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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연설(1)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진술(플라톤의 '변명' 중에서)

by 최용훈

위대한 사상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기존의 신들을 불신하고 이단적인 가르침을 통해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부패시켰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선고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언론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 전체주의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의해서도 가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철학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공공연히 언급했으며 신성한 정의의 체계를 확신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인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경고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을 강요함으로써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스스로 체제의 몰락을 초래할 과정을 시작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함께 더 이상 민주주의는 그리스의 정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에 의해 영원히 몰락하게 될 것이라 예언했던 것이다. 다음은 사형이 선고된 후 소크라테스가 행한 마지막 진술이다.

불명예보다는 죽음을


오 아테네인들이여, 이제 멀지 않은 시간에 그대들은 아테네의 비방자들로부터 오명을 얻게 될 것이오. 그들은 그대들이 현자(賢者)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말하게 될 테니까. 그대들을 비난하기 위해 그들은 나를 현명하다고 말하겠지. 사실 나는 현명하지 못한데 말이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그대들이 바라는 바는 저절로 이루어졌을 것이오. 이제 나는 늙었고 죽음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니까.


나는 지금 그대들 모두가 아니고 내게 사형을 선고한 이들에게 말하고 있소. 그들에게 한 마디 더 하지요.


‘당신들은 내가 무죄 방면을 위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므로 사형을 선고했다고 생각하겠지.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리라 내가 생각했다고 믿었으니까. 그렇지 않소. 나의 유죄판결을 이끈 것은 말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소. 결단코. 내게는 당신들이 내게서 원한 것---울며 애원하고 서러워하는 것---을 할 만한 대범함도 뻔뻔함도 그럴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지. 당신들이 다른 이들에게서 늘 들어왔던 많은 말과 행동들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오.


나는 위험에 처해 평범하고 천박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소. 또한 나는 나의 변론 방식을 후회하지도 않소. 당신들의 방식으로 말하고 사느니 내 방식대로 말한 뒤 죽는 편이 낫지. 전쟁에서든 법정에서든 나 혹은 누구라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죽음을 피해야 하오. 종종 전투에서는 무기를 던져버리고 쫓아오는 적군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죽음을 면할 수도 있어. 다른 위험에 처해서도 그 나름대로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소. 무언가를 기꺼이 말하거나 행동함으로써 말이오.


어려운 것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不正)함을 피하는 일이오. 왜냐면 그것은 죽음보다 빨리 달리니까. 나는 늙고 움직임도 느리오. 그래서 늦게 달리는 죽음에 잡히고 말았지. 나를 비난한 자들은 날카롭고 빠르오. 하지만 부정함이라 불리는 더 빠른 주자(走者)가 그들을 덮치게 될 것이오. 이제 나는 당신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떠나지만 당신들 역시 진리에 의해 악행과 거짓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오. 나는 내가 받은 판정을 지켜야 하고 당신들은 당신들의 판정에 따르게 될 뿐. 그러한 일들은 그저 숙명이라 생각하오, 잘 된 일이지.


진실에 의한 처벌


내게 사형을 선고한 당신들에게 한 마디 예언을 하고자 하오. 죽음에 가까워지면 예언의 힘이 생기니까. 나를 죽인 그대들은, 내가 떠난 뒤 당신들이 내게 가했던 형벌보다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것이오, 당신들은 스스로의 삶은 돌아보지 않고 단지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나를 죽였소.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거요. 전혀 그렇지 않지. 지금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당신들을 비난하게 될 테니까. 그동안 내가 참아왔던 비난들 말이지. 그들은 더 젊고, 당신들에게 더욱 냉정하오. 그러니 당신들은 그들에게 몹시 공격적이 되겠지. 사람을 죽여서 자신의 그릇된 삶에 대한 비난을 멈추려 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요. 그것은 가능하지도 명예롭지도 않은 방법이야. 가장 쉽고 명예로운 방법은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개선하는 것이오. 이것이 떠나기에 앞서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 재판관들에게 주는 나의 예언이오.


나를 살리려 했던 재판관 여러분, 다른 이들이 분주한 동안, 사형장에 가기 전에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그대들과 얘기하고 싶소. 잠시 머물러 주오. 얘기할 시간이 있으니까. 그대들은 나의 친구들이오. 그러니 내게 일어난 이 사건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하오. 오 나의 재판관들---당신들은 진정 재판관이라 불릴 만하지--- 그대들에게 멋진 상황 하나를 말하려 하오. 지금까지는 내적 계시(內的 啓示)의 원천인 신성한 존재가 끊임없이, 습관적으로, 아주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나를 반대해왔소. 어떤 문제에든 내가 말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말이야. 이제 알다시피 마지막 최악의 것이 나에게 닥치게 되었소. 그런데 그 계시가 어떤 반대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오. 오늘 아침 집을 떠날 때도, 법정으로 오는 길에도, 내가 말하는 무엇에도 반대는 없었소. 지금까지는 내 얘기가 종종 중단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의 말이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언급에 계시가 반대한 적이 없었단 말이지. 이 침묵을 어떻게 설명할까? 바로 그거요. 그것은 하나의 암시지. 내게 벌어진 일이 좋은 것이고, 죽음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틀렸다는 암시. 만일 내가 악을 저지르거나 선을 향하지 않았다면, 이제까지의 관습적인 조짐은 분명 내게 반대를 했을 것이니까.

