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리, 낭만주의자의 자유와 방종

by 최용훈

19세기 전반 영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는 서른의 젊은 나이에 보트 사고로 익사한다. 그와 우정을 나누었던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서른여섯에, 그의 또 다른 친구 키츠(John Keats, 1975~1821)는 불과 스물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에 의해 싹튼 영국의 낭만주의는 이 요절한 세 천재들에 의해 활짝 꽃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고전주의의 획일성과 규범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정신과 직관, 상상력에 기대어 이상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이 세 시인 가운데 가장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인물이 셸리였다. 그는 바이런의 활력과 키츠의 상상력을 함께 지니고 있었고, 높은 지적 호기심과 더불어 전혀 예측 불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셸리는 서정 시인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시는 대중의 생각을 바꿔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상적인 개혁주의자였다. 그의 두 동료 중 키츠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바이런은 귀족의 혈통을 이어받아 상원의원이 되기는 했지만 그가 의회에서 발언한 것은 단 세 차례뿐이었다. 반면에 셸리는 끊임없이 정치에 몰입하였고, 자유주의 사상에 빠져있었다. 아마 오늘날 살아있다면 TV 정치 대담 프로그램의 단골 게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1811년, 모든 형태의 권위에 반발했던 셸리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퇴학당한다. 그가 ‘무신론의 필요성‘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익명으로 써서 출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는 ’ 현상에 대한 정치 수필‘이라는 제목으로 혁명을 노골적으로 선동한 글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 글은 2006년이나 되어서야 세상에 나오게 됐는데 그를 쫓아냈던 옥스퍼드 대학이 상당한 금액을 주고 원고를 구매하였다고 한다. 열아홉의 나이에 쓴 그 글의 일부이다:


파괴가 그대를 본다! 핏자국 선명한 황야 위로

죽음의 질식할 것 같은 통곡이 희미하게 들린다.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싸우거나 죽어야 할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음의 붉은 제단 위, 난도질당한 시체더미 속에 누워있다.


천둥의 굉음에 깨어나 압제자의 손에서

가혹한 억압의 낙인을 깨부숴라.

썩어가는 왕관 위에 이성을 세우고

상처 입은 국가가 신음을 멈추게 하라.


셸리는 영국 서식스(Sussex) 주 호셤(Horsham)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회의 하원의원이었고 그 덕에 셸리는 영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이튼스쿨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 그는 톰 페인(Tom Paine)이나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과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글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은 젊은 시절 그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자유주의자였다. 정치적 사상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 또한 그러했다. 1811년 옥스퍼드를 떠난 열아홉의 셸리는 16세의 해리엇 웨스트브룩(Harriet Westbrook)과 스코틀랜드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고 이 일로 그는 가족과 소원한 관계가 되고 만다. 두 사람은 두 명의 자식까지 두었으나 결국은 헤어지게 된다. 1814년 셸리는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자신의 우상이었던 급진 사상가 고드윈과 여성주의 운동의 선각자라 할 수 있는 메리 월스톤크래프트(Mary Wollestonecraft)의 딸인 16세의 메리 고드윈이 그 대상이었다.

메리 & 퍼시 비시 셸리

셸리는 사상가 고드윈이 한 때 주장했던 것처럼 자유연애를 믿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낳았던 해리엇은 여동생과 같은 존재였다며 새로운 사랑 메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토록 이기적인 망상은 곧 깨어지고 만다. 급진적 자유주의자였던 고드윈도 자신의 딸 문제에서는 자유연애를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셸리는 이런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나는 그 잘난 집단에는 섞이지를 못했다.

