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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Sep 02. 2023

46. 엄마! 다시 서울로 오면 더 행복해질 거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삿날이 다가왔다. 2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간 것이 정말 실감 나지 않았다. 이렇게 내 동생과 엄마의 경기도 생활은 끝이 났다.


처음 경기도로 이사를 결심할 때 엄마의 상태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말도 많이 했고 자신의 물건도 구분하고 의사 표현도 했다. 그냥 조금 이상한 정도이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는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습이 미치도록 그립다.

엄마가 골절로 장기간 입원을 하게 되면서 동생과 나는 2년 전에 서울에 빌라 처분을 결심했다. 엄마의 애착이 많은 집이고 엄마가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집이라서 망설였지만 집터가 좋지 않아서 인지 사는 동안 우리 가족들은 항상 아프고 고생을 했다. 특히 예민한 동생은 그 집에서 매일 가위를 눌리며 고통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집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나같이 평생 잠만 잘 자는 인간도 그 집에서 몇 번 가위를 경험했다. 물론 엄마도 돌아가신 아빠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 집이 찜찜했다. 물론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간암 말기 진단, 어머니 위암 수술과 치매 진단 등 더 이상 나쁜 일이 생일 것도 없을 것 같았지만 사람이라는 게 한 번 그런 생각을 하니 모든 게 의심스럽고 괜히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집을 매도할 때 집값이 최고 상승기라서 시세차익을 누리며 빌라는 매도했고 잠시 한 적한 곳에서 생활하며 엄마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경기도를 선택했다.


그런데 2년 동안 엄마는 경기도 집에 머물지 못했다. 골절로 10개월 가까이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할 때쯤 엄마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져 있었다. 결국 나는 주간보호센터를 보내고 야간에 동생이 홀로 엄마를 돌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엄마는 새벽에도 일어서나 냉장고에 날 것도 먹고 한 밤중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리곤 했다. 동생은 모시고 살 수 있다고 했지만 지방에 살면서 매일 옆에서 볼 수 없는 내 입장에 불안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양원을 알아봤고 엄마는 요양원에 가게 되었다.


그렇게 11개월이라는 시간을 남에 손에 엄마를 부탁했다. 우리 형제는 엄마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만 했다. 당연한 것일 테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요양원에서 엄마를 잘 돌봐주지 않는 것 같았다. 면회를 가면 씻지도 않아서 머리에서 냄새가 나고 눈에 눈곱과 입에서는 썩은 냄새가 났다.


씻겨 드리지 않으면 혼자 씻지 못하는 엄마는 그렇게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와 동생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항의를 해도 소용없었고 자식처럼 돌봐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가 엄마를 그곳에 보냈으니 감당은 우리 몫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체중이 점점 줄었다. 31kg이라는 정말 앙상한 몸으로 변해버렸다. 식욕은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만 골라서 먹거나 씹다가 뱉어버려서 영양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요양원에 보호사 분들이 아무리 잘 돌봐드려도 우리 엄마처럼 스스로 인지를 못하는 분을 옆에서 계속 지켜볼 인력은 부족할 것이 당연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시 엄마를 모시기로 결심했다. 사실 우리가 아니고 동생이 모시는 것이 맞다. 그래서 미안하고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동생은 그렇게 하고 싶어 했다.

집에서 가장 노릇을 하는 고작 인생을 5년 더 살아 본 형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착한 동생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고 내게 허락을 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말을 아꼈다. 내가 모시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힘들지 알기에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친척들이 위로한다고 내게 전화해서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라고 몇 년 전에 말할 때 그 사람들이 미웠다.

하지만 그분들은 나와 동생을 걱정했기에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또한 입장이 달라지자 동생이 더 걱정되었다. 아이보다 더 돌보기 힘든 엄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만난 여자친구도 있는데 결혼하고 정착해야 할 나이에 걸림돌이 될까 봐 우려가 되었다. 하지만 동생 이기는 형은 없었다. 동생에게 지고 말았다.


