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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Sep 03. 2023

47. 돌아가신 아빠도 응원하고 있었구나.. 미안해서

걱정하지 말아요. 잘 하고 잘 살고 행복할거니까.

  동생의 절약정신은 몸을 혹사시키는 결과로 돌아왔다. 일주일 짐을 보관해야 해서 나름 알아보고 저렴하다고 하는 곳에 이사를 의뢰했는데 포장이사가 아니었다. 몇 번의 이사를 했지만 포장이사가 아닌 것은 아주 어릴 적을 빼면 처음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짐 정리는 어른들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사다리차를 통해 봉지에 담겨 올라온 모든 물건을 정리해야 했다. 동생은 미래를 위해 자격증 실습과 정신없는 회사일로 이사를 하는 날에도 출근과 실습을 가야 했다. 상대적으로 시간을 뺄 수 있는 내가 혼자 정리를 해야 했다.


엄마를 모시고 살 서울 아파트로의 이사는 우리 형제를 기쁘게 했지만 끝도 없는 정리는 육체적으로 너무 고달팠다. 정말 짐을 풀고 풀어도 끝이 없었다. 하루면 끝낼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봉지 열면서 배치하고 버릴 것을 다시 추스르는 일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게다다 집에는 냉장고도 없고, 에어컨 설치도 아직 안 해서 덥고 목까지 말랐다. 그럼에도 나는 행복했다.


동생 이름으로 작고 오래된 아파트지만 서울에 자가를 마련했으니 왠지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엄마를 모시기에 좋은 아파트를 골랐다고 하지만 나는 동생 결혼해서 오랫동안 정착할 곳도 생각했다. 어설프게 어린 나이에 가장 역할을 하면서 살다 보니 서른 중반이 된 동생 결혼도 내게는 큰 걱정이자 해결해야 할 과제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오랜 시간 만나고 있는 착한 아가씨가 있어서 홀로 외롭게 살아가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구색을 갖춘 상태에서 꿀리지 않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게 이 아파트는 미래의 동생 신혼집을 의미하기도 했다.  짐을 정리하면서 계약하면서 미쳐 보이지 않았던 하자와 보수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속이 상했다.


우선 깔끔하다고 생각했던 도배상태가 정말 별로였다. 거실만 다시 도배를 했다는 것을 그때는 상세히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퇴근하고 온 동생에게 말을 꺼냈다.


"이거 엄마방이랑, 손님방 그리고 너 방까지 도배를 하면 좋을 거 같아.."


동생은 그럴 필요가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생각해 봐 지금 해야지 살면서 두 번 세 번 고생 안 한다니까... 그리고 너무 상태가 안 좋아 누렇고 더럽기도 하고..."


동생은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알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날 동네 도배장판 가게를 찾아 나서려는데 마침 밖에 나와 있는데 동생이 잠시 일하다가 집에 온다고 전화가 왔다.


"형, 나 지금 거의 아파트에 도착했어."

"근데 왜?"

"어제 형이 도배 이야기해서 오전에 숨고로 의뢰했는데 한 분이 실사를 온다고 해서... 그리고 나도 물건 두고 온 게 있어서 겸사겸사 가려고. 형 밥 안 먹은 거 같아서 뭐 간식도 좀 주고..."

"아 그래? 난 동네에서 찾아보려고 했는데 알았어. 바로 올라갈게."


이렇게 짧은 통화를 마치고 아파트에 올라가서 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형 혼자 모든 정리를 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불편하고 미안한 듯했다.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도배사 한 분이 노트를 하셨다.


들어오시라고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 버렸다.

이유는 돌아가신 아빠랑 너무 닮아서였다. 그것도 아빠가 간암 판정을 받기 전에 건강했던 모습과 너무 똑같았다. 안경을 쓴 모습까지 너무 비슷했고 말투도 닮아 있었다.


동생은 서서 이야기하는 나와 그분을 바라봤고 나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상의를 했다. 기분은 계속 묘했다. 속으로 가격이 조금 비싸도 이분에게 도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아빠를 닮아서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가격을 물어보자 다른 업체보다 무려 30만 정도 저렴하기까지 했다.


사장님은 사실 이 정도를 받아야 하는데 싸게 진행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동생을 올라다 봤다. 동생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얼굴을 바라보기 민망할 정도로 닮은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러 생각을 했다.

