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라고 조카를 보러 오겠다고 서울에서 4시간 운전해서 동생이 집에 왔다. 엄마가 요양원에 가고 혼자 내려온지 벌써 몇 번이나 되었다. 엄마랑 같이 올 때도 동생이 장거리 운전을 하면 혹시나 엄마가 치매로 운전을 방해할까 봐 시계를 계속 보며 불안한 기다림을 했던 나였다. 물론 동생 운전이 서툰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이번 연휴에는 그래서 기차를 타고 오라고 해서 표까지 예매했는데 일이 끝나지 않아서 결국 기차를 놓치고 차를 타고 오게 되었다.
마음 불편한 걸 아는지 아니면 엄마를 요양원에 두고 온 것에 엄마가 화가 나서인지 날씨까지 비협조적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리다가 동생이 도착했다. 화창해도 서운할 어린이날에 비바람은 계속되었다. 도착한 동생은 주차할 곳이 없어서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고 돌다가 결국 단지 밖에 노상에 주차를 했다.
저녁시간이 훌쩍 지나서 배가 고픈 동생에서 집밥을 만들어 주고 싶었으나 나 또한 우리 집 사정이 있어서 이른 저녁에 이미 집은 불 꺼진 한 밤중이었다. 동생도 사정을 알기에 식당에 가자고 하는 내 말에 말없이 따라왔다. 우리 형제는 그렇게 어린이날 이브를 늦게까지 수다를 떨면서 보냈다. 예전이면 엄마 이야기로 끝도 없이 뭔가를 끄집어냈을 텐데 최근 들어서 우리는 엄마 이야기를 서로 조심스럽게 안한다. 눈에 멀어져서 마음도 멀어진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단지, 사는 것도 힘든데 울적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작은 배려심이 나와 동생의 입에 자물쇠를 걸게 만들었다.
동생의 직장이야기를 듣고, 요즘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 이야기를 들려주고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다. 피곤한 동생에게 잠자리를 만들어주고 나는 거실로 얇은 이불을 들고 나와서 잠을 청했다. 무엇하나 평범과는 거리가 멀게 지내는 꼴이 마음에 걸렸지만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는 가족끼리 그냥 서로 눈감아주고 이해해 주게 되었다.
아침이 되고 딸아이는 삼촌을 보고 흥분했다. 딸에게 하나뿐인 삼촌은 아빠의 동생이라는 의미보다는 멀리서 행사 때마다 내려와 선물을 주는 그런 '산타'같은 존재였다. 물론 동생도 그런 삼촌 노릇이 마냥 행복해서 이 고생을 하고 내려온다.
어린이날 당일은 비바람이 더 몰아쳤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너무 번거로워서 좁은 집에서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다가 집 근처 마트로 선물을 사러 나왔다. 아내는 이 작은 틈을 휴식으로 여기며 집에 남겠다고 해서 나와 동생이 딸을 데리고 나왔다.
아이는 정말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쇼핑하며 삼촌과 나의 눈을 바라봤다. 이 장면을 엄마도 같이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마음 한 곳이 쓰리면서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린이날 시장에 엄마 손을 잡고 가서 장난감을 골랐던 그때가 너무도 선명했다. 재래시장을 한참 걸어서 도착한 곳은 갖고 싶은 장난감 천국이었다. 너무 비싼 것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머뭇거리면 엄마는 쌈짓돈을 꺼내면서 사주곤 했다. 나와 동생은 장난감을 얻은 것에 흥분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갔다. 어느덧 그 돈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순간이 왔고 그 미안함은 사춘기로 이어졌다. 그렇게 엄마의 대화는 멀어져 갔다.
아마 나도 지금의 철없는 딸아이가 그리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모습을 기억에 담아 두려고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저장했다. 나중에 꺼내볼 수 있게 말이다.
그렇게 즐거운 아이 선물을 사고 우리는 1층 식품코너로 가서 장을 봤다. 아이가 잘 먹는 것, 외국인 아내가 좋아하는 것, 동생이 좋아하는 것을 충족하는 그런 음식은 없었다. 결국 나는 힘들게 내려온 동생에게 초점을 맞춰서 장을 봤다. 콩나물도 사고, 동생 좋아하는 삼치도 사고 그렇게 조촐한 집 밥을 만들기 위해 카트에 음식을 담았다.
집에 와서 묵은지와 콩나물을 넣고 김칫국을 만들고, 남은 콩나물은 무침을 만들었다. 삼치는 소금 간을 한 상태로 튀김가루를 발라서 노릇하게 구웠다. 동생은 엄마가 건강할 때 생선을 종종 구워주고 자기가 먹고 있을 때 뼈를 발라줬던 그 순간을 종종 이야기했다. 그렇게 자식만 바라보며 못난 남편 만나서 서럽게 보낸 세월을 위로받았던 엄마였다.
한 상 차리고 밥 먹을 시간이라고 가족들을 불렀다. 딸아이는 밥상을 보고 '에이.. 맛없는데..'라고 외쳤다. 아직 8살이라고 봐주기에는 점점 버릇이 없어져서 항상 거슬렸는데 오늘따라 그 말에 어린아이처럼 내가 삐졌다. 하지만 동생을 위한 밥상이니 그냥 넘기기로 했다.
동생은 김칫국을 먹고 내 얼굴을 쳐다봤다.
"형...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김치 넣고 만들었지." 나는 싱겁게 대답을 했지만 사실 몇 번이나 간을 보면서 옛날 엄마가 자주 해줬던 그 맛을 따라 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시원하면서 약간은 달달한 듯한데 끝맛이 매운 표현할 수 없는 엄마맛을 따라서 추억 여행을 했다.
동생은 허겁지겁 국에 밥을 말아서 먹기 시작했다. 아내와 딸은 동생이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는 국이랑 밥이랑 많으니 천천히 먹으라는 말을 던지고 밥을 먹었다.
그런데 동생 건너편에 앉아 있는 딸아이가 입을 열었다.
"삼촌... 왜 울어?"
동생은 조용히 울고 있었다. 매워서 그렇다고 돌려서 말했지만 그것은 눈물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맵지도 않았다. 고개를 국그릇에 처박고 동생은 말없이 수저질을 했다. 나는 그런 동생을 보며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가 아무리 엄마 이야기를 피해서 안 해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엄마는 잊을 수 없는 이야기와 같았다.
아직 살아계심에 그리고 다음에 동생과 함께 요양원을 찾아가면 아니 동생이 계획대로 올여름에 같이 모시고 살게 된다면 두 아들을 보며 무척이나 기뻐하실 엄마이기 때문에.
식사를 마치고 분리수거를 들고 나와서 짧은 이야기를 했다.
동생은 말했다. 엄마가 해 준 맛이랑 너무 비슷해서 눈물이 났다고..
그리고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속으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맛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가끔 엄마가 차려 준 음식이 떠오른다. 하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어른 흉내 낸다고 술 쳐 먹고 병이 나면 엄마는 북엇국을 만들어 주셨다. 그냥 별 말없이 만들어 주셨다. 그럼 괜히 엄마한테 고맙고 그랬다.
이제는 사탕만 찾는 엄마지만 그래도 엄마 자식이라서 이번 어린이날은 나름 따뜻했다. 오랜만에 나름 형 노릇 좀 한 것 같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