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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Oct 21. 2023

1. 아빠가 떠나고 혼자가 돼서 우울해서 그럴 거야.

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이 사는 이야기

본 브런치북은 매거진 [잊지마 엄마는 여전히 소중해]의 일부 내용을 재편집하여 수정하였습니다. 
매거진을 먼저 읽으신 독자분들은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느덧 엄마가 위암 수술을 한지도 4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가끔 동생은 내가 사는 먼 곳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집에 왔다. 수술 후 다행히도 별다른 합병증이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엄마는 많이 지쳐 보였다. 무엇보다 예전보다 말수도 줄고 손녀딸을 보고도 잘 웃지 않으셨다. 

나와 동생은 퇴직 후 집에만 있다 보니 삶이 너무 단조로워서 그런 줄로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 엄마를 위해 오랜만에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셋이서 극장으로 향했다. 결혼하기 전 같이 살 때 밤에 시간만 나면 우리는 이렇게 심야 영화를 즐겼다. 사실 엄마는 영화를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냥 다 큰 두 아들 손을 꼭 잡고 무심한 아빠를 대신해서 데이트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영화 제목을 몇 번이나 되묻곤 했다. 다음 날 출근해서 동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제 아들놈들이 또 극장에 가자고 해서 요즘 그 최신 영화 거시기 있잖아…. 그거 보고 왔지. 안 봤으면 한번 봐봐. 너무 재미있더라....”     


자랑할 것이 얼마나 없으면 이런 걸 가지고 말을 할까 싶었지만 엄마가 행복하다면 최신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모시고 갈 수 있었다.      

오랜만이긴 해도 이번에도 최신 영화를 선택했다. 액션도 코믹도 없어서 슬픈 맬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우리는 푹신한 영화관 소파에 앉아서 평소처럼 엄마를 가운데 두고 경쟁하듯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봤다.

한 참 영화를 보고 있던 중에 엄마가 큰 소리로 적막을 깨고 웃으며 말을 했다.     


“하하하, 저게 뭐야.”

우리 형제는 당황해서 엄마를 동시에 쳐다봤다.     


“조용히 해요, 여기 극장이야. 갑자기 왜 그래?”          

우리가 이렇게 말해도 엄마는 남들은 슬퍼서 울고 있는 순간에도 큰 소리로 웃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엄마는 계속 슬픈 장면마다 웃고 또 웃었다. 

특히 주인공이 빰을 맞거나, 극단적으로 슬픈 장면에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그 순간 불길함을 직감했다. 잠시 평화로웠던 엄마의 삶에 다시 어둠이 찾오은 건 아닌가 걱정스럽고 불안했다.     


그날 밤 엄마가 잠 들고 나는 동생과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 왜 그러시냐? 뭔가 이상한데…….”     


동생은 최근 엄마가 드라마를 볼 때 많이 웃기는 했는데 그냥 재미있어서 웃는 거로 생각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제외하면 어머니는 크게 이상한 행동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서울 집에 갈 일이 생기면 나는 아내가 싫어해도 가족들을 데리고 같이 올라갔다. 물론 손녀딸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마한테 뭔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평소라면 큰 아들이 오면 맛있는 음식을 해주려고 장을 보고 기다렸던 엄마였다. 특히 내가 엄마표 김치찌개를 제일 좋아해서 서울에 있을 때 꼭 한 번은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항상 허겁지겁 먹는 내 모습을 옆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던 엄마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냉장고는 텅텅 비워져 있었다. 

동생에게 물어보니 최근 들어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그냥 피곤해서 그러시겠지….’ 하고 그 또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밥을 안 해 줘도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다 같이 외식하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면 되니까. 하지만 급격하게 줄어든 말수와 삶에 대해 아무런 미련 없는 듯한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방에서 일을 하는 나는 엄마가 이상해진 것 같아도 자주 찾아뵐 수 없었다. 그래서 위암 치료 기간에 정기적으로 병원을 모시고 가는 것은 동생 전담이 되었다. 아무리 멀어도 4시간씩 차를 타고 와서 돌봐 드렸을 테지만, 결혼하고 나서 내 시간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이런 사정을 동생도 엄마도 이해해 줬다. 그래서 병원 가는 날에 동생을 통해 엄마에 대해 항상 전해 들었다. 다행히 위암 수술 후 전이나 다른 합병증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이 모든 것이 위암 합병증이라고 엄마가 조금 우울해서 그런가로 넘어가려고 노력하는데 어느 날 새벽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은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어머니 때문에 못 살겠다고 자기가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어리광 부리는 것 같아서 본인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나는 동생을 달랬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게 전부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싶었지만, 나 혼자만의 생각이고 현실적으로는 결혼한 지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겨우 동생을 진정시키고 왜 그런지 차분히 물어봤다. 동생 말로는 최근에 엄마가 새벽 4시까지 텔레비전을 보면서 혼자 큰 소리로 웃는데 그것 때문에 잠도 못 잔다고 했다. 잠자리에 예민한 동생의 심정도 이해가 됐다. 동생은 몇 번이나 새벽에 엄마한테 부탁했지만, 엄마는 본인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나는 며칠 뒤 서울 집으로 올라갔다. 도착하니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아니 이상하고 차가웠다. 엄마는 무척이나 화나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엄마가 정신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저놈이 텔레비전을 못 보게 했다고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조르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내게 TV를 켜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리모컨으로 주니 엄마는 영화를 보며 또 정신없이 웃었다. 나는 옆에서 어이없게 바라보는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한참 동안 동네를 걸으면서 동생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엄마한테 좀 잘해. 집에서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어. 네가 좀 이해해야지.”     


동생은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본인도 웬만하면 넘어가는데 형도 같이 살아보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할 거라고 대답했다. 나는 동생을 위로하며 모두가 지쳐서 그러니 곧 괜찮아질 거라고 달래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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