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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Sep 17. 2023

48. 엄마 그동안 요양원에서 고생했어 그리고 미안해

치매 엄마와 두 아들 이야기

23년 9월 14일 엄마는 10개월의 요양원 생활을 마치고 우리 형제 품으로 돌아왔다. 퇴소하기 하루 전 나는 동생이 이사한 아파트로 향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를 반복했던 고속도로 풍경이 그날따라 눈부시도록 이뻤다. 엄마가 내일 퇴소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벅찬 것도 있고, 이사한 집에서 일주일 생활한 동생이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요양원에서 나온 엄마가 건강한 상태로 나오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에 좋은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작년 11월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고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다. 면회하러 올라가면 엄마의 몰골은 점점 보기 힘들 정도로 나빠졌다. 더욱 답답한 것은 치매라서 통화도 불가능하고 엄마가 잘 지내는지 전혀 의사 확인이 불가능했다.


답답한 마음에 요양원 톡에 안부를 묻는 것이 우리 형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잘 지내시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너무 잘 계신다는 그 형식적인 답변 때문에 가슴이 쓰리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병원도 촉탁 병원에 의뢰할 수 있었지만 매번 동생과 함께 원래 다니던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그래야만 우리 마음이 편해지기에 그렇게 했다.


물론 엄마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간 것이기도 했다. 이런 마음고생을 아는지 엄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인지 장애 때문에 어떤 표현도 예전처럼 엄마는 하지 못했다. 엄마가 원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이 전부였다.


안부를 묻는 것도, 사는 게 어떠냐는 그런 사소한 질문도 엄마에게 듣지 못하지 너무 오래되었다.

누군가 걱정해주고 있다는 그것도 부모님이 걱정해 준다는 것이 어린 나이에는 잔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이런 경험을 하면 그 잔소리가 얼마나 그리운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엄마 퇴소는 우리 형제를 괜히 기분 좋게 만들었다. 누구 보면 감당도 안 되는 엄마를 집에 모셔와서 사서 고생한다고 혀를 차기도 하지만 상관없었다. 매일 볼 수 있고, 잘 먹지도 못하지만 좋아하는 거라도 드릴 수 있고, 깨끗하게 씻겨드리는 것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밤에 동생 집에 도착해서 함께 마무리 집 정리를 했다. 엄마 방을 수도 없이 닦고 조명까지 은은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의미 없게 보는 텔레비전이지만 가끔 보면서 웃기에 작은 TV도 방에 준비했다. 그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소품과 아빠가 살아계실 때 처음으로 찍었던 가족사진 액자도 선반에 두었다.


엄마가 와서 편하게 쉬고 하루하루를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런 준비를 하면서 동생은 계속 혼잣말로 '좋다...' '좋다....'를 중얼거렸다.

그동안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갔는지 묻지 않아도 그 중얼거림에 알 수 있었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우리는 마지막 외출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엄마가 퇴원하면 나가서 밥을 먹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마지막이라고 거창하게 이름을 붙이고 낯선 동네 맛집을 찾아서 곱창 집에 갔다.

소주와 노릇하게 구워진 소곱창을 먹으며 우리는 전투에 나가는 군인처럼 결의를 다졌다.


아마도 이 집에 엄마의 마지막 집이 될 거라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 얼마의 병세를 시간을 앞서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시간이 소중했다. 동생과의 대화도 소중했고, 남들이 생각할 때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는 절대적으로 붙잡고 싶은 지프라기 그 자체였다.


오래된 아파트지만 정 남향이라서 아침 햇살에 자연스럽게 눈을 뜬 우리 형제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깔끔한 옷을 입고 서둘러 요양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우리 형제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저 풍경을 보며 각자 상황에 맞게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시련이 다가올지 전혀 예측도 불가능한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아무 생각하지 않는 것,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냥 서로의 존재가 힘이 되기에...


요양원에 도착하니 원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찾아와서 왜 이렇게 퇴소하냐면서 정산서를 내밀었다. 그동안 서운했던 것들을 말한다고 지나간 시간이 돌아오지 않기에 우리는 그저 10개월 동안 감사했다고 말을 전하고 금액을 정산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엄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엄마는 더 말라있었다.


머리도 짧게 잘라진 상태였고 옷에는 얼룩이 가득했다. 나는 그냥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서두르는 우리 형제를 보며 원장 선생님은 밖으로 직접 배웅하러 나왔다.


엄마한테 정들었는데 하면서 엄마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엄마가 아무리 아파도 서로 서운해할 것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그저 인사하고 빨리 엄마를 차에 태웠다. 원장선생님은 무엇인가 걱정되었는지 나중에 상태가 더 안 좋아지면 꼭 다시 오라고 우리에게 이상한 인사를 던졌다.

나는 색조화장으로 얼굴을 두껍게 가린 원장 선생님의 속마음이 너무 뻔하게 보여서 조금은 역겨웠다.

그냥 짧게 마지막 인사 건네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차가 움직이자 엄마는 우리에게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사탕 줘!"


동생은 '다시 오라고..' 말한 원장의 말을 낮은 목소리로 몇 번 반복하더니 엄마에게 사탕을 건넸다.

나는 동생에게 그냥 잊자고 했다. 엄마가 다시 돌아갈 일은 없으니 그냥 우리랑 상관없는 일로 여기자고 말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식당을 가려고 했으나 엄마의 옷이 너무 더러워서 우리는 바로 집으로 향했다.

동생은 엄마를 벗기고 바로 목욕을 시켰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엄마의 몸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보기 힘든 상태였고 몸무게는 28kg이었다.


10개월 전 35kg을 걱정하며 보냈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다. 치매를 떠나서 말라서 사람이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동생과 나는 앙상한 엄마의 몸을 보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엄마가 정말 환하게 웃으며 우리 두 형제와 바라봤다.


그 미소는 정말 행복한 미소였다. 우리는 그 모습에 아픈 엄마에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깨끗한 옷으로 입히고 엄마를 방으로 모시고 갔다. TV를 틀어주면서 엄마한테 이게 엄마 방이라고 말해줬다.

엄마는 매트리스에 살포시 누었다. 기력도 없어 보여서 우리는 조금 있다가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엄마 방에서 몇 시간을 잤다.


나는 그 모습을 문 밖에서 몇 차례나 지켜봤다.


엄마는 편안해 보였다.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이 집은 뭐냐고 궁금해하지도

아무런 질문도 없는 엄마지만


엄마는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우리 형제는 그거면 충분했다. 엄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든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엄마가 마음 편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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