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Euripides, 480~406 BC)는 92-95편의 비극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오늘날 현존하는 작품은 18-19편 정도이다. 그는 배우들의 숫자가 늘어감에 따라 코러스의 역할을 축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대표작들은 ‘히폴리투스’(Hypolitus), ‘박코스 여신도들’(The Bacchae), ‘메데이아’(Medea), ‘트로이의 여인들’(The Trojan Women) 등이 있다.
히폴리투스(Hippolytus)
극은 펠로폰네세 북동 지역에 있는 해변도시 트로에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곳에서 아테네의 테세우스 왕은 한 지역의 왕과 그의 아들들을 살해한 후 일 년 동안의 자발적인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히폴리투스는 테세우스와 아마존 여왕 히폴리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트로에젠 왕 피테우스의 보호 아래 그곳에 살며 교육을 받았다.
극의 첫 부분에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히폴리투스가 순결의 서약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찬양하지 않고 순결한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숭배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히폴리투스는 아프로디테에 대한 그의 노골적인 경멸에 대해 경고를 받지만 좀처럼 자신의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의 냉담함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로디테는 테세우스의 새 왕비이자 히폴리투스의 계모인 페드라로 하여금 미친 듯이 남편의 아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트로에젠의 젊은 유부녀들로 구성된 코러스는 페드라가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녀는 자신이 상사병에 걸렸음을 인정함으로써 코러스와 그녀의 유모를 충격에 빠뜨린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곡기를 끊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한다.
히폴리투스와 페드라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모는 페드라에게 자신의 사랑에 따라 살라고 하며 그녀의 마음을 치유할 약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모는 약 대신에 히폴리투스에게 달려가 페드라의 마음을 전한다. 비록 페드라를 위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뜻에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유모는 히폴리투스에게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옮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그는 분노에 차 여성의 사악한 본성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자 페드라는 좌절에 빠진다. 코러스들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하게 하고 페드라는 안으로 들어가 목을 맨다. 테세우스 왕이 돌아와 아내의 시신과 그 옆에 놓인 편지를 발견한다. 그녀의 편지는 자신의 죽음을 히폴리투스의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편지를 읽은 테세우스는 그 내용을 오해하고 아들이 페드라를 강간했다고 생각한다. 분노에 찬 테세우스는 아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포세이돈 신에게 사형이나 유배형의 저주를 내리도록 요청한다. 히폴리투스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유모에게 한 맹세로 인해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코러스가 비탄에 찬 노래를 부르고 히폴리투스는 유형의 길을 떠난다.
그가 성을 떠나고 얼마 뒤 전령이 달려와 히폴리투스의 끔찍한 상황을 알린다. 그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 아프로디테의 요청을 받은 포세이돈이 바다괴물을 보냈는데 그것을 본 말들이 놀라 날뛰면서 히폴리투스를 자갈밭에 끌고 다녀 마침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령이 히폴리투스의 결백을 고하지만 테세우스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히폴리투스가 고통 끝에 죽어가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때 아르테미스 여신이 등장해 그에게 진실을 말한다. 히폴리투스는 결백하며 거짓을 말한 것은 죽은 페드라임을 밝힌다. 동시에 궁극적인 책임은 아프로디테에게 있음을 설명한다. 히폴리투스가 거의 죽어가는 상태로 성으로 들어오자 아르테미스는 복수를 다짐하며 아프로디테가 아끼는 사내는 모두 죽이겠노라고 약속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며 히폴리투스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를 용서한다.
메데이아(Medea)
황금 양털을 쟁취한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은 자신의 아내 메데아와 함께 코린스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버리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코린스의 왕 크레온의 딸 글라우세와 결혼한다. 극은 메데아가 남편의 사랑을 잃고 슬픔에 겨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나이 든 유모와 메데아의 고통을 동정하는 코린스의 여인들로 구성된 코러스는 메데아가 자신과 자식들에게 어떤 짓을 할지를 두려워한다. 메데아의 행동을 우려하던 크레온 왕도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을 코린스에서 추방할 것을 명한다. 메데아는 자비를 간청하여 하루의 유예를 얻는다. 그 하루는 그녀가 복수를 실행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아손이 메데아에게 와서 변명을 늘어놓는다. 자신은 글라우세를 사랑하지 않지만 부유한 공주와의 결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노라고 말한다. 사실 메데아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야만인 취급을 받던 부족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언젠가는 두 가족을 합치고 메데아를 자신의 공인된 정부로 삼으려 했다고 주장한다. 메데아와 코린스의 코러스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메데아는 이아손에게 그를 위해 자신의 부족을 버렸고, 심지어 오빠까지 살해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그를 구하고 황금 양털을 지키던 용을 죽인 것이 자신이었다고 절규한다. 하지만 이아손은 마음을 바꾸지 않고 단지 선물로 그녀를 회유하려 할 뿐이었다. 메데아는 이아손이 자신의 결정을 평생 후회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면서 은밀히 글라우세와 크레온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메데아는 자식을 얻지 못한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유명한 무녀이기도 했던 메데아에게 아내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메데아는 그에 대한 대가로 아이게우스의 보호를 요청한다. 메데아의 복수 계획을 모르고 있던 왕은 그녀가 아테네로 탈출할 수 있다면 그녀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메데아는 코러스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한다. 그녀는 태양신인 헬리오스에게서 받은 집안의 가보 황금 의복에 독을 묻혀 글라우세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허영심이 많은 그녀가 반드시 그 의복을 입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을 죽일 결심을 한다. 죄 없는 아이들이지만 자신을 배신한 이아손에게 가장 무서운 보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 번 더 이아손을 불러내 짐짓 사과하는 척 독이 묻은 의복과 왕관을 글라우세에게 선물로 보낸다.
메데아가 자신의 행위를 곱씹고 있을 때 전령이 도착해 그녀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린다. 글라우세가 의복에 묻은 독에 중독되었고 딸을 구하려던 크레온 왕도 독이 올라 둘 모두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메데아는 자식들마저 죽여야 할 것인가를 놓고 번민한다. 하지만 망설임도 잠시 그녀는 그것이 이아손이나 크레온 가문의 보복에서 아이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여인들의 코러스가 그녀의 결정을 한탄하는 가운데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코러스가 메데아를 말리려는 생각도 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아손은 글라우세와 크레온의 죽음을 알게 되자 메데아를 벌하기 위해 달려간다. 하지만 그의 자식들 역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메데아는 아르테미스 신의 마차를 타고 등장하여 이아손의 고통스러운 절규를 비웃는다. 그녀는 아이들의 시신과 함께 아테네로 탈출하기 전 이아손의 불행한 종말을 예언한다. 극은 그렇듯 비극적이고 예기치 못했던 악행이 신들의 의지에 의해 초래되었음을 한탄하는 코러스와 함께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