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읽는 영문학
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학은 인류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언어의 사용과 문자의 발명 그리고 운율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인간은 문학이라는 참으로 놀라운 문화와 예술의 기초를 만들어내었다. 인간의 삶, 그들의 본성, 그리고 그들이 겪어야 하는 갈등을 통해 문학은 역사보다 더 구체적으로 삶의 흔적을 문자 속에 남겨왔다. 문학은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신과 자신 사이의 갈등을 그린다. 그럼으로써 신에 대한 경외와 복종뿐 아니라 신의 절대성에서 벗어난 인간의 독립성, 인간의 이성, 권위에의 항거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할 수 있었고, 거대하고 무자비한 자연의 힘에 맞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정신을 고취하였던 것이다. 이 자연에 대한 투쟁의 의식이 근대 과학정신의 기초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아울러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 그 갈등과 대립만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 그리고 궁극적인 화합의 정신을 가르쳐준 것도 문학이었다. 더욱이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나 자신의 행위와 생각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 또한 문학의 역할이었다.
독일의 시성이라 불리는 괴테는 “내가 발표한 모든 것은 커다란 고백의 단편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문학은 고백일지 모른다. 우리의 삶, 우리의 마음과 행위에 대한 고백이다. 문학은 그런 내면의 고백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준다. 한편 19세기 후반,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과학적 이론들이 기독교의 오랜 가르침들에 도전하자, 서양인들은 혼란과 불신의 시대에 대중의 교화와 선도를 위한 문학의 역할을 주장한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는 문학을 ‘인생의 비평’이라고 말했다. 삶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문학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아놀드의 사회비평서 ‘교양과 무질서’는 문학이 혼돈 속에 방황하는 인간을 교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문학은 즐거움을 통해 교훈을 준다는 의미에서 ‘달콤함에 싸인 약’(sugar-coated pills)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게 문학은 고백이며 인간 교화의 수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들도 문학을 부분적으로 밖에는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추상적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몇 마디 말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문학은 우리의 삶에 관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삶을 다루지 않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시에서 조차도 그 속에는 인간의 삶이 들어있다. 그 자연의 모습을 통해 결국은 인간의 감동과 환희, 아픔과 슬픔, 평화와 대립의 감정들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이며, 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에 관한 것이다. 수 천 년 전의 문학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늘의 우리와 다른 것인가? 과학과 기술의 발전, 환경의 변화 등으로 우리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불과 몇십 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과 본성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작가들이 그려내는 세상의 배경은 지극히 신화적이다. 하지만 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가? 수 백 년 전에 살았던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어떤가? 죄의식과 후회에 빠진 오이디푸스, 사랑의 열정에 빠져 모성을 잃은 메디아,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몰락한 맥베스, 질투에 사로잡혀 아내를 죽이는 어리석은 오셀로... 그들은 그저 과거의 인물들일뿐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 엄청난 격변의 시대에도 흔히 발견되는 인간의 모습이다. 물리적인 환경이 제 아무리 변화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근본적인 감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통해 인간을 배운다. 그리고 삶의 지침을 얻는다. 문학은 그렇게 우리의 삶과 밀접히 관계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