 결투 끝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는다. 며칠 후 이 위대한 젊은 시인은 모스크바의 환락과 부패와 방종을 뒤로하고 눈을 감는다. 대문호의 허황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수치와 후회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다음의 시가 아내에 대한 그의 진정한 마음이었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나의 영혼 속에 아마도
사랑은 여전히 불타고 있으리라
하지만 나의 사랑은
이제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요.
어떻게 하든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오
침묵으로, 희망도 없이
난 당신을 사랑했소
때로는 두려움, 때로는 질투로
괴로워하면서도,
나는 신이 당신으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을 받게 만든 그대로
진심으로, 부드럽게
당신을 사랑했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나라 러시아. 그러나 러시아의 현대문학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에서 시작한다. 짧은 인생을 방황 속에 살다 간 그이지만 아주 오래전 시집의 한 페이지에 단풍잎과 함께 접혀있던 그의 시를 기억하는 한, 그는 늘 아름답고, 낭만적인 자유의 시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작은 꽃 하나 (푸시킨)
작은 꽃 하나 바싹 말라 향기를 잃고
책갈피 속에 잊혀있네
그것을 보니 갖가지 상상들로
어느새 내 마음 그득해지네
어디에서 피었을까? 언제? 어느 봄날에?
오랫동안 피었을까? 누구 손에 꺾였을까?
아는 사람 손일까? 모르는 사람 손일까?
무엇 때문에 여기 끼워져 있나?
무엇을 기념하려 했을까?
사랑의 밀회일까? 숙명의 이별일까?
아니면 고요한 들판, 숲 그늘 따라
호젓하게 산책하던 그 어느 순간일까?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을까?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이미 그들도 시들어 버렸을까?
이 이름 모를 작은 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