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문학의 르네상스: 캔터베리 이야기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이 시대는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한 시인의 일생을 문학사의 한 시기로 구분 짓는 것은 그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영문학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1337년부터 시작되어 1453년까지 계속된 프랑스와의 ‘100년 전쟁’은 영국인들 사이에 새로운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영어는 프랑스어에 내주었던 공식어로서의 지위를 회복한다. 한편 이 시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흑사병의 창궐은 봉건주의 쇠퇴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삶의 격차는 빈곤과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소작농들 사이에 극심한 불만과 분노를 야기했고 그 결과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중세의 모습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농민 반란의 지도자였던 존 볼(John Ball)의 다음과 같은 외침은 반란의 명분이자 구호였으며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아담이 땅을 갈고 이브가 실을 잦던 시절에 양반이 따로 있었는가?”
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이 시기는 전례 없는 격랑의 시대였지만 봉건주의가 쇠퇴하고 상업이 번성하면서 아직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서서히 중산계층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또한 중세의 몰락, 기사도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이 시기는 급속한 진보의 시기이기도 하였고, 르네상스의 조짐이 태동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노르만 정복 이후 300여 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영국은 영어로 써진 자신만의 새로운 문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등장한 작가가 초서였다.
초서의 동시대 작가로 가장 두드러지는 작가는 윌리엄 랭글랜드(William Langland)였다. ‘농부 피어스’(Piers the Plowman)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알레고리 기법이 사용된 꿈 이야기(dream vision) 형식의 서사시이다.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이 작품은 사회와 부패한 교회에 대한 풍자적 요소도 담고 있다. 그 외의 작가로는 영어로 복음서를 번역한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초서의 절친한 친구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글을 썼던 존 가워(John Gower) 그리고 여행가로서 이국적인 여행기를 쓴 존 맨더빌(John Mandeville)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역시 초서였다. 그는 중세의 인간과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인간의 위선과 타락에 대해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글을 간결하고 일상적인 문체로 남기기도 하였다. 초서의 삶을 흔히 3기로 나누는데 서른 살이 될 때까지의 첫 30년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던 시기로 이때 프랑스 시 ‘장미 이야기’(Roman de la Rose)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사랑의 알레고리인 이 작품의 첫 1,700줄은 원작에 더해 초서가 영어로 썼다고 한다. 이 시기 초서는 ‘블랑쉬 백작부인의 죽음’(The Death of Dutchess Blanche)이라는 극시를 쓰기도 하였는데 이 작품은 초서의 후원자였던 존 오브 곤트(John of Gaunt) 백작의 아내가 죽은 것을 애도하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시기는 이태리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그곳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15년간의 기간이었다. 이때 그는 이태리의 소설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사랑에 빠진 자’(Il Filostrato)라는 작품을 각색한 '트로일러스와 크리시드'(Troilus and Criseyde)를 쓰기도 하였다. 보카치오는 단편 소설집 ‘데카메론’(Decameron)으로 근대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가이다. 마지막 시기는 영국으로 돌아와 영어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한 때로 그의 ‘캔터베리 이야기’(Canterbury Tales)는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하였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프롤로그와 24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다양한 계층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영국에서는 대성당이 있는 캔터베리로 순례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초서는 순례자들이 안전을 위해 한 여관에 모인 후, 무리를 지어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에 착안해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다양한 사회상을 보여주려 하였다. 원래는 30명의 순례자들이 가고 오는 길에 두 편씩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총 120편에 달하는 이야기를 구상하였다고 하는 데 결국 초서의 죽음으로 24편의 이야기로 그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중세 사회의 축도’라고 불릴 만큼 여러 계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중세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 그리고 그들의 가치관을 흥미롭게 전개시키고 있다. 기사, 수도사, 시골 아낙, 오쟁이 진 남편 등 여러 계급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중세의 인간과 사회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궁정풍의 로망스, 성의 혁명과 여권의 신장을 외치는 정치, 사회적인 이야기, 익살맞고 상스러운 이야기, 경건한 설교 조의 이야기 등 다양한 글들이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캔터베리 이야기’의 중요성은 그것이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영어로 써진 최고의 걸작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 영문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는 ‘영시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데,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결하는 대표작가로서 ‘신곡’의 저자인 이태리의 단테(Dante)에 비견되기도 한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최초로 영국에 인쇄술을 들여온 캑스턴(Caxton)에 의해 1478년 책으로 출간된다.
사월의 단 비가
삼월의 가뭄을 뿌리까지 뚫고 들어가,
구석구석 그 비로 적실 때
그리고 그 힘으로 꽃들이 피어날 때;
미풍이 그 달콤한 숨결로
논밭과 들판 연약한 새싹들의
생기를 돋울 때; 새로운 계절의 태양이
백양궁을 절반쯤 돌았을 때,
그리고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작은 새들이 노래 부를 때
(그렇듯 자연이 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느니);
그때 사람들은 순례의 길을 떠나고자 한다
(낯선 해안을 찾아 헤매는 순례자들)
방방곡곡 알려진 저 먼 성지들로.
‘캔터베리 이야기’ 서막 중에서 (4)
순교자 토마스 베케트의 성지인 캔터베리 성당을 향해 순례의 길에 오르는 여행객들이 한 여관에 머문다. 위의 구절은 작품의 시작인 서막(prologue)의 첫 부분으로 순례가 이루어지는 4월, 봄철 모습을 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연의 행위를 묘사하는 '뚫다 pierce' '피우다 engender' '생기를 돋우다 quicken' '설레게 하다 goad' 등의 동사들은 새로운 탄생에의 자극을 보여준다. 움트는 새로운 생명의 등장은 언제나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From Prologue, Canterbury Tales by Geoffrey Chaucer
When April with its showers sweet
The drought of March has pierced to the root,
And bathed every vein in such liquor,
From whose virtue is engendered the flower;
When zephyr too with his sweet breath
Has quickened, in every farm and field,
The tender sproutings; and the young sun
Has in the Ram his half course run,
And small birds made melody,
That sleep all the night with open eye
(So Nature goads them in their hearts);
Then people long to go on pilgrimages
(palmers to seek strange shores)
To far-off shrines, known in sundry lands;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