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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Oct 06. 2023

49. 엄마방에 다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야. 잊지마.

 엄마는 우리 형제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힘들고 우리 가족을 서글프게 했어도 우리는 불행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것을 비교나 설명이 불가능한 감정이었다. 며칠 휴가를 내서 엄마의 적응을 동생과 함께 지켜보고 필요한 것들을 분주하게 설치했다.

다행히 이사한 집은 포근하고 아늑했다. 최소한의 것들만 남겨둔 미니멀한 집이 되었지만 동생은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니멀해졌다고 중증 치매 환자에게 안전한 집이 된 것은 아니었다.

 

주문한 물건들이 하니씩 집으로 배달되었다. 첫 번째로 우리 형제가 신경을 쓴 것은 식탐이 강해진 엄마를 위한 시건장치들이었다. 동생이 깊은 잠이 든 새벽에 홀로 일어나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거나,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그래서 3자리 비밀번호를 설정해야 열리는 냉장고 잠금 경첩을 가정 먼저 설치했다. 치매가 아니라면 칼로 손쉽게 해체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해 보였지만 엄마는 잠금장치가 설치된 냉장고를 혼자 열지 못하셨다. 그럼에도 며칠 동안 냉장고와 연애라도 하듯 눈 뜨면 냉장고로 가서 쓰다듬고 만지며 열리지 않는 문을 어루만졌다. 사실 지켜보면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주 평범한 것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를 가진 치매는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숙명과 같은 놈이었다. 다음으로 현관문을 내부에서 열지 못하게 이중으로 잠금을 보강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새벽에 혼자 나가서 다칠까 봐 어쩔 수 없이 설치해야 했다. 혹시나 해서 설치했지만 엄마는 홀로 문을 열지 못했다.

이제는 그 흔한 전자 도어록 누름 버튼도 잊어버린 상태였다. 아마 소녀시절로 홀로 과거 여행 중 인 것만 같았다. 열쇠로 열어야만 했던 던 그 시절에 현관문만 엄마 기억 속에 살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혹시나 걷다가 넘어질까 엄마 동선에 있는 물건들의 위치를 조정했다. 직접 걷기도 하고 엄마를 데리고 이리저리 다니고 관찰하면서 최대한 엄마가 편하도록 했다. 물론 쓰레기통도 숨겨야만 했다. 모든 것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문지방에 넘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를 키우는 집처럼 모든 것들은 장애물이자 위험한 것들이었다.


다행히 이사한 집은 오래된 아파트지만 화장실이 정말 넓었다. 동생은 처음 화장실을 보고 엄마 목욕시킬 때 편할 것 같다면서 좋아했다. 그 모습이 내게는 안타까움과 억울함 그리고 조금의 위안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막상 이사하고 집에서 엄마 목욕을 시려고 하니 예전에 사용하던 작은 플라스틱 의자 앉는 것을 어려워하셨다.  요양원에서 체중이 너무 빠져서 이제는 일어서고 앉는 것도 마치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게 돼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의자를 구매했다. 처음 인터넷에 가격을 보고 놀라기는 했는데 요양등급으로 감면을 받으니 가격은 저렴해졌다.  목욕의자를 조립하고 화장실에 설치했다. 그래도 공간은 넉넉했다.


동생은 내가 의자를 조립해 주니 궁금했는지 엄마를 모시고 와서 목욕을 시켰다. 그러다 집안을 청소하고 있는 나를 불렀다. 동생은 웃고 있었다. 엄마를 본 나도 큰 소리로 웃었다.

엄마는 목욕의자에 젓가락보다 가는 다리를 도도하고 꼬고 앉아서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편해 보이고 웃기도 해서 우리는 슬픈 상황이지만 진짜로 웃고 또 웃었다.

