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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pr 20. 2022

플라톤의 '국가'-제1권

폴리테이아(Politeia)

제1권 요약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화자로 등장시켜 두 개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정의로워야 하는가?‘ 10권으로 되어 있는 ’국가‘ 제1권에서 대담자들은 소크라테스 식 대화에 참여한다. 지지자들과 적들로 구성된 집단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제시된 모든 설명들이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며 그것들을 논박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정의에 대해 규정하지 않는다. 결국 논쟁은 아포리아(aporia,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더 이상의 논의는 불가능했고, 대담자들은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가졌던 정의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 분명한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 플라톤의 대화 속에서 이러한 아포리아의 상태는 늘 논쟁의 끝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국가‘는 이 막다른 골목을 넘어선다. 9권의 책들이 뒤따르고 책 속의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대한 풍부하고 복잡한 이론을 제시한다.


제1권은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글라우콘과 함께 종교 축제에 참가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세 사람은 길에서 우연히 아데이만투스와 젊은 귀족 폴레마르쿠스를 만나게 되는데 폴레마르쿠스는 세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소크라테스 일행은 폴레마르쿠스의 부친인 세팔루스와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세팔루스는 노년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는 곧 정의(正義)에 관한 주제로 옮겨간다.


부유하고 존경받던 세팔루스가 먼저 정의를 규정한다. 그는 그리스의 전통을 대변하듯 시인 헤시오도스(Hesiodus)가 제시한 정의의 개념에 대해 말한다. 그는 정의란 법적 의무에 맞추어 살고 정직해지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에 상반되는 예를 들어가면 그의 말을 공박한다. 즉 어떤 미친 사람에게서 법적으로 그의 소유인 무기를 빼앗았다가 돌려주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 될 것인데 그것은 그 미친 자가 무기를 들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가 법을 지키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설명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팔루스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뜨자 그의 아들 폴레마르쿠스가 아버지 대신 논쟁에 나선다. 그는 정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언급하면서 ‘정의는 친구를 돕고 적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라 말한다. 그의 이러한 정의에 대한 규정은 그의 아버지와는 다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버지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폴레마르쿠스의 정의에 대한 견해는 젊은 정치가답게 대중의 일반적인 생각을 나타낸다. 반면 세팔루스의 생각은 나이 든 기성 상인의 태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견해가 담고 있는 많은 모순들에 대해 말한다. 그의 지적에 르면 친구와 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틀리기 쉬운 것이어서 폴레마르쿠스의 정의에 대한 믿음은 자칫 악한 사람들을 돕고 선한 사람에게 해를 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과만 친구로 지내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적들도 언제나 사회의 악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통해 사람들에게 벌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는 모순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반론을 통해 폴레마르쿠스와 세팔루스의 견해가 만족스럽지는 못함을 보여주었다. 이때 소피스트(Sophist)인 트라시마쿠스가 등장한다. 느닷없이 토론에 끼어든 그는 정의에 대한 보다 분명한 정의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한다. 트라시마쿠스의 이러한 표현은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정의로운 것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정당한 행위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트라시마쿠스는 정의가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에 대한 제약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의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정의에 대한 논쟁은 정의를 규정하는 것에서 과연 정의란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 입증될 수 있는가 하는 사실로 초점이 바뀐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주장을 통해 트라시마쿠스를 논박한다. 첫째, 트라시마쿠스의 견해는 ‘불의’를 하나의 미덕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삶이란 더 많은 것(더 많은 돈과 권력)을 얻으려는 끊임없는 경쟁이며 그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가장 큰 미덕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길고 복잡한 추론의 과정을 통해 불의는 진정한 미덕이랄 수 있는 지혜에 반하는 것이므로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불의는 지혜와는 상반된 것인데 그 이유는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억누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학자는 다른 수학자들과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끝으로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영혼의 미덕이며 그것은 영혼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정의는 결국 영혼의 건강함을 의미하므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담자들은 정의에 대해 의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는 고작 정의의 가치를 옹호하는 미약한 주장만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의에 대한 도전은 분명했다. 정의에 대한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생각들은 무너졌고, 이제 소피스트들의 도덕적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논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제1권 분석  