그들의 원칙은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애인, 한 사람의 친구만을 고르라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현명해도 나머지는 모두

차가운 망각 속에 묻으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금이나 흙처럼

나눈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는 메리와 함께 유럽으로 도피했고, 1816년 제네바 호수 부근에서 바이런과 여름을 함께 보낸다. 그곳에서 셸리는 시를 쓰고, 메리는 여류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게 될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구상한다. 당시 셸리는 호수에 면한 멋진 여름 별장을 임대했는데 그곳을 바이런이 방문했던 것이다. 바이런은 나폴레옹식의 멋진 마차를 타고 여러 명의 하인들, 사치스러운 물품과 개인 의사, 개와 공작새와 원숭이를 데리고 도착했다. 당시 셸리는 연인 메리뿐 아니라 그녀의 의붓 자매인 클레어 클레어몬트(Claire Clairmont)와 함께 있었다. 클레어는 바이런의 연인이었고 이후 그의 딸을 낳게 된다. 자유롭고 방탕했던 두 귀족 시인은 이곳에 머물며 그들의 대표작들을 창작한다. 바이런의 ’칠런의 죄수‘(The Prisoner of Chillon)와 ’ 헤럴드 공자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 셸리의 ‘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Hymn to Intellectual Beauty), 몽블랑(Mont Blanc)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1816년 12월 셸리와 메리는 마침내 결혼한다. 셸리의 첫 여인이었던 해리엇이 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몇 주 지난 뒤였다. 자유분방한 셸리의 냉정함이 빚은 비극이었다. 메리와 결혼한 지 두 해 후인 1818년 셸리는 가족을 데리고 이태리의 여러 도시들을 전전했다. 이 기간 동안 셸리는 해리엇과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이를 잃었고, 메리마저도 정신질환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 참담한 시기에 셸리는 ’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 1818-19)와 키츠의 사망 직후 쓴 ’아도나이스’(Adonais, 1821) 등 많은 시를 쓰게 된다. 셰익스피어가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그의 4대 비극을 썼던 것처럼 셸리에게도 이 어려운 시기에 작가의 창작열을 불태웠던 것이다. 과연 예술혼은 고통 속에 살아나는 것인가.


셸리의 문체는 지극히 음악적이었다. 그는 오페라를 사랑했다.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했던 그는 오페라에 적합한 시를 쓰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 영국의 어떤 시인보다도 그의 시는 더 자주 음악으로 작곡되었다. 다음은 수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던 서정시이다.


Music, when soft voices die,

Vibrates in the memory;


Odours, when sweet violets sicken,

Live within the sense they quicken.


Rose leaves, when the rose is dead,

Are heap’d for the belovèd’s bed;


And so thy thoughts, when thou art gone,

Love itself shall slumber on.


음악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사라져야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집니다.


향기는 아름다운 바이올렛이 시들어야

그것이 깨워놓은 감각 안에 살아납니다.


장미꽃잎은 장미가 죽어야

사랑하는 님의 침상에 덮입니다.


그렇듯 당신이 떠나면 사랑은

당신 생각에 기대어 잠이 듭니다.


셸리의 음악성과 관련해 20세기 초반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로버트 브리지스(Robert Bridges)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초서, 위대한 셰익스피어 그리고

고전적 밀턴. 그 뒤로

언어 속에 흐르는 음악을 만든 셸리


음악과 같았던 셸리의 삶과 문학은 낭만주의의 많은 정신들을 드러낸다. 환상적인 상상력, 자연에 대한 경외, 절정에서 절망에 이르는 감정들, 개인과 인간의 정신에 대한 믿음 등이 그것이다. 그는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천재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는 자유주의는 방종에 기울었고, 사랑의 자유로움은 한 여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초래하였다. 1822년 4월 셸리는 이태리 북서부 해변의 레리치 만에 정착했다. 그 해 7월 8일 그는 친구였던 바이런과 리 헌트(James Leigh Hunt, 1784~1859)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타고 있던 보트가 전복되어 익사하고 만다. 물에 몸을 던진 해리엇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귀족적인 삶 속에서 자유를 구가한 한 낭만주의자의 200년 전 허망한 죽음이 그의 문학 속에 표현되었던 개혁의 사상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키츠가 묻힌 로마의 개신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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