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치맥과 월드컵 하지만 우리는 엄마와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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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신세를 지던 동생 병원에서 어머니는 결국 퇴원을 했다. 조기 치매 진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넘어져서 어깨뼈가 골절되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던 것이 벌써 1년 반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동안 몇 번의 짧은 퇴원을 했지만 그래도 동생이 일하는 병원에서 다른 재활 환자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동생에게 모든 무게를 넘겼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동생이 그 병원에 같이 있다는 것과 무슨 일이 발생하면 바로 입원실로 가서 해결하는 것을 보면서 먼 지방에서 슬픔으로 덮인 가슴을 억누르며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런 고마운 시간이 이토록 빠르게 흘러갈지 예상도 못했다. 그 시간 동안 엄마의 병세는 더 악화되어 이제는 이상행동과 언어장애 그리고 인지저하에 따른 일상생활 제한과 대소변까지도 실수하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해맑게 웃고 뭐든 웃음으로 표현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형제는 위안했다.
아니 엄마의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했다.
엄마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엄마는 괜찮다고 두 아들에게 웃음으로 대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퇴원하는 날, 동생이 걱정돼서 직장에 말을 하고 휴가를 냈다.
4등급(재가)을 받은 상황에서 고려할 것은 동생 병원 근처에 주간보호센터에 엄마를 위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동생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아침에 같이 출근해서 직장 옆 보호센터에 엄마를 두고 다시 직장으로 갔다가 퇴근할 때 같이 모시고 가는
그 힘든 시간을 동생은 버티면서 해보겠다고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동생을 보면서 많은 의지가 되었다. 만약 내가 외동아들이었다면 분명 이 역경에 무너져 흔적도 없이 먼지처럼 사라졌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동생 퇴근에 같이 병원으로 가서 큰 아들을 보며 '백화점 가냐고' 웃으며 말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동생 집으로 모시고 왔다. 앞으로 시작될 힘든 시간이 차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엄마 앞에서 장난을 치며 같이 웃으며 집으로 모시고 왔다.
일 년 반을 입원해 있었는데 엄마의 짐은 정말 보잘것없이 적었다. 64년을 살아온 그 인생이 쇼핑백 몇 개에 담기는 것 같아서 가슴이 쓰라였다.
그리고 며칠간 나는 동생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고 싶었다.
그래야만 나도 맨 정신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밤마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엄마는 새로 처방받은 수면제를 드셔도 한 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서 냉장고를 끝도 없이 열고 먹지 못하는 것들을 모두 입에 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달래고, 다음에는 끌어안고, 다음에는 사정하고, 마지막은 오열하며 동생은 며칠 만에 무너지고 있었다. 옆에서 도와주고 동생이 출근을 할 수 있게 밤에 엄마를 많이 봤지만 수면에 민감한 동생은 폐인이 순식간에 폐인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퇴원하고 3일이 지나서 지쳤는지 일찍 잠은 엄마를 보고 우리 형제는 바로 잠에 들었다.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깨지 않고 잠을 청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동네는 시끌시끌했다.
월드컵 경기에 우리 선수들의 활약을 할 때마다 환성이 옆집, 윗집, 골목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우리 형제는 이불속으로 숨어버렸다.
보통이라면 치맥에 TV 앞에 앉아서 응원을 할 테지만 우리는 이미 치매로 지쳐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날 밤 돌아가시고 단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도 않아서
서운했던 아버지가 내 꿈에 찾아왔다.
아버지는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무 미워했지만 그래도 너무도 그리웠던 아버지를 나는 꿈에서 끌어안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그저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인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생생했다. 묘한 감정을 가지고 거실로 나가자 엄마는 냉동 만두를 입에 넣으며 내게 사탕을 달라고 했고, 출근 준비를 하는 동생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동생과 같이 보호센터로 출근하는 날이었는데 나는 동생에게 말을 했다.
"형이 오늘 하루만 더 볼게. 그냥 혼자 가."
현관문을 나서는 동생의 뒷모습은 이미 지쳐있었다. 몇 년간 엄마를 본다고 결혼도 미루고 살고 있는 동생의 뒷모습을 차마 끝까지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마도 이 집안에 가장은 누가 모라고 해도 '나'니까 힘들어도 큰 결심을 하라고 꿈에 나타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니 그 말을 해주려고 나타났는데 내게 미안해서 아무런 말도 못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동생이 떠나고 엄마가 좋아하는 과자와 사탕을 주고 나는 바로 요양병원과 요양원의 리스트를 만들어서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4등급(재가)이지만 입원이 가능한 요양원과 나름 평이 좋은 요양병원들에 전화를 해서 상담예약을 했다.
동생과 상의하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두고 지방으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엄마를 보시고 요양원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이 내 손을 꼭 잡고 여기저기 나를 따라다녔다. 대부분 요양원은 시설 등급이 없으면 입소가 안된다고 했다.
그렇게 몇 군대를 돌면서 내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
엄마랑 비교할 때 너도 나이 드신 분들이 가득한 그런 곳에 엄마를 두고 온다고 생각하니 바로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그분들이 잘 보살펴 줄 것을 믿으면서도 모든 자유와 인간의 권리는 포기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다. 그리고 문제는 돈이 있어도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운이 좋게 어느 곳에서 소개를 해줬다. 새로 생긴 요양원인데 시설도 좋고, 아마도 비 등급자도 받아주는 것 같다고 했다.
단 돈이 많이 들 거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지금 이 상황에 사실 돈은 크게 상관없었다.
돈은 없으면 다시 벌면 되지만 망가진 인생은 다시 회생시키기 힘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무엇을 팔더라도 조금 더 편안한 곳에 엄마를 모시는 것을 결심해야만 했다.
그래야 산 사람인 동생이 살 수 있고, 나 또한 살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이기적인 자식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않는데 자식은 부모를 이렇게 보낸다고.
무거운 마음으로 소개 받은 요양원에 전화를 걸고, 사탕으로 달라고 하는 엄마를 차에 태우고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