  물론 요양원에서 엄마를 정말 잘 보살펴 드렸으면 허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면회를 자주 가서 뵙자고 동생을 설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엄마가 용양원에 계시는 동안 하루도 마음에 편하지 못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 말대로 엄마의 치매 진행속도는 정말 빨랐다. 사실이 아닐 거라고 처음에는 부정했는데 몇 년을 지켜보니 선생님의 말대로 엄마는 정말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 말대로라면 엄마에게 남은 시간은 정말 몇 년이 전부인 시한부 삶이 맞았다. 그래서 동생은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엄마를 곁에서 지키고 싶다고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마음이 급해진 것이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동생 직장 근처에 좋은 조건에 집을 구했다. 나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장기적으로 머물 수 있는 아파트를 알아보자고 했고 우연처럼 오래된 아파트지만 급매로 우리는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동생 직장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경기도에서 출퇴근할 때 한 시간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주간보호센터의 돌봄 시간도 서울이라서 그런지 더 넉넉해서 괜찮았다.


힘들기는 해도 출퇴근 시간도 줄고 회사에서 배려도 받으니 엄마를 모시고 살면서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경기도 집에 가서 동생과 함께 짐을 샀다. 다시 버릴 것을 추리고 엄마의 물건을 하나씩 정리했다. 2년 전 이사 올 때 그렇게 많이 버렸는데 버릴 것이 넘치고 넘쳤다.

장롱에서는 끝도 없는 엄마의 인생이 흘러나왔다.


엄마 결혼식 때 받은 봉투들은 작은 상자에 담겨 있었고, 어릴 적 우리 형제의 사진들도 곱게 서랍에 들어있었다. 나는 일을 하러 간 동생을 대신해서 홀로 집에서 짐을 정리하고 정리했다. 그런데 많은 것을 버리지는 못했다. 엄마가 앞으로  쓸 일이 절대 없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이 많았지만 버릴 수 없었다.


그 물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가방을 보면서 엄마도 정말 여자였구나 싶었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많은 가방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브랜드를 잘 몰라서 비싼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지만 싸구려는 절대 아닌 것 같았다. 모두 오래된 것들이었다.

아마도 아빠 장사가 잘 될 때 아빠에게 받은 것 같았다.


내 기억 속에 엄마는 항상 어디 갈 때 똑같은 가방을 들고 다녀서 엄마에게 이런 고급진 핸드백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마도 아끼고 아꼈을 것이다. 더 좋은 일이 생기며 들고 다니고 싶어서 말이다.

아니면 아빠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서 고이 한 곳에 모셔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건들을 차곡차곡 박스에 담으면서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바로 엄마도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원피스, 치마 그리고 이쁜 코트를 보면서 그 생각은 멈추지 않았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어린 시절 이유도 모른 채 버려져서 오랜 시간 보육원에서 부모의 사랑도 모르고 자란 그 어린 소녀가 아빠라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우리를 낳아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그 시간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엄마의 인생은 참 복도 없고 운도 없는 그런 삶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 형제를 보면서 행복해했다. 물론 아빠가 사고를 치면 속상해하고 혼자 눈물도 삼키며 산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건강할 때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엄마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안타깝고 불쌍했다.


이미 벌어진 것들을 주워 담고 되돌릴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한테 세상은 불공평했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무리 힘든 청춘을 보냈어도 남들은 자식들에게 용돈도 받고

할머니 소리도 들으면서 평범하게 늙어 가는데 어려서도 나이 먹어서도 여전히 엄마에게 삶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한 가지 내가 몰랐던 것은 짐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본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 속에 그 소녀는 희망에 가득 찬 삶을 기대하고 있는 그저 어리고 여린 평범한 소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라렸다.

어쩌면 인생은 참으로 고달픔의 연속이자 불안함을 품고 그저 아침에 매일매일 눈을 뜨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식 입장에서 지금 아픈 엄마가 안쓰럽다고 해도 엄마는 나름 괜찮은 인생이었고 행복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난 그저 자식일 뿐이고 엄마가 아니기에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내가 겪는 모든 일도 나중에 다가올 큰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에 오늘은 적어도 웃어본다.

엄마의 마지막 집이 될지도 모르는 이 새로운 터전에서 억울해서 울고, 가끔 웃기도 하고, 희망과 절망도 품어보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행복했다.


9월 중순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올 날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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