엄마는 두 아들놈 마음도 모르고 웃는 우리를 보니 기뻤는지 같이 웃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엄마의 알몸을 보는 것이 아직도 힘들고 두렵다. 그래서 자주 피했다. 다행히 동생이 목욕을 시켜서 피하고 싶을 때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웃으면서 엄마 몸에 시선이 향했다.


안 그래도 작은 체구에 작은 키로 아담했는데 엄마는 정말 조금 큰 주머니에 넣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조금 해져 있었다. 아파서, 잘 먹지 못해서 마른 것은 알지만 왠지 우리를 키우느라 이렇게 홀쭉해진 거 같아서 더 미안했다. 이렇게 아프게 된 것도 물론 유전적인 요인이 크다고 의사 선생님은 말했지만 그럼에도 철없던 시절 엄마 속을 검게 만든 나의 잘못도 있을 거라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엄마에게 미안했던 기억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지금 이렇게 인간 노릇하고 사람처럼 사는 것도 모두 엄마 덕이라고 항상 생각한다. 아무리 충격적인 사고와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놀라게 만들어도 엄마는 항상 나를 믿어줬다. 내가 고등학교를 갑자기 자퇴해서 1년 동안 방황하며 게임만 할 때도 잔소리조차 아끼며 지지해 주었고, 갑자기 중학교 때 잠시 전화로만 연락한 풋사랑 누나를 만나러 지방에 내려간다고 할 때도 미성년자를 떠나 한 사람의 인격으로 나를 존중해 주며 응원해 줬다.

아직도 나는 부산에서 그 누나를 찾겠다고 3주간 고생하고 거지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엄마는 좁고 좁은 거실에 누워서 집에 온 나를 보며 한마디 하셨다.


"아들 잘 다녀왔어? 어때? 근데 후회했지?.. 얼른 씻어. 엄마가 김치찌개 해줄게."


나는 엄마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김치찌개가 너무 맛있어서 할 말을 잃어버렸었다. 엄마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나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쩔 때는 그냥 기억 속에 두고 혼자 보는 게 좋을 때가 있더라고. 직접 보면 실망감이 생기기도 하고 그럼 기억 속에 그 좋은 모습이 조금은 망가지니까.."


기억 속의 엄마와 눈앞에 있는 엄마는 같은 사람이 분명하지만 몸이 늙는 것보다 기억이 늙어서 사라진 것이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 과거라는 지나간 시간을 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더욱 엄마의 과거를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었다.



엄마의 도도한 목욕이 끝나고 나는 동생과 함께 엄마방에 홈 카메라를 설치했다. 엄마가 초기 치매 증상을 보일 때 걱정이 돼서 거실과 방에 두 개를 설치하고 종종 보곤 했다. 지금도 그때의 영상과 사진이 있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지금은 잊고 있었지만 당시 영상 속에 엄마는 너무나 건강해 보였다.

집중해서 텔레비전도 보고 우리랑 대화도 했다. 먹는 것도 혼자 잘 먹었다. 지난날을 뒤로하고

나는 와이파이와 카메라를 연결하고 밖에 나가서 테스트를 했다.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실감했다. 영상 재생 버튼을 누르자 엄마 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마음은 조금 씁쓸했지만 그리고 사실 지금은 CCTV가 필요 없지만 나를 위해서 설치했다.


자주 본다고 치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달라질 현실도 없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멀리서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자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 모습이라도 매일매일 기억하고 싶어서 설치했다.


누군가는 불쌍한 인생이라고 엄마를 말한다. 사실이다. 불쌍하다. 아직 젊고 젊은데 이런 인생을 산다는 것이.

그런데 아마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자식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엄마라는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결혼도 미루고, 직장 근처로 엄마 때문에 집까지 이사해서 일 끝나고 엄마와 동거를 하는 하나뿐인 내 동생을 둔 엄마는 가장 축복받은 여자이다. 게다가 자는 모습까지 매일매일 몰래 카메로 지켜봐 주는 큰 아들까지 두었으니 아마도 가장 행복한 여자가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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