‘국가’는 정의에 관한 책이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그 책이 정의에 관한 책이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다. 예를 들어 알란 블룸(Allan Bloom)과 같은 비평가는 그 책을 철학에 대한 옹호, 즉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변명”으로 간주한다. 아테네의 지도자들은 철학을 위험한 것으로 여겨 도시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했었다. 왜냐면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오랜 신과 법률에 의문을 제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리스 사회가 의지했던 근본적인 믿음에 도전하였고, 다른 이들에게도 도전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블룸에 따르면 ‘국가’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처형 이유가 되었던 행위를 옹호하고 있다고 다. 플라톤의 목표는 왜 철학자가 중요한지, 도시와 철학자의 관계는 어때야 하는지를 밝히려 했던 것이다. 철학자는 잠재적으로 기존의 체제에 대해 적이지만 정의로운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플라톤은 말하고 있다. 블룸은 ‘국가’를 정치학의 첫 저서로 여기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도시가 이성의 원칙들에 의해 세워져야 한다는 이념에 기초한 정치철학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블룸의 해석은 ‘국가’ 안에서 정의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동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그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를 정의에 대한 책으로 본다면 우리는 첫째로 왜 정의가 지켜져야 하는지를 물어야 다. 트라시마쿠스가 명확히 했듯이 정의는 보편적인 이익이 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인 생각이 있는 반면 비도덕적인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옳고 그름의 규칙을 따르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전통적으로 정의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헤시오도스와 같은 시인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 ‘일과 날’(Works and Days)에서 정의를 반드시 따라야 할 일련의 어떤 행위들로 묘사하였다. 전통적인 견해에서 드러나는 정의로워야 할 이유는 보상과 처벌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고대의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신은 선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에서는 이러한 신의 보상과 처벌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도 정의는 복을 받고 불의는 벌을 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부정한 많은 이들이 성공을 고 정의로운 많은 사람들은 실패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당대의 복잡한 아테네 사회에서 사후 세계에 희망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현세에서의 정의는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논쟁을 선도한 것은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객관적 진실 혹은 선악의 객관적인 기준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법과 도덕을 관습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소피스트였던 안티폰은 불의가 이익이 된다면 불의를 따라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하였다.


플라톤은 이러한 공격들로부터 정의를 옹호해야 한다고 느꼈다. ‘국가’에서 소피스트들의 도전은 트라시마쿠스로 대표되었다. 그는 정의란 단지 강자들의 이익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가 강자이고 무엇이 이익인가?


처음 읽어보면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은 소피스트들의 기본적인 도덕적 개념 즉 우리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규범과 관습들은 그것을 고수하는 이들을 곤란에 빠뜨리고 그것을 조롱하는 이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요약된다. 어리석고 약한 사람이 정의에 맞추어 행동하면 그들은 불이익을 당하고 강한 이들은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트라시마쿠스의 이렇듯 대담한 언급을 다시 읽어보면 그의 주장은 보다 복잡 보인다. C.D.C. 리브(C.D.C. Reeve)에 따르면 트라시마쿠스는 규범과 관습이 단지 인습일 뿐 아니라 지배자들이 백성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이익만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선악에 대한 개념뿐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늘 사용했던 방식에 대한 도전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논법은 사람들의 진정한 믿음으로부터 지식을 구축해나가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만일 트라시마쿠스가 옳다면 리는 정의에 대한 어떠한 진정한 믿음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단지 지배자들에 의해 강요된 믿음뿐인 것이다. 선악에 대한 진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옛 방식을 포기하고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즉 전통적인 믿음에 의존함이 없이 새로이 지식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국가’ 제2권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논법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논쟁을 새롭게 시작하게 다.


트라시마쿠스의 언급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존의 철학에 대한 도전은 같은 것이었다. 이제 '국가' 속의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선하고 바람직한 것이며, 인습 이상의 것이고, 도덕의 객관적 기준에 연결되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이익이 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sparknot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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