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문학의 예언

by 최용훈

문학은 예언적이다. 문학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기댄 모든 역사 속의 행위들은 이미 문학을 통해 예언되어 왔다. 서양 문학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리스-로마의 희곡과 서사시(epic poems) 속에는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인간의 열망과 사랑과 탐욕이 생생히 그려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의 서사시들은 이미 훨씬 오래전 기원전 20세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서사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문학적 소재들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의 문학이 담고 있는 세계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희곡이나 서사시들은 대부분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이 용어는 ‘진행되는 일 가운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고대의 문학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 가운데 중요한 상황 즉 이전 사건의 연장이나 이후에 전개될 사건의 와중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Homeros, 영어 Homer)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 혹은 Iliad)는 트로이 전쟁 중 아킬레스(Achilles)와 아가멤논(Agamemnon) 사이의 논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그 이전의 연대기적 사건, 이를테면 아킬레스나 아가멤논의 탄생이나 트로이 전쟁의 원인 따위는 접어두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특정 사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의 사건들은 도입부에서의 간략한 설명이나 플래시백(flashback)을 통해 언급될 수는 있었다. 이러한 서사시의 원리는 현대의 무수한 문학작품 속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수천 년에 걸쳐 문학 작품들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 그 가운데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이나 행위의 원형들을 담게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희곡 히폴리투스(Hippolytus)는 그릇된 사랑의 정념이 빚어낸 비극을 다루고 있다. 히폴리투스는 한 왕국의 왕자였다. 왕비였던 그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부왕은 어느 날 페드라(Phaedra)라는 이름의 여인을 새 왕비로 맞이한다. 이 지점에서 운명의 수레바퀴(a wheel of fortune)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새어머니 페드라가 아들인 히폴리투스를 남자로서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신의 정념을 히폴리투스에게 전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경멸뿐이었다. 마침내 페드라의 빗나간 사랑은 증오로 변하고 그녀는 거짓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전쟁에 나섰다가 돌아온 부왕은 왕비의 죽음과 함께 그녀가 남긴 유서를 보게 된다. “당신의 아들이 날 범하였으니 더 이상 당신을 볼 수 없습니다... “ 왕은 극도의 분노와 실망 속에서 아들을 성에서 추방한다. 그리고 쫓겨난 히폴리투스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2500년 전에 써진 이 작품은 그릇된 사랑의 정념과 그것에서 비롯된 증오와 복수라는 보편적 문학의 주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미국의 희곡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작품 속에서 이 주제는 반복된다.

히폴리투스와 페드라


뉴잉글랜드 지역의 한 척박한 농장에서 인색하고 거친 아버지와 세 아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째와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학대와 농장 생활의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캘리포니아의 금광을 찾아 집을 떠난다. 그렇게 막내아들 에번만이 농장에 남겨진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애비라는 젊은 여성을 아내로 맞아 집으로 들인다. 그리고 또다시 비극적인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아간다. 젊은 에번과 애비는 새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잊은 채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심지어 애비는 에번의 아이를 임신한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자 에번은 두려움에 빠진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결국 그는 애비를 멀리한다. 그러자 그녀는 에번의 사랑이 식은 것은 아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곡된 사랑의 정념은 모성을 파괴하고 애비는 잠자는 아이의 얼굴에 베개를 덮어 살해한다. 빗나간 사랑에 더해 파괴된 모성에 의한 유아 살인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이 앞서 얘기한 에우리피데스의 또 다른 희곡 ‘메데이아’(Medeia)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메데아는 연인 이아손과 결혼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사랑했던 남편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여 집을 떠나자 증오심이 사로잡힌 그녀는 남편이 가장 괴로울 복수를 다짐한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 사이의 두 아이를 살해하여 그 목을 남편에게 보낸다. 끔찍한 결말이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장 불변의 것으로 믿어져 온 모성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빗나간 남녀 간의 관계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가. 이 극단적인 사건이 현실에서도 가능한 것일까? 오늘날 빈번히 보도되는 유아 살인의 범죄가 아이의 어머니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이 전하는 비극적인 예언에 다름이 아니다. 문학은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뿐 아니라 가장 악마적인 욕망과 일탈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의 여류 소설가 메리 셸리(Mary Shelley)는 당대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정치평론가였던 윌리엄 골드윈(William Goldwin)과 유명한 페미니스트이자 ‘여성 권리의 옹호’(The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1792)의 저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사망하자 메리의 양육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맡겨졌다. 메리는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극단적인 이상주의자였던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결혼해 셸리라는 성을 얻게 된다.


그녀 공포소설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1818)에서 메리 셸리는 신의 위치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헛된 욕망을 그리고 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과학의 힘으로 인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 여러 조각을 붙이고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어 마침내 인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의식을 갖고 깨어난 새로운 생명체는 수술대 위에서 일어나 프랑켄슈타인 박사 앞에 나타난다. 열망과 기대에 가득 찼던 박사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는 순간 극도의 공포감을 느낀다. 거대한 체구의 그 흉측한 괴물의 모습에 놀란 박사는 연구실에서 도망치고 만다. 그렇게 오늘날의 가공할 과학의 힘과 그 결과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성을 묘사한다. 또한 그것은 신과 동일화되려는 인간의 허망한 욕망을 예언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

21세기 인간은 엄청난 과학의 발달에 의해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낸다. 1990년대 초반 중국계 미국의 젊은 과학자 두 사람은 수컷 개미의 유전자를 조작해 동성애 개미를 만들어냈다. 30여 년 전에 인간은 벌써 유전자 조작이라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유전자가 같은 개와 소가 만들어지고 언젠가는 나와 같은 인간들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공장에서 물건이 생산되듯 나의 복제물들이 홍길동의 머리카락처럼 등장할지도 모른다. 현대의 과학이 만들어 낼 환상 같은 현실이다.


1726년 영국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가 쓴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는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Laputa)라는 곳이 나온다. 걸리버는 라퓨타 섬이 지배하는 땅 발니바비(Balnibarbi)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곳의 과학자들은 실용성이 없는 괴상한 연구에 몰두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오이에서 햇빛을 추출하고, 대리석을 부드럽게 만들어 베개로 쓰려한다. 또한 냄새로 물감을 혼합하고 심지어는 의심스러운 사람의 대변을 연구해 정치적인 음모를 찾아내려 한다. 황당하고 무의미한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에 대한 풍자라 할 수 있는 소설 속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과학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현대의 과학자들은 그러한 연구가 인간들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놀라운 정보통신 기술과 유전공학이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디지털의 세계와 가상, 대체, 증강 현실이라는 것들은 인간 본연의 개체적 자유와 개인성을 파괴한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손에 만져지는 삶의 구체성을 허물어버린다. 기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인간 세상에 엄청난 위협을 가할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인간은 스스로의 지식과 야심으로 파괴될 운명에 놓이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러한 오늘의 세태는 이미 오래 전의 문학 속에서 가공할 모습으로 그려져 우리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 무모함과 탐욕, 무책임성, 과대망상과 천박함의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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