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 그는 페테르부르크의 한 관청에서 서기로 일하는 소심하고 존재감 없는 말단 관리이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일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성실하게 임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이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자신의 낡은 외투를 버리고 새 것을 살 계획을 세운다. 가난한 그는 먹지도 않고 밤에 촛불도 켜지 않은 채 외투 살 돈을 모은다. 그리고 마침내 새 외투를 입게 된 날, 그는 저녁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량배들에 의해 그 소중한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 즉시 경찰에 신고하였지만 면박만 당하고, 친구의 권유대로 높은 분을 찾아가 부탁하기도 했지만 돌아온 것은 경멸과 위압적인 비난뿐. 상실감과 절망에 빠진 그는 결국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없어져도 페테르부르크는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였다.
마치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리하여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누구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했던,
흔해 빠진 파리조차도 핀으로 꽂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박물학자의 주의조차
끌지 못한 존재, 관청에서 온갖 비웃음을 순순히 참아내면서 이렇다 할 업적 하나
이루지 못한 채 무덤으로 간 그 존재는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
그 날 이후 페테르부르크의 밤거리에는 그의 유령이 나타나 행인들의 외투를 빼앗는다. 그리고 그를 비웃고 억눌렀던 그 높은 분이 유령을 만나 외투를 빼앗기자 더 이상 유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단편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가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소설가”라 찬양하고, 도스토예스키가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말했던 그 러시아 작가 고골의 1842년 작품 ‘외투’의 줄거리이다.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은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기 3년 전인 180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기 전반의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을 격퇴하여 유럽 전역에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나, 전통적인 농노제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구조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히 발전하던 서유럽의 경제와는 달리 퇴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정했던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그 무렵 유럽을 휩쓸었던 자유주의에 경도되어 제국의 기반을 뒤흔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니콜라이 1세의 러시아 제국은 과거의 전제적 정치제도에 집착하게 되고 러시아는 무능한 정부와 함께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 채 유럽의 변방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국가주의에 입각한 러시아 제국은 엄격한 검열제와 비밀경찰제도를 시행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제국에 반대하는 급진적 반대자들을 모조리 시베리아의 유형지로 보내버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골은 속물적이고 억압적인 1800년대 러시아 사회를 예리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풍자하여 러시아 리얼리즘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다.
1927년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연극배우의 꿈을 꾸기도 하고 대학에서 세계사를 강의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집필에 몰두한다. 1929년에 자비로 시집을 출간했으나 고작 250부가 팔리고 악평을 받자 시집을 모두 회수하여 불태워버리고 만다. 이후 우크라이나와 카자크 지역 민담 속의 마녀와 정령들의 이야기를 다룬 ‘디칸키 지역의 밤 이야기’가 비교적 호평을 받고 이어 발표한 단편집 ‘미르고로드’가 당시 러시아 문단의 대가였던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칭찬을 받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고골은 이 무렵 생계를 위해 일 년가량을 페테르부르크에서 하급 공무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이때 경험한 정부의 무능, 부패, 부조리는 이후의 작품에 커다란 모티프를 제공한다. 1836년 쓴 그의 희곡 ‘검찰관’은 권력에 대한 굴종과 아첨, 당대 러시아의 부패와 나약한 인간 본성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마을 여관에 묵고 있던 무일푼 한량을 검찰관으로 오인하고 벌어지는 촌극과 그 가운데 인간의 허위와 헛된 욕망이 희극적으로 드러난다. 허풍쟁이 사기꾼 흘레스따꼬프는 지주와 관리들을 마음껏 농락한다. 1836년 4월 19일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공연 직후 작가의 의도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황실의 친위세력들은 러시아의 체제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혹평한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러시아 사회와 관료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며 환호했다. 귀족들과 함께 이 연극을 관람한 니콜라이 1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두들 멋지게 얻어맞았어. 그러나 누구보다도 호되게 얻어맞은 것은 황제인 나야.” 고골은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대해 자신의 의도와는 달랐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사회제도의 부조리와 비리를 폭로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심성에 존재하는 허영, 위선, 어리석음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꾼의 정체가 드러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 시장은 이렇게 한탄한다. “보라, 온 세상 사람들아! 모두들 이 시장이 어떻게 바보가 되었는지 똑똑히 보라. 나는 바보다. 바보!” 그리고 자신을 향해 비웃음과 조롱을 보내는 사람들을 향해 한 마디 덧붙인다. “뭐가 우습나? 결국은 자기를 보고 웃는 것 아닌가?” 고골의 ‘검찰관’은 인간의 나약한 본성에 대한 은유였다.
