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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Jul 13. 2023

44. 원장 선생님이 이사하라고 빌려 준 오천만 원

요양원에서 엄마 모시고 살기 한 달 전 나타난 천사같은 분들

새로 집을 계약하고 분주하게 대출을 알아보며 요양원에서 나와서 모시고 나와서 조금은 고단해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겠다는 우리 형제의 희망은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 같았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아직 많지만 그래도 해결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동생에게 꼼꼼하게 이사 가기 전에 확인할 사항들을 알려줬다.

우선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전세금도 돌려받아야 하고, 이사 갈 집에 날짜도 서로 조정해야 하는 일들이 번거로웠다. 결국 모든 문제는 어떻게든 엄마를 모신다는 꼭짓점 하나로 모아지기에 불평이나 힘들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가 애쓰는 것을 알아주는 고마운 분들도 많았다.


먼저 동생이 일하고 있는 병원 원장님은 엄마가 골절로 입원하는 동안 오랜 시간 지켜봐서 그런지 아니면 동생이 어머니를 돌보는 모습에 안쓰러워서인지 다시 모시겠다는 말에 이왕 직장 근처로 집을 구할 거면 조금 더 모시기 편한 곳으로 하라고 하면서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시겠다고 했다. 요금 같이 고금리 시대에 얼마를 빌려줄지 액수를 중요하지 않았다.


그 마음이 무엇보다 감동이고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감사한 일이었다. 더 놀랐던 것은 막상 계약을 하고 동생이 집을 구했다고 말하니 오천만 원이라는 큰돈을 법적 절차를 걸쳐서 동생에게 빌려주셨다. 덕분에 계획했던 금액보다 훨씬 여유 있게 자금 계획을 짤 수 있었다.

그런 동생을 보면서 나는 뿌듯했다. 엄마를 닳아서 자랑질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 폐쇄적인 직장인 군대 동료들을 만나도 한동안 동생 자랑과 원장선생님의 마음을 줄줄 늘어놓았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동생이 인정받으며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에 정말 기뻐했을 텐데 하며 아쉬웠다. 형편 때문에 일찍 직업군인으로 자리를 잡은 나와 비교할 때 동생은 착실하고 제대로 논적도 없지만 상대적으로 정착을 못하고 방황하는 듯 비치곤 했다.


물론 나는 형으로서 동생에게 괜찮다고 아무것도 늦지 않았다고 격려를 해주었다. 다행히도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큰 문제없이 우리 형제들은 살아가고 있다. 자식복은 있다고 말하며 건강할 때 두 아들 손을 양쪽으로 잡고 같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때면 엄마는 항상 행복해했다. 유치하지만 극장에서 아는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 같이 극장으로 갈 수 없는 현실에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종종 그 많은 추억들을 떠오르곤 한다.

비록 지금 현실은 어둡고 앞으로 미래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질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런 추억들이 우리 가족을 이어주고 있다는 생각 한다.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사실 행복한 기억보다 우리는 힘든 기억을 더 많이 안고 살아가는 듯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생이 쉽지 않고 고난이 많은 것은 좋은 기억을 더 소중히 생각하라는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닌가 혼자 생각하기도 했다.


엄마 진단명이 치매로 판정을 받은 지도 어느덧 4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너무 급격하게 나빠지는 엄마를 지켜보는 우리는 마음에 여유가 시실 없었다. 마치 처음으로 부모가 돼서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적응한 시간들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살필 수 있는지..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무뎌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요즘 많이 편안해진 것을 느낀다. 이제는 이 시간을 오로지 아쉬워하며 함께 보내는 순간에 비로써 집중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서운한 일도 많았다.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 아플 때 그리고 지금의 엄마를 거치면서 확실하게 배운 것은 아무리 피를 나눈 친척이라고 해도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의지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잘 살고 있는지 수시로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물어봐 주는 몇 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분들은 마치 아쉬운 소리라도 우리 형제들이 할까 봐 우주 저편으로 숨어버린 것처럼 고요했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남처럼 관심을 끄고 사는 그런 분들을 증오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시간에 우리를 도와주고 응원해 주는 병원 원장님이나 지인분들께 여건이 되는 범위에서 마음이라도 표현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얼마 후 동생에게 원장 선생님께 선물을 사서 소포로 보냈다.

이렇게라도 인사를 하는 것이 맞다고 나는 아니 우리는 엄마한테 배웠다.

비록 마음을 써주신 것에 비하면 초라한 선물일지라도 고마운 마음은 전달해야 상대방에게 다가간다고...


살면서 나 또한 상대에게 아무 의미 없이 단지 좋아서 호의 베풀었는데 받은 사람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고 놀라서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참 어려웠다. 도와주면 불편해하고 외면하면 서운해하고 말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도움을 받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뒤에 항상 검은 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렇게 마음 써주신 분들도 많은데 무사히 이사를 마쳤으면 좋겠다.


https://instabio.cc/yhj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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