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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Aug 31. 2021

남자지만 벌써 휴직만 3번째, 일과 삶의 균형

우리딸, 이제 아빠도 엄마만큼 정말 좋지?

내일이면 육아휴직을 마치고 부대로 복직해야 한다. 군 복무를 하면서 벌서 3번째 휴직이다. 2005년도 부사관으로 군생활을 시작해서 휴직을 3번이나 쓰게 될 줄을 정말 몰랐다. 물론 육아 휴직을 3번째 쓴 것은 아니다. 육아휴직은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 시기에 마쳐서 쓰려고 했지만 군인인 인사이동과 어머니 치매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일찍 쓰게 되었다.


첫 번째 휴직은 유학휴직이다.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하기 위해서 2010년도에 휴직을 했다. 공무원은 급여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유학 휴직을 사용할 수 있다. 군인도 공무원이기에 이런 혜택을 사용했다. 아직도 생생하다. 군생활 5년 차 반 민간인이 돼서 하고 싶은 공부를 했던 그 시절은 내게 천국 그 자체였다. 가난 때문에 포기했던 학업을 스스로 채웠다. 어학원에서 만난 당시의 누나와 동생들과는 10년이 지나도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있다. 모두 찬란했던 20대에 만나서 장밋빛 꿈을 꾸며 하루하루 학업과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타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엄마, 아빠 그리고 당시 계획과 다른 인새들을 모두 살고 있지만 그렇게 가슴속에 그 시절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두 번째 휴직도 유학휴직이다. 여기서 나를 아는 지인들을 나에게 조금 실망을 하기도 하고 이건 아니네?라고 반감을 가지기도 했다. 필리핀 어학연수를 하고 복직 후에 어렵게 쌓은 영어회화 실력이 썩어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물론 복직해서도 영어공부를 꾸준히 했지만 마음속에 늘 한 가지가 걸렸다. 바로 원어민과 원활한 회화를 하는 것에 대한 갈등이었다.

필리핀의 교육 시스템도 훌륭하지만 원어민 선생님은 아니다. 그들의 영어도 자연스러운 모국어를 구사하는 영어권 사람들과 비교하면 한계점이 존재했다. 물론 1:1 교육시스템과 저렴한 학비는 기초를 닦기에 너무도 좋은 기회이고 환경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목마름을 참지 못했다.

이런 이유에서 내가 쓴 첫 번째 책 <보잘것없는 사람>의 스토리 시작 시점이 영국 유학 시절이기도 한 것 같다. 결국 나는 진급과 좋은 보직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비행기를 탔다. 첫 번째 휴직을 마치고 3년이 지난 다음에 간 유학휴직이었다. 그동안 쌓은 군 생활은 솔직히 그 선택으로 많은 어려움을 미래에 겪게 되었다. 영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도 달랐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엑센트 때문인지, 공항에 도착해서 영어가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너무도 신선하 충격이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그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내 엑센트도 약간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도전을 했다.

인턴으로 해외기업에 들어가서 일도 경험했고, 유럽인들과 함께 호텔경영 과정에 등록해서 같이 수업을 듣기도 했다. 어머니 집을 장만해드리는데 많은 돈을 지출한 상태여서 마이너스 통장으로 대출을 받아 떠난 유학이라서 항상 빈곤했지만, 배가 곱파서 더 기억에 남는 유학이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영국 런던에 호텔에 많은 이력서를 넣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유럽의 여자 학생들은 곧 잘 취업이 됐지만 휴직 신분인 것과 동양인이라는 점, 그리고 남자라는 성별 때문에 면접의 기회는 곧 잘 오지 않았다. 학업과 야간에 식당에서 서빙을 하면서 전역도 심각하게 생각했던 그 당시, 집에서 전화 한 통이 왔다. 아버지가 사고를 쳐서 결국 나는 유학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6개월 만에 한국으로 귀국을 했다. 한국에 와서 몇 달이 지나서 호텔에서 면접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으나 이미 나는 우리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신분으로 복직한 상태였다.


위에 두 번 휴직은 모두 나를 위한 휴직이었다. 나의 욕심일지도 모르고 젊은 시절의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3번째 휴직은 나를 위한 휴직이라고 말하기에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홀몸이 아닌 어깨가 무거운 가장으로 살면서 선택한 휴직은 무거웠다. 처음에는 일을 안 하고 집에 있는 게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물론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6살 딸아이와 정말 많이 친해졌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떨어져서 있던 시간이 많다. 파견에 야근 등 딸아이와 온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주말이 거의 전부였다. 물론 캐나다 육아 방법을 고수하는 아내 때문에 저녁 7시에 잠자리에 들어서 평일에 보기 힘들었던 것도 있다.

휴직 기간 동안 나는 매일 저녁을 만들고, 딸아이 어린이집에 등원 및 하원을 시켰다. 아마 내가 아이에 손을 잡고 걷고 저녁 식탁 앞에서 딸아이와 함께 한 시간은 몇 천억 이상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침 그 작은 손을 잡고 가는 길에서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무엇을 할지? 친구들과 어떤 놀이를 할지 말을 하고 때로는 사사로운 날씨 걱정과 자동차 이야기를 하면서 걷곤 했다. 집에 데리고 올 때는 어떤 친구와 놀았고 누구랑 사이가 안 좋은지 말해주곤 했다. 사실 이런 과정이 남자들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배우게 되었다.

엄마들이 느끼는 감정을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자녀들은 엄마 편이다. 나도 그랬다. 아빠보다 엄마가 좋았다. 약간 엄마는 안타깝고 아빠는 원망스러운 그런 포지션에 있는 게 자연스럽다고 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휴직 기간동에 느낀 것은 아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한 사람이 엄마이기에 자연스럽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내일이면 다시 군복을 입고 일을 시작한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휴직을 마치고 복직할 때는 병사 입대를 할 때보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10년 넘게 근무해 온 곳이지만 적응하는데 항상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에도 몇 달은 고생할 것이고 나는 바빠질 것이다. 딸에게 아빠가 조금 바빠질 거라고 말하니 나를 포옹해주면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모습을 보니 어느덧 어리다고 생각했던 딸아이가 커 보였다.


맞벌이가 당연한 것처럼 자리를 잡아 버린 요즘, 나는 이 글을 남성분들께 육아휴직을 권하고 싶다. 물론 공무원이 아니라면 조금 더 어려운 결정일 수 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소중한 시간을 자녀들과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다. 하지만 자녀의 그 시절에 아빠에 대한 모습은 그 어떤 돈을 지불해도 미래에 다시  살 수 없다.


당분간 차려주지 못할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딸아이에게 먹고 싶은 메뉴 주문을 받았다. 이제 저녁은 아빠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박인 딸아이는 줄줄줄 메뉴를 말했다.


'미역국, 쏘떡, 찜닭, 피자 그리고... 음..'

난 알겠다고 하고 어제저녁을 만들었다.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일도 중요하지만 너무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밸런스 관리를 하면서 복직해서 생활을 할 생각이다. 일도 중요하지만 가정도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으로는 몰랐던 지난날을 후회하면서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저자의 인생이 담긴 가족에세이, 모두가 공감하고 가족들과 함께 공유하면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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