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캑스턴의 인쇄술-학문의 부흥
​(1400-1550)

중세 영문학의 끝-연극의 부활

by 최용훈

중세 영문학의 마지막 시기는 학문의 부흥기였다. 엄청난 변화의 물결에 휩싸인 이 시기는 영국의 국력이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1476년 캑스턴(Caxton)이 영국에 인쇄술을 도입한 것은 학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쇄술은 서적의 대량 출판을 가능케 해 교육의 평등을 이루어내고 이로써 학문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는 프랑스와의 전쟁인 ‘백년전쟁’과 왕권 다툼이었던 ‘장미전쟁’에 ‘종교개혁’까지 이어진 까닭에 문학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또한 유럽 대륙에서 진행 중인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크게 늘어나 문학보다는 학문적 측면에서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 문헌은 1487년 런던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Utopia, 1536)였다. 옥스퍼드대학 재학 때부터 유럽 대륙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받았고 특히 유럽 최대의 지성이라고 불린 네덜란드의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와 친교를 맺었다. 1511년 에라스뮈스는 영국 여행 중에 그의 ‘우신예찬’(Praise of Folly)을 구상하였고 모어의 집에서 집필하기도 하였다. 모어의 ‘유토피아’도 에라스뮈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1515년 외교관으로서 네덜란드를 방문했던 모어는 여행 중에 이상적인 국가를 그린 ‘유토피아’를 쓰기 시작했고 이듬해 귀국하여 완성하였다. 모어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대법관이기도 하였으나 헨리 8세의 이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아 1534년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1535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모어는 로마 교황에 의해 시성 되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유토피아’의 주인공 히스로디스는 대양을 항해하다 우연히 한 섬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에 매료되어 5년 간 그곳에 체류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 사람들에게 그곳을 알리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의 어원은 이상향에 대한 열망에 빠진 우리를 허망함으로 채운다. 고대 그리스어로 ‘ou’는 ‘없음’을 뜻하고, ‘topos’는 ‘장소’를 의미한다. 즉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이라는 뜻이다. 이 이상향의 개념은 이후 이태리 철학자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의 영국 사상가 베이컨(Francis Bacon)의 ‘노바 아틀란티스’(Nova Atlantis)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 그러나 이상향은 결국 인간의 환상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는 삶에 대한 환멸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시대 또 하나 위대한 문헌은 틴데일(William Tyndale)이 1526년 영어로 번역한 신약성서였다. 중세의 교회는 교리 해석의 오류를 감추기 위해 대중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알리는 행위를 탄압하였고, 틴데일은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한 죄로 1536년 브뤼셀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것은 종교개혁을 부정하고, 그를 ‘모든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정죄하였던 그의 옥스퍼드 대학교 선배인 토마스 모어가 처형된 다음 해의 일이었다.

학문적 관심에 밀려 이 시대에는 뛰어난 문학작품이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남겨진 것은 8권의 로망스로 이루어진 토마스 말로리 경(Sir Thomas Malory)의 ‘아서의 죽음’(Morte D'Arthur)이었다. 아서 왕의 전설을 그린 이 장편의 로망스는 원탁의 기사들이 벌이는 모험과 그들의 불행한 운명, 왕의 죽음과 기사단의 해체,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훌륭한 문학은 없었지만 15세기 영국에서는 의미 있는 발전이 있었다. 로마시대 말기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교회에 의해 금지되었던 연극이 교회에 의해 다시 부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경의 이야기를 일반 신도들에게 알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교회는 연극을 선택하였다. 성경의 이야기를 에피소드 별로 극화하여 마차 무대(pageant drama) 위에서 공연하고 다른 내용을 공연하는 마차가 그 뒤를 이어가는 형식이었다. 다시 부활한 연극은 종교적 색채를 벗어나 서서히 세속화되기 시작하였고 권선징악을 기본으로 하는 도덕적 내용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신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이야기로 변화를 이루면서 중세 말의 연극은 르네상스의 대두와 더불어 서서히 예술적 단계로 이전한다. 그렇게 다음 시대 ‘셰익스피어’의 등장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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