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용환 May 25. 2023

42. 엄마의 치매 가족에게 유전이 될까?

뇌 기증을 부탁드립니다.

 2023년도 5월의 끝자락을 남겨두고 있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흐른다는 것이 참 허무하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사는 우리 형제에게 시간은 더 아쉽기만 하다. 바로 엄마 때문이다. 아마도 엄마의 시간은 멈췄는지도 모른다. 매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세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대학병원 진료를 볼 때면 나는 휴가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다. 이번에도 동생이 여유 있게 예약일을 전화로 알려줬다. 


"형 힘들면 나 혼자 요양원에서 외출받아서 가면 돼." 


하필이면 너무 일정이 바빠서 나는 갈 수 있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하지 못했다. 책상 앞에 달력은 온갖 스케줄로 빡빡했다. 박사과정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특히나 더 정신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엄마가 아프지 않고 젊은 시절 누구 소개인지는 몰라도 가끔 점을 보러 가셨다. 신도 믿지 않는 엄마였다. 그 고독한 어린 시절 목사님이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아마도 엄마에게 신이라는 존재가 부모의 그리움을 대신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그런 엄마가 점을 보고 와서 한참 지나서 어린 우리는 엄마 손을 나눠서 양쪽으로 잡고 동네 마트에서 집을 가기 위해 천천히 거북이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엄마는 힘들다며 잠시 언덕의 절정 부분에서 멈추고 주변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우리 두 형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신기하네. 아무리 봐도 펜으로 돈 벌 수 있는 아들놈은 엄마가 못 만든 거 같은데 둘 중 한놈은 교수 팔자라고 하던데..."


엄마의 혼잣말은 슬프게 들리지 않았다. 왠지 희망의 강렬한 메아리처럼 잔잔하고 깊었다. 

물론 우리는 점쟁이 말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돈 벌겠다고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직업군인이 되었고, 동생은 일치감치 공고를 가서 공부를 저기 바다 건너편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군인이고 나서 몇 년 후 나는 계속 공부에 목이 말랐다. 아무리 냉수를 마셔도 갈증은 여전했다. 그렇게 나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공부를 계속 꾸준히 했다. 

애쓰는 아들을 보면서 엄마는 그 점쟁이가 말한 아들놈이 아마도 나인 거 같다고 서른이 된 내게 말했던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고 지금 박사과정 이후에 내가 교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매번 발표 때나 소논문을 쓸 때 나의 무식함에 나 스스로 놀라곤 한다. 근데 아마 엄마가 건강했다면 박사가 되겠다고 늦게까지 공부하는 나를 보고 행복한 웃음을 지었을 것은 분명하다. 원래 자식자랑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앞에서 칭찬은 안 했겠지만 아마도 친구들 모임에 가서 아들이 국립대 박사과정을 다닌다면 샛소리처럼 끝없이 종종 했을 것이 눈에 선하다.



동생과 전화 이후에 시간을 짜고 짜내서 이 틀 휴가를 냈다. 그리고 월요일 저녁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늦은 저녁 서울로 출발했다. 도착하니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동생은 형이 안타까운지 야식을 시켜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형 왔어? 피곤하겠네. 배고프지?"


졸려서 바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준비해 준 동생에게 고마워 식탁에 앉았다. 그렇게 입으로 넣는지 코로 넣는지 모르게 야식을 먹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요양원으로 가서 엄마를 기다렸다.

나는 속으로 계속 바라고 바랬다. 


제발 이번에는 엄마의 깨끗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래서 엄마가 우리 손을 떠나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안심이라도 받고 싶다고. 더 이상 요양원 사람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데 역시나 엄마의 머리는 기름이 넘쳐났다. 엄마는 문 앞에서 기다리는 우리 형제를 보며 웃었다. 뼈만 남아서 더 조금 해진 얼굴로 우리를 보며 웃었다.

우리 형제는 어린 시절 그 언덕길을 올라갔던 것처럼 엄마의 왼손과 오른손을 각자 차지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그 손을 어루만지며 내 차로 엄마를 모시고 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엄마는 우리를 얼굴을 보며 계속 "나 사탕 줘"를 외쳤다. 


그렇게 엄마를 뒷좌석에 태우고 병원을 향했다. 


약처방을 받고 오는 거라서 아무 생각 없이 엄마랑 데이트한다고 시간을 즐겁게 보내자고만 생각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우리 형제를 보자 뇌 기증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저번에 이런 원인 불명의 치매를 고칠 수 있게 기회를 달라는 말에 말꼬리를 흐렸더니 우리 형제가 동의한 것으로 착각한신 거 같았다. 


연구비로 정밀 MRI를 입원비 포함해서 무료로 진행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원인을 더 정확히 확인이 가능하면서...


우리 형제는 동의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불쾌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관심을 가져준 시간을 생각해서 오해이며 아직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많이 실망한 눈치였다. 교수일 것이고 좋은 논문이 될 것은 뻔했다. 50세 후반에 이런 진행 속도가 빠른 치매가 갑자기 찾아오는 황당한 일도 주변에 흔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나는 머리 촬영은 사비로라도 진행해 달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세부적으로 알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렇게 찍은 자료가 연구자료로 쓰려 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생님은 그렇다면 유전자 검사를 해서 유전적인 것인지 결과를 확인하자고 하셨다. 


내가 알기에 뒤늦게 찾은 엄마의 엄마도 그 친척들도 이런 비슷한 병을 가진 사람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궁금했다. 이모도 한 참 엄마보다 나이가 많지만 너무 정정하시기에..

나와 동생은 어차피 입원할 때 그 검사도 같이 진행해 달라고 말하고 사전 입원 수속을 진행했다. 보통 환자이면 그냥 찍으면 될 것을 엄마는 수면 마취를 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예상은 했다. 이제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는 수준이 되었기에 작은 통 안에 들어가서 몇 십분 간 촬영은 마취 없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보다 오랜 시간 병원에 머물고 밖으로 나온 우리 가족은 허기진 상태로 맛집을 찾아서 드라이브를 했다. 위암으로 치료받을 때도 병원 진료를 마치고 나오면 삼계탕을 먹었기에 엄마는 각인이라도 된 삼계탕으로 된 노래를 계속 불렀다.


"엄마.. 막상 가면 먹지도 않잖아? 그렇지?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응?"

"삼계탕, 삼계탕, 삼계탕."


동생과 엄마의 대화는 전혀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마치 벽을 보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행복했다. 이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나중에 분명 그리워질 테니까 말이다.


유명한 한정식 집을 찾아서 도착하니 대기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왔으니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겨우 착석을 했다. 다행히도 수많은 음식 중에 녹두전에 엄마는 반했다. 씹지도 않고 누가 훔쳐갈까 봐 계속 입에 넣는 엄마를 주변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하지만 우리 형제는 이렇게라도 먹는 엄마가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랑 보낸 8시간은 마치 8분처럼 짧게 느껴졌다. 어느덧 우리는 다시 요양원 문 앞에 서 있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지옥을 미리 경험하는 것 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보호사분 손에 이끌려 우리 눈에서 사라지는 엄마를 담고 싶어서 그 앞에서 계속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아무런 말도, 저항도 없었지만 눈 빛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41화. 엄마 손맛이라며 울면서 김칫국을 먹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