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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Apr 30. 2021

아버지가 된 그 아들

19화 보잘것없는 사람

<본문의 내용은 매거진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아버지를 보낸 후 결혼을 하고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살고 있는 지금, 결혼이라는 것이 항상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과 지켜야 하는 가족에 대한 무게감은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족이기 때문에 나의 고민이나 힘든 이야기를 더 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과 반대로 더 선명해졌다. 특히 결혼을 하고 자녀가 생긴 후로 그리움의 무게는 더 커져만 갔다. 자식이 생기고 나니 내 삶은 주인공은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내 삶은 언제나 나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놀이터였는데 어느덧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어느 날 직장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내 나이를 물어봤다. 신기하게도 나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젊은데 기억력이 깜빡하는 걸까? 나는 딸의 나이를 떠올렸다. 지금 5살이니까 내가 결혼했던 나이에 딸의 나이를 더했다. 그렇게 계산을 해서 어렵게 나이를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부모님이 떠올랐다. 가끔 부모님께 나이를 물으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렇게 부모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빠가 되고 나서의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모든 결정과 행동의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닌 딸에게 맞춰져 있었다. 예전의 나는 정말 이기적이었다. 비싼 음식을 먹기는 꺼려도 자기 계발을 위한 돈은 얼마를 지불하든 결과가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그 돈이 한 번도 아깝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내가 성장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식이 생기기 전의 나는 직장에서 ‘자녀 때문에…’라는 말을 꺼내는 선배들의 모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인사과에서 일 할 때 동료들에게 냉정하게 말하곤 했다. ‘왜 자녀 핑계를 대는 거지? 커리어를 쌓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라고 생각하곤 했다. 군인이란 직업은 거주지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명령에 따라 배정된 곳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자녀가 생기고 나니 입장이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딸 때문에….’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남들이 가지 않는 해외 유학, 대학원, 각종 자격증 취득 등 스펙 관리에 신경을 썼다. 경력에 도움이 된다면 근무 지역 따위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고 싶은 자리가 있어도 딸과 가족을 1순위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내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남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 새로 적응해야 하는 가족들이 걱정될 뿐이다. 가능한 좋은 환경에서 자녀를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은 어떤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존재가 생겼다. 바로 내 딸이다. 너무도 맑고 순수하며 어떠한 오염도 되지 않은 단 하나뿐인 또 다른 나였다. 힘들게 일하고 퇴근하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날에도 현관문 앞에서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영화 속 슈퍼 히어로처럼 무한의 에너지가 몸속에서 뿜어져 나온다. 부정하고 원망하고 싶은 어려움이 내 앞에 널려 있어도 딸의 한마디면 마법처럼 행복한 일로 변해 버린다. 그 힘은 너무도 강력하고 아름다워서 저항할 수도 없다.


딸의 장래에 대해 바라는 게 별로 없지만, 딱 한 가지 바라는 것은 철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일찍 철들어 버린다는 것은 어른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빠가 되고 나니 어떻게 하면 아이를 오래도록 순수한 모습으로 키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나는 이런 딸을 통해 진정한 사랑 표현법에 대해 배우고 있다. 사실, 좋은 아빠가 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딸이 태어나고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다. 무슨 시험 문제를 풀 듯 정답을 너무 거창하게 찾고 있었다. 그런 막막함과 마주하면서 좋은 길잡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너무 편한 친구처럼, 때로는 기대고 싶은 오빠처럼, 때로는 이기심을 부리고 싶은 동생처럼 옆에서 조용히 철없이 성장하는 딸을 지지해 주고 싶다. 그리고 후회 없이 사랑을 표현하고 아빠라는 존재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책, <보잘것없는 사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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