1836년 ‘감찰관’의 공연과 함께 발표된 고골의 단편 ‘코’는 어떤 의미에서 20세기 부조리 문학의 19세기 버전으로 보인다. 어느 날 사라진 내 코. 내 코는 어디로 갔을까? 코로써 상징되는 많은 것들... 욕망, 꿈, 허위와 위선... 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간의 본질,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부조리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알려진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트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대해 언급한다. 높은 언덕 위로 무거운 바윗돌을 힘들여 올려놓는 시지프스는 언덕의 꼭대기에서 다시 바위를 아래로 굴린다. 그렇게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그 모습에서 무언가 모를 자신의 본질,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것, 그런 현실 속에서 인간은 삶의 부조리를 느낀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두 명의 부랑아가 무대에 올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고도가 올까?” 그러나 연극이 끝날 무렵 한 소년이 등장하여 오늘도 고도는 도착하지 않을 것을 알린다. 그렇듯 우리가 간절히 찾고 있는 그 무언가가 고골의 단편에서 ‘코’로 의인화되는 것이다. ‘코’는 러시아어로 ‘нос’인데 이 철자를 뒤집으면 ‘сон’ (꿈)이 된다는 점에서 고골의 의도를 드러내는 장치로 인식되기도 한다.
'페테르부르크의 이발사 이반 야꼬블레비치는 아침식사 도중 빵에서 사람의 코를 발견한다. 놀란 그가 코를 헝겊에 싸서 강에 버린다. 한편 8 등관 하급관리 꼬발료프는 잠을 자고 일어난 뒤 자신의 얼굴에서 코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그는 사라진 자신의 코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페테르부르크의 한 거리에서, 커다란 깃을 세우고 금실로 수놓은 정복에 양가죽 바지를 입고, 5 등관의 모자 깃털 장식을 하고 허리에는 대검을 찬 자신의 코가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지점에서 고골의 ‘코’는 인간의 욕망, 꿈, 허영, 권위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환상 속의 바람이 현실로 치환된다. 카뮈의 ‘변신’에서 인간이 벌레로 바뀌는 악몽과 별로 다르지 않게 끔찍하다. 꼬발료프는 자신의 코에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애원하지만, 이미 현실 속의 코는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신분이다. 어느 날 경관이 그의 잃어버린 코를 가지고 그를 찾아왔고, 그것을 다시 제 자리에 붙일 수 없던 꼬발료프는 하릴없이 기다린다. 그리고 두 주 후, 그는 자신의 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음을 발견한다.' 고골은 이 허무맹랑한 사건을 통해 인간 존재가 처해있는 불가사의 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코’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하나하나 따져본다면 전체적으로 이 사건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비현실적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내포되어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1836년 ‘검찰관’의 상연이 논쟁 끝에 중단된 후 고골은 돌연 러시아를 떠나 이태리 로마로 옮겨간다. 그리고 오랜 방랑의 생활이 시작된다. 12년의 세월 동안 고골은 스위스, 파리, 로마와 러시아를 오가면서 1847년, 남녀의 헛되고 가식적인 관계와 결혼의 허구성을 풍자한 희곡 ‘결혼’을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한다. 고골 문학의 백미로 알려진 ‘죽은 혼’은 농노 체제를 기반으로 한 19세기 제정 러시아 지주 사회의 도덕적 타락과 관료체제의 모순과 부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주인공 치치코프는 지방도시의 지주들에게서 죽은 농노를 사 모은다. 죽었으나 호적에 살아있는 것으로 기재된 농노에게도 인두세가 부여된다는 것을 알게 된 사기꾼 치치코프는 지주들에게서 죽은 농노를 사들인다. 탐욕스러운 지주들 입장에서도 인두세를 피할 수 있었던 까닭에 그에게 헐값으로 농노를 매각하고 치치코프는 그들을 담보로 은행에서 거액의 융자를 받으려 한다. 인두세와 관료들의 부패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던 그가 열여섯의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지자 그를 사모했던 귀부인들이 질투심에서 그를 공격하고 농노 매매를 거부했던 인물이 그의 범죄행각을 고발하자 치치코프는 도망치듯 도시를 떠난다.
‘죽은 혼’은 죽은 농노들이며 동시에 정신적으로 죽은 러시아 사람들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고골이 말년에 겪고 있던 정신적 혼돈과 영혼의 일탈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후 고골은 ‘죽은 혼 2부’를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병에 시달리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광적으로 종교에 빠져들었고, 러시아의 사회, 정치체제,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던 젊은 시절의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삶의 고단한 무게,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그는 정신 착란에 빠져 ‘죽은 혼 2부’의 원고를 불 속에 던져 버린다. 그리고 열흘 간 곡기를 끊고 있다가 마침내 아직 겨울의 추위가 남아있던 2월의 어느 날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유산이었고,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스승이랄 수 있었던 고골은 그 외로운 말년에 자신의 잃어버린 외투를 찾아 헤맸던 것은 아닐까? 그는 19세기의 러시아 사회와 민중들의 삶을 통해 오늘날의 불안한 인간상, 어두운 인간 본성을 예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성은 바닷가 모래 알 만큼이나 무수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같지 않다. 천하든 고귀하든 그 모든 본성이 처음에는 인간에게 복종하다가 나중에는 그의 무시무시한 지배자가 된다.” (‘죽은 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