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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인 Dec 18. 2020

왕따도 습관이다

이제는 이 습관을 끊어야 하지 않을까

(메인 사진: 뿌아dc 작가의 사진)



우선 제목이 매우 자극적이고 주제가 조금 민감한 소재인만큼 이 이야기를 하는 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나는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도 아니며, 심리학과를 나오거나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가르칠 그런 자격이 분명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브런치라는 공간에서만큼은 내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에 이야기하려고 한다.



제목은 그렇다. 바로 왕따이다.

왕따도 습관이란 제목이라 왕따를 당하는 이들이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말하려고 하나 이런 제목이 드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 반대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1학년과 2학년 때 왕따 아닌 왕따를 당했었다. 반에서 조용하고 남들이 뭐라 해도 화내지 않는 그런 성격이라 쉽게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상대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운명이겠거니 생각을 하였다. 그나마 심한 왕따가 아니라 작은 왕따?라고 해야 하나 말하기가 참 어감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심한 따돌림까지 당하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중학교를 다닐 때 2년 동안은 마음고생을 좀 하였지만 3학년 때는 조금 달라졌다.


늘 마음을 조마조마하며 학년을 올라갔지만 3학년 때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 여러 명 있어 나는 반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았었고 그때 처음으로 학교 가는 것이 즐거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란 이런 것일까?


3학년 초창기 무렵 나는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그중에 한 명이 같은 반애 중에 한 명이 이렇고 저렇다며 한 아이를 왕따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보통 그렇게 왕따를 시키게 되다 보면 그 애와 어울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해지고 괜히 저 애가 싫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소위 말해 방관자가 되기도 하며 주동자 보다 더한 방관자가 되어 한 사람을 철저하게 짓밟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나도 그중에 방관자였다. 어린 나이였고 날 보호하기 위해 더 이상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분명 그 어린날의 기억들을 반성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출처:전북 도민일보)




그렇게 나도 그 아이와 말을 하거나 어울리지 않았고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그 왕따를 당하던 아이와 같은 반을 배정을 받게 되었다. 그때 신기한 것은 같은 학교에 갔었지만 반배치고사를 통해 반이 나뉘는 거였었는데

그 아이와 같은 반으로 배정을 받았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고등학교 1학년에서도 반에서 왕따를 당하였다. 이럴 때 보면 운명이란 어찌나 야속한지 아마도 그 뒤로는 같은 반이 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왕따를 당했던 경험이 많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누군가를 따를 시키는 시기들이 찾아왔다. 나는 나이가 어렸고 사회초년생이라 모든 게 조심스러워서 이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직장에서도 본인과 트러블이 있거나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고 지질한 사람이라고 몰아가며 따돌림을 주동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그렇다. 바로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왕따도 습관"이라는 말이다. 이미 그들에게는 그런 행동이 습관처럼 본인을 물들여버렸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심심풀이쯤으로 화풀이나 스트레스를 풀 대상을 하나 만든 뒤

뒤에서 험담을 하거나 "그 여자가 그랬댸" "아 정말 꼴 보기 싫어"라며 매년 새로운 대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 말고 잘못된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잘못된 사람들은 분명 있다.

"바로 방관자들이다"


방관자들도 분명 방관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려 이 일에 동참을 하거나 동참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으려는 성향을 내보인다. 그렇다 보니 한 집단에서 사람 하나를 바보로 만드는 일은 비일비재하며

그것을 중재하려는 사람이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드라마에서처럼 멋진 해결사를 보기에는 참 힘든 세상이다.

나 역시도 그런 문제들을 풀어나가려고 하지 않고 나 살길만 찾았으니 나도 할 말은 없다.

나부터가 죄인이니, 어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서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만약 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서

"반에서 친구 하나가 따돌림을 당하는데 나는 그 애를 도와줘야 되는 거야? 아니면 난 어떡해야 하는 거야?"

라고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을 하고 신랑에게 이런 질문을 똑같이 물어봤는데 명쾌한 대답을 내어줬다. 그 아이를 도와줘라는 말 대신에 그 아이가 왕따 당할 만한 상황을 없애주자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 아이와 많은 이야기들을 한 뒤에

학교에 가서 이야기를 한 후, 학교에 학폭위를 열거나 그런데 학교에서 이를 덮으려는 시도를 한다면 교육청에 찾아가자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나의 신랑은 그런 상황들을 보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답을 내려주었다.


후에 만약에 그러한 일이 생긴다면 신랑이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전에 오늘처럼 이 민감하고 조금은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는 누군가의 인생을 짓밟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도 안되며 나는 그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해서 멀리서 지켜만 보는 것도 이미 왕따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무언의 폭행이기에 방관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이며 , 주동자들 역시도 누구 한 명과 트러블이 있거나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한 사람을 따돌리는 일 역시도 없어져야 할 것이다.


"대화"라는 것이 왜 있는지, 인간에게는 언어라는 것이 왜 있고, 뇌와 마음이란 것이 왜 있는지 생각을 한다면 조금은 좋은 결과가 오지 않을까?

그것들을 통해 신은 인간에게 서로 간의 오해를 풀며 함께 살아가라고 우리를 이 세상 속으로 보낸 것이니

사회에 아무런 위치도 되지 않는 내가 조금은 맹랑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끝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주동자들과 수많은 나와 같은 용기가 없어 나설 수 없었던 방관자들에게도 몸에 배어버린 이 지독한 습관들을 버렸으면 한다.


그리고 누군가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지나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한다.

살기 좋은 세상은 우리의 눈과 귀 입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조금 통쾌한 이야기를 해주자면 훗날 왕따를 당하던 아이의 소식이 궁금하며 sns 계정을 통해 그 아이의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왕따를 주도하던 아이는 어느 대학에 갔고 어떤 직장에 갔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모르지만, 왕따를 당하던 아이는 소위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sky 대학 영문학과를 들어갔으며, 직장도 글로벌하게 들어가서 본인의 재량과 똑똑한 실력을 뽐내고 있다.
그러니 왕따를 당한 기억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면 주동자들보다 훨씬 잘 살 수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고 그들보다 더 잘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인생은 동전 뒤집기와도 같아서 그 결과들은 분명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행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미래가 행복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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