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영광, 빅토리아 시대

by 최용훈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무려 63년 간 영국을 통치하였다. 1877년부터는 인도의 여제(女帝)로 선포되기도 하였다. 이 여왕의 통치기간을 가리켜 영국사에서는 ‘빅토리아 시대’라 부른다. 19세기 후반의 영국은 제국주의 시대의 대영제국이 가장 번창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중세의 영국은 중간 크기의 비교적 부유한 국가였다. 탐험가들에 의해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자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해 식민지들을 건설했고, 그것들을 통해 자국의 무역회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영제국은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모든 계층의 영국인들이 세계 각처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북미, 호주 대륙, 남아프리카, 아일랜드 등지에 정착 식민지들이 건설되고, 인도, 나이지리아, 자메이카 등에는 식민지 무역회사가 세워졌다. 그중 대영제국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동인도 회사’(The East India Company)였다. 1599년 설립된 이 식민지 무역회사는 1858년까지 식민지 인도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영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이 식민지 무역회사들은 영국의 산업에 값싼 원자재를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영제국은 1900년 경 절정을 이루었다. 영국은 영토와 인구 면에서 세계의 약 4/1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세계 역사에 가장 거대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것이다.

영국은 1700년대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의 요람이었다. 산업화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던 시절 영국의 통치자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영국은 산업 부분에 있어 선두주자였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제위 기간은 대영제국의 황금기였다. 식민지 곳곳에서 갈등이 벌어지고는 있었지만 새로운 산업들은 엄청난 양의 원자재들을 필요로 하였고, 그 대부분은 전 세계에 흩어진 식민지를 통해 공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지에 축적된 거대한 부는 다른 지역의 국민들에게는 분배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영국 사회는 다른 산업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노동자 계급이 대두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어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도시들은 가난한 사람들로 넘쳐났고, 열악한 주거시설로 공중보건은 악화되고 공장에서의 노동 환경은 위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범죄와 매춘이 횡행하는 도시의 지하세계는 점점 더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런던의 거리 세 집 건너 한 집이 매춘업소였을 정도였다.


동시에 중산계층 또한 엄청난 속도로 증가되었다. 그들은 주로 공장의 소유자이거나 사업가들이었다. 그들은 근면했고, 검소했으며 당시의 기준으로는 제법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높은 도덕적 기준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신문과 잡지 그리고 소설의 구매자들이었다. 당대의 언론이나 그 밖의 분야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던 중산계층은 정치와 경제 문제에 있어 귀족들의 지배력에 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사회의 가장 밑바탕에는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도시의 빈민가를 이루고 살던 그들은 열악한 공장 아니면 거리로 내몰려 범죄 계층이라 불리는 도둑, 소매치기,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와 같은 소설가들은 산업사회의 불공정을 공격함으로써 비뚤어진 사회의 양심을 강하게 공격하였다. 그의 작품들 속에 나오는 올리버 트위스트나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같은 고아(孤兒)들이 처음으로 월간지 속에 등장하였는데 중산계층이 이들의 주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이후 영국 사회를 특징짓는 계급제도가 공고해진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킨스와 마찬가지로 많은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들은 천박한 공장주에 의해 박해 받는 가난한 노동자들과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는 고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부르주아 유산 계층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은 18세기나 19세기 전반 낭만주의 문학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은 전문가나 엘리트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증기력으로 작동되는 인쇄술의 발전으로 책의 가격은 현격하게 낮아졌고, 철도의 발전으로 도서들이 신속하게 보급될 수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중산층의 기호에 맞는 새로운 장르들이 등장하게 된다.


책이 상류층만의 특권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의 오락거리가 되자 정기 간행물들이 넘쳐나가 시작했다. 이 잡지들은 뉴스, 풍자 수필, 시와 소설 등을 월 단위 시리즈로 수록했고, 작가들은 보다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찰스 디킨스,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로버트 및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부부(Mr.& Mrs. Robert Browning) 등의 뛰어난 작가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에 문학이 널리 확산됨으로써 이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태도나 관심사를 알기 위해서는 문학의 연구가 중요해졌다. 이 시기에 쓴 많은 작품들은 과학, 도덕,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대한 대응이었다. 브라운 대학의 명예교수인 조지 랜도우(George Landow)의 주장에 따르면 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낭만주의의 과도한 주관성’(1798~1830)에서 탈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낭만주의의 “개인성, 독창성, 강렬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실함‘을 지키고 싶어 했다. 따라서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들은 낭만주의의 주관성과 신고전주의(1660~1798)의 객관성을 결합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랜도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이나 자전소설의 탄생은 작가로 하여금 별다른 강박관념 없이 문학에 개인적 경험을 부여할 수 있게 하였다. “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 문학 장르는 소설이었다. 끊임없이 발전하던 소설은 마침내 가장 두드러지는 문학적 표현의 매체가 되었다. 소설의 틀 속에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사실주의’(realism)가 등장했고 이는 낭만적 주관성과 신고전주의적 객관성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지 엘리엇은 ‘아담 비드’(Adam Bede)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삶 속 사랑의 고통을 일상적인 것에 대한 충실한 재현에 부여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켜야겠어요.” 이 말속에서 보듯 엘리엇과 디킨스를 포함한 사실주의 작가들은 문학의 목적이 세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실제와 같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현실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믿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경험주의와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신고전주의의 객관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랜도우) 그러나 낭만주의가 빅토리아 시대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사실주의자들의 문체 속에서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소설이 문학의 지배적인 장르로 자리 잡고 있었지만 시인들 역시 문체와 이야기의 서술 방식에 끊임없이 실험을 계속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서사시’(epic)와 로버트 브라우닝의 작품에서 주로 보게 되는 ‘극적 독백’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이었던 테니슨은 극적 독백과 보다 서정적인 문체 그리고 서술과 이미저리를 사용함으로써 ‘회화적’(picturesque)이라 불렸던 시적 개성을 사용해 이 시대 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두 가지 다른 문학적 흐름은 ‘전기 라파엘주의’(Pre-Raphaelites, 1848-1860)와 ‘유미주의 및 데카당스 운동’(Aestheticism and Decadence Movement, 1880-1900)이었다. 전기 라파엘주의는 그들의 작품에 정확성과 단순성이라는 기법을 사용해 현대에 맞는 예술을 만들고자 하는 데서 발전되었다. 반면 유미주의는 예술의 궁극적 목적이 ‘아름다움’의 추구라고 믿고 그 외의 모든 고려, 이를테면, 독자의 수용과 같은 효율성을 배제했으며, 데카당스는 세기말적 허무와 퇴폐의 분위기 속에 자극과 도취를 추구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인 앨버트 공(公)이 1861년 사망하자 2년간을 두문불출하며 상심의 시간을 보냈다. 공적인 자리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와이트 섬(The Isle of Wight)이나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 지방에 머물렀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이기도 했던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스코틀랜드 궁전에 최측근 신하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브라운(John Brown)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오랜 시간 체류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여왕을 비난하던 언론은 빅토리아와 존 브라운의 관계를 왕가의 스캔들로 만들고 싶어 했다. 여왕을 ‘브라운 부인’(Mrs Brown)이라 부르기까지 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희화화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빅토리아 여왕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애도하는 검은 의상을 입고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20세기의 첫 해에 빅토리아 여왕의 사망과 더불어 긴 빅토리아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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