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용환 Jun 28. 2023

43. 엄마 조금만 기다려. 곧 집으로 갈 거니까.

요양원에서 다시 집으로

엄마가 요양원에서 보낸 시간이 벌써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거의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단히 노력했지만 8번을 짧게 만났다. 물론 동생은 나보다 더 많이 찾아갔었다. 그렇게 우리 형제는 엄마를 버렸다는 죄책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중간중간 동생을 만나면 동생은 계속 나를 설득했다. 아니 선포했다.


"형, 엄마를 모시고 살아야 할 거 같아.."


그런 동생에게 나도 그러고 싶다고 네 말이 맞다고 그렇게 하자고 시원하게 형으로서 이야기하지 못했다. 동생까지 힘들어지는 걸 보고 싶고 않았고, 엄마를 보실 수 없는 내 현실이 더 비참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나도 마음이 약해졌다.

요양원에서 엄마의 모습은 정말 초라했다. 아니 불쌍했다. 내 자식처럼 보살펴 줄 거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냄새나는 상태로 데리고 외출이나 면회를 할 때마다 우리 형제의 가슴은 무너지도 또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동생이 모시고 나온다는 말에 동생이 힘들어질 것을 알면서도 수긍했다. 그렇게 동생은 직장 바로 근처에 집을 알아보러 다녔고, 만약을 대비해서 월세 집으로 정해서 몇 차례 같이 집을 보러 다녔다.  


결국 그렇게 월세 집을 계약했다. 그런데 계약하고 나니 집주인이 위층에 있는데 아주 깐깐하게 세입자들이 지켜야 하는 사항이라며 관리차원에서 당부들을 미리 알려줬고, 동생은 이사하기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물론 금전적으로 지해주고 대출을 받으면 직장 근처에 연립주택을 사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목돈을 어찌 될지 모르는 빌라에 투자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미리 걱정을 하는 동생을 보면서 나는 강서구 동생 직장 주변에 저렴한 아파트를 찾고 찾았다. 혹시나 자금이 가능한 범위에 집이 있다면 나중에 동생 신혼집으로 살아도 좋고, 이왕 이렇게 모시고 살 거라면 마음이라도 편하게 지내야 내 마음도 덜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손품을 팔다가 내 눈에 600세대 오래된 아파트가 들어왔다. 평수는 23평 아주 구축 아파트였는데 가격이 4억 중반이었다. 급매고 너무 저렴해서 눈으로 봐야만 될 거 같았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급하게 서울로 가서 동생과 함께 집을 보러 갔다. 동생 직장에서 멀지도 않았고, 지하철역도 도보권이었다. 단점이라면 35년 된 구축 그리고 주차장이 문제였다. 그런데 동생은 차량을 직장 주차장에 무료로 주차가 가능했기에 괜찮았다. 문제는 실매물 여부와 내부 컨디션이다.


그렇게 의심을 하면서 약속을 잡고 방문했는데 내부는 올리모델링이 되어있었다. 그것도 아주 고급 브랜드를 사용해서 깔끔하게 관리가 되어 있었다. 집주인들은 나보다 조금 나이를  신혼부부였다. 몇 마디 나누다 보니 대출을 받아서 집값이 저렴할 때 상급지로 갈아타기 위해서 이사를 간다고 했고 그래서 급매로 집을 내놓다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어떠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이유는 동생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였다.

그냥 짧게 물어보니 동생은 너무 좋다고 했다. 쓰리룸이라서 가끔 내가 올라오거나 가족들이 와도 며칠 머물기 좋았고, 동생 여자친구가 놀러 와도 편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 집이 동생의 신혼집으로 너무나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집을 바로 계약했다.

투자 관점으로 접근해도 손해 볼 것은 없었고 강서구 일대 고도제한이 해제되거나 향후 노후건물물에 대한 보상도 기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동생이 소망하던 대로 속 편하게 집주인 눈치 안 보고 엄마를 모실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렇게 동생과 계약금을 입금하고 우리는 그날밤 오랜만에 무겁지 않은 희망을 담은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빌라 계약금을 날린 것은 조금 속상했지만 충분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고통으로 뛰어드는 우리 형제의 결정이 어리석다고 여기고 걱정하거나 나를 말리는 주변 사람들 있다.


맞다. 알고 있다.


모시는 동생도 지켜보는 나도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한 달에 몇 분 만나고 우리 형제들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엄마를 억지로 보내는 지옥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동생과 나는 여전히 엄마가 우리를 사랑하는 감정을 매 순간 느낀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악화되는 이 시간 속에도 엄마는 우리 형제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담고 있다. 가끔 엄마가 좋아하는 간식을 가지고 요양원을 가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음식을 먹다가도 우리와 눈을 마주치고 웃어 주신다.

고맙다고 잘 자라줘서 너무 자랑스럽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엄마는 아직도 말해주고 있다.


8월 이삿날을 정하고나니 여러 가지 생각과 계획을 만들게 된다. 엄마랑 여행도 가고 싶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 마음껏 먹게 하고, 이마트에 가서 춤추는 엄마의 모습도 보고 싶다.

그리고 아직 우리 형제에게 이런 시간이 있음에 우리는 축복받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엄마가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엄마를 만지고, 엄마를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엄마 조금만 기다려. 이제 정말 집으로 가자.'


매거진의 이전글 42. 엄마의 치매 가족에게 유전이 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