사장님이 떠나고 동생도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그리고 멈췄던 생각은 다시 떠올랐다.


'아빠가 정말 미안했나 보구나... 두 아들이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구나...

아마 그래서 아빠가 이 집에서 행복하라고 깨끗하게 도배를 해주고 싶었구나..'


아빠는 깔끔한 사람이었다. 물건도 잘 고치고 손재주가 좋았다.

물론 말년에 사고를 많이 치고 우리를 힘들게 했지만 두 아들을 사랑하고 끝까지 걱정했다.

아빠에게 우리는 인생의 전부였다.


사실 자식을 낳고 아빠가 되기까지 그 마음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식이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이고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마음이 드는지 말이다. 무엇을 해줘도 미안하고 아무리 안전한 곳에 있어도 걱정되었다.

그래서 아빠가 되고 나는 더 돌아가신 아빠가 그리웠다.


내 딸을 보면서 아빠가 떠오르곤 했다. 살아계셨으면 소심하게 얼마나 뒤에서 손녀 자랑을 하고 다녔을까?

과연 마음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가 되셨다면 정신 차리고 젊은 시절 열심히 살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을까?


이런저런 생각은 내가 힘들고 지치면 더 떠올랐다. 직장에서 힘들어도 떠오르고 부부관계가 별로여도 떠오르고 어린 자식이 나를 서운하게 해도 떠올랐다. 물론 재테크를 하면서도 이직을 준비하는 과정에도 아버지는 계속 떠올랐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기대고 있었구나 싶었다. 무능력하다고 욕하고 무시했어도 나는 아빠에게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아빠를 하늘로 보내고 알게 되었다.


그 날밤 동생은 퇴근길에 나는 마중을 나갔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려고 약속을 하고 기다리면서도 그 사장님이 떠올랐다. 아니 아버지가 떠올랐다. 잠시 잊고 지냈는데 계속 머릿속에서 어린 시절 추억들이 나의 발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어느새 동생은 버스에서 내려서 내게로 오고 있었다.


미리 알아봐 둔 맛집을 찾아서 우리를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동생이 내게 물었다.


"형... 난 아빠 같아서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겠더라고.."

"정말 닮았더라. 정말 깜짝 놀랐어. 말투도 비슷하고 어쩜 그 거절 못하고 손해 보고 사는 성격도 비슷한 거 같더라."

"난 아빠랑 추억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돌아가실 때 슬프지도 않았고 병문안도 잘 안 갔는데.."

"추억은 네가 기억 못 하는 거지. 너랑 나랑 어릴 때 아빠는 최선을 다했어. 자주 놀러도 가고. 다정하고.. 네가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 할 뿐이야."


동생은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여린 놈이 요즘 더 여려진 거 같았다는 생각 했다. 어쩌면 이번 이사를 준비하고 곧 엄마를 모시고 오는 모든 무게감이 그를 도망치게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압박감에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며 그 누구도 원망하지 못하고 힘들면 힘든 데로, 행복하면 행복한 순간데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조용히 내 앞에서 울고 있는 동생을 보고 나는 그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난 이렇게 생각해. 아빠가 너무 미안해서 그래서 도배라도 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게 아닌가 싶어. 원래 아빠가 속정이 깊은 사람이거든. 표현을 못해서 평생 그렇게 주변을 맴돌다가 갔지만 아빠는 정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거든. 형은 알아. 아빠가 참 바보같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을 했지만 그건 사실 아빠가 모두 잘 못했다고 하기에는 좀 억울하거든."


동생은 내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없던 추억까지 끄집어내서 말을 하고 또 했다. 왠지 아빠가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 벌어질 일도 덜 막막했다.


뭐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우리 형제는 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따라 소주 맛이 참 달고 좋았다.


'아빠 걱정해 줘서 고맙고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름 애쓰며 최선을 다했다는 거 다 아니까. 그냥 위에서 편히 지켜봐요. 대신 엄마가 거기로 가면 이번에는 좀 잘해줘요. 옆에서 다정한 말도 좀 많이 해주고. 고생했다고 위로도 해주고 그러면서. 그거면 우리 형제들 아래서 고생한거 다 괜찮을거 같아요 그리고 도배 고마워요. 동생 결혼까지 잘 시킬께요.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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