죽음을 왜 두려워하는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보시오. 죽음이 좋은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뚜렷한 이유가 있어. 둘 중의 하나요. 죽음은 어떠한 의식도 없는 무(無)의 상태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듯이 영혼이 변화하여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 자 이제 의식이 없는 상태를 생각해보시오. 꿈조차 방해하지 않는 잠이라면 죽음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이득이 되는 거지. 누군가 꿈의 방해 없이 잠들 수 있는 밤을 선택하고 그것을 현실의 날들, 매일의 밤과 비교한다면 평생 그 밤만큼 즐거울 밤이 어디에 있겠소. 보통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왕이라 할지라도 그런 밤을 가져본 적은 없을 거요. 죽음이 그런 것이라면 죽음은 이익인 거지. 영원은 그저 하룻밤에 불과한 것이 되니까 말이요.


죽음은 또 다른 곳으로의 여정


죽음이 또 다른 곳으로의 여정이고 사람들이 말하듯 그곳에 모든 사자(死者)들이 모여 있다면, 친구여, 재판관들이여, 이보다 좋은 것이 또 어디에 있겠소? 순례의 길을 떠난 자가 저 죽음의 세계에 도달해, 미노스(Minos), 라다만티스(Rhadamanthus), 아이아코스(Aeacus), 트립톨레모스(Triptolemus)처럼 그 세계 정의의 사도들에 의해 구함을 받고, 올바른 삶을 살다가 그곳의 심판관이 된 사람들, 그리고 신의 또 다른 아들들과 같은 진정한 재판관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순례의 길은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오. 오르페우스(Orpheus, 그리스 신화 속의 시인, 음악가), 무사이오스(Musaeus, 아테네의 전설적인 철학자, 음악가, 시인), 헤시오도스(Hesiod,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Homer, 고대 그리스의 유랑시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누군들 그 무엇이 아깝겠소? 그래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죽고 또 죽겠소. 나 자신 역시 그곳에서 팔라메데스(Palamedes, 그리스 신화 속 발명가), 텔라몬(Telam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산의 정령)의 아들 아이아스(Ajax, 트로이 전쟁의 영웅) 그리고 부당한 판결로 죽음을 맞이했던 고대의 무수한 영웅들과 멋진 만남을 갖고 싶소. 나의 고통을 그들의 고통과 비교하다 보면 적잖은 기쁨이 있으리라 생각하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세상에서와 같이 다음 세상에서도 무엇이 진실한 지식이고, 무엇이 거짓된 지식인지를 계속 탐구할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누가 현명하고, 누가 현명한 체하고, 누가 현명하지 못한 지를 알게 될 것이오. 위대한 트로이 원정의 지도자 혹은 오디세우스(Odysseus), 시시포스(Sisyphus), 그리고 수많은 다른 이들, 남자와 여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무엇인들 못할 것인가.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무한한 기쁨인가! 저 세상에서는 질문을 던졌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소. 단언컨대 그렇지 않을 것이오. 이곳에서 보다 더 행복한 외에도, 흔히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누구든 영생을 얻게 될 테니까.


각자의 길, 나는 죽고 그대들은 살다


오, 재판관들이여, 그러니 죽음에 환호해주시오. 선한 사람에게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어떠한 악도 일어날 수 없음을 알아주시오. 신들은 결코 그와 그의 것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며 다가오는 나의 종말도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음을. 이제 나는 죽음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훨씬 나은 때가 왔음을 분명히 알고 있소. 그러므로 계시가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는 거요. 또한 그런 이유로 나는 사형을 선고한 자들, 나를 고발한 자들에게 분노하지 않소. 그들은 내게 선을 베풀려 하지도 않았지만 해를 끼치지도 못했으니까. 그저 조용히 그들을 나무랄 뿐이오.


하지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소. 나의 아들들이 장성하면 그들을 벌하시오. 내가 그대들을 괴롭혔듯 내 자식들을 괴롭히시오. 그들이 재산이나 혹은 미덕이 아닌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 보인다면 말이오.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한다면, 내가 그대들에게 한 것처럼 그들을 탓하시오. 그들이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할 것을 소홀히 했고, 뭐라도 된 듯 생각했으니 말이오. 이렇게 한다면 나와 내 아들들은 그대들의 손으로 정의를 얻게 될 것이니까.


출발의 시간이 되었소. 우리는 각자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이고, 나는 이제 죽고 그대들은 살 것이오. 어느 것이 좋을지는 신(神)만이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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