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용환 Oct 21. 2023

2. 어머니 직장 동료분이 내게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동생이 문자를 보내왔다. 문자를 확인하니 어머니 친했던 직장동료에게 온 장문의 문자였다. 어머니와 연락이 잘되지 않아 걱정했는데 어렵게 연락이 돼서 만났는데, 엄마가 말하기를 자기는 치매가 아닌데 두 아들놈이 자꾸 치매라며 자기를 이상한 곳에 보내려고 병원에 데리고 다닌다고 했다는 것이다.     

동료분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고 오해도 했는데 어머니와 몇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나니 이상한 부분을 많이 느껴서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엄마 앞에서 대화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치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긴 했었다. 아직 그래도 다 이해하고 알아듣는데 마치 못 듣는 사람처럼 우리는 엄마를 옆에 두고 그런 상처를 주었다. 


문자를 읽고 나는 갑자기 가슴에 찢기듯이 아프고 통증이 느껴졌다.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 동안 주저앉아서 엄마를 떠올렸다.     


'우리한테 엄마는 얼마나 서운했을까?'     


 본인은 아프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 자식들이 미웠을 것이다. 자신을 버린다고 생각하면서 힘들어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한테 표현도 못 했던 엄마를 생각하니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자식들 앞에서 내색하지도 못하고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혼자 불안해하면서 두 아들이 혹시나 버림받을까 봐 밤에 걱정하고 불안해했을 엄마를 떠올리니 눈물이 아스팔트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죄책감에 몇 주를 시달렸다. 그리고 어머니 뇌 MRI 촬영과 추가 치매 검사를 위해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 되었다.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본인이 왜 MRI 촬영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 검사받으러 들어가기 싫어하는 엄마를 겨우 달래 촬영실로 들여보냈다. 나는 밖에서 동생과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요양 병원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을 대비해서 동생과 상의하고 준비해야 했다. 동생은 내가 꺼낸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힘들었다. 앞날을 걱정하기에는 지금이 너무 힘들었다. 무조건 모시겠다는 말은 동생도 나도 쉽게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서 자식새끼 키워 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그 오래된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잃어가는 엄마를 앞에 두고 현실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그런 못난 두 아들이 병실 앞으로 지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치매 진단을 받은 것이 영화 속 좀비로 변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치매라는 그 자체가 우리 형제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서 두려움 그 자체였다. 

차라리 겉모습이 심하게 아파 보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요양 병원이나 요양원을 바로 고려하겠지만, 지금 엄마는 여전히 우리가 사랑하는 엄마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조금 이상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몇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새로운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결과를 보자마자 우리 형제에게 바로 질문을 했다.     


"혹시 가족 중에 치매 환자가 계신가요?"     


전두엽 치매인데 진행 정도나 상태가 연세에 비해 너무 빨라서 가족력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로 대답 못 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명 친가, 외가 쪽 모두 젊은 나이에 아프셨던 분은 분명히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아버지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선생님을 만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가족력을 물어봤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언제나 불편하고 불안했다. 나중에 우리 자녀들이 지금처럼 똑같은 상황을 맞이할까 무섭기도 했다. 지금 여기 내가 아니고 내 딸이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자식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몇 분이 흐른 후….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어서”라고, 말했다.     


그때 조용히 천장만 보던 엄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엄마의 그 한마디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처럼 진료실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자식들에게조차 20년 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선생님은 말을 듣고 사실이냐고 우리를 보며 물었다.     

나는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치매가 엄마의 비밀조차 문을 활짝 열게 만든 것만 같았다. 사실 어머니도 피해자이고 아픔과 상처를 받은 사람이지만, 죄인도 아닌 엄마는 그저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아꼈을 것이었다. 과거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기에. 엄마가 잘 못한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나는 멍하니 엄마를 바라봤다. 잠시 잊고 있던 엄마의 과거가 지금에 이 상황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버림받는 것에 아주 민감했다. 언젠가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반려견 미를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친척 집에 보내야만 했었다. 엄마를 누구보다 따르던 우리 집 막내였다. 미미를 주고 오던 날 엄마는 한없이 울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며칠 동안 계속 울기만 했다. 다른 가족들도 미미에게 정이 많이 들어서 슬펐지만, 그 당시에 어머니가 왜 그렇게 서럽게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쩌면 미미를 보면서 엄마는 자기 어릴 적 모습이 떠올렸던 거 같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치매가 진행되는 지금도 차를 타고 가면 혼잣말로 엄마는 미미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때 차에서 미미를 봤는데 계속 나를 보고 있더라고… 그 슬픈 눈으로 나를 계속 보고 있었어.”


그리고 바로 어릴 때 내 실수로 동생을 잃어버렸던 그날에 대해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했다.      

  내가 9살 때 동생은 4살이었다. 당시 석유 장사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밖에 놀 때 어린 동생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날도 동생은 내 옆에 딱풀처럼 붙어있었다.     

 그날은 동생을 데리고 동네 시장 구경을 갔다. 집 근처 시장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시계방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초등학생이 되면서 갖고 싶은 게 많았던 나는 스포츠 시계를 보고 있었다. 그냥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신상품이 나와서 홀린 듯이 구경하다가 동생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혼자 시계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데리고 들어갔었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그냥 잠시 귀찮았다.     

사장님한테 가격과 성능을 물어보면서 한참 동안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살 돈도 없었지만, 나중에 생일 선물로 사달라고 할 거라고 거짓말 말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정신이 팔려 한참이 흘렀고, 정신 차리고 밖을 보니 동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해서 밖으로 뛰어나왔다. 주변을 뛰고 또 뛰었다. 그리고 찾고 또 찾았다. 그런데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혼자 시장을 뒤지고 다녔다. 결국 수많은 사람 사이에 지쳐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동생이 없어진 것보다 엄마한테 혼날 것이 더 무서웠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동생을 잃어버렸다고 엄마한테 말했다. 놀란 엄마는 시장으로 바로 뛰어갔다.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동생을 봤냐고 물어보고 절규하며 그 넓은 시장을 돌아다녔다. 

온 가족과 이웃들까지 동원해서 찾고 또 찾았지만, 시장 어디에도 동생은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어머니는 시장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에서 눈물이 조용히 흘렀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멀리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주변 사람들이 경찰서를 돌아보자고 어머니를 위로했다.      

우리는 친척 형 차를 타고 동네 파출소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동네 파출소 몇 군데를 가도 동생은 없었다. 엄마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차로 이동하면서 왜 동생을 혼자 두었냐고, 무엇을 했냐고 내게 계속 물었다. 나는 그냥 손을 놓쳤는데 동생이 사라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차마 시계방 앞에 혼자 동생을 두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결국, 실종 신고를 하고 동생 없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가족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부모님은 깊은 밤까지 동생을 찾겠다고 불 꺼진 시장으로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혹시 동생을 영영 보지 못할까봐 무섭고 두려워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렇게 모두가 지쳐서 잠시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바로 조금 멀리 떨어진 경찰서였다. 동생은 관할 구역 밖의 다른 동네 경찰서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황급하게 트럭을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서 동생은 태연하게 초코파이를 먹고 있었다.      


시장에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를 어떤 아저씨가 저녁 늦게 경찰서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4살이라서 주소도 몰랐기에 경찰도 당황했지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아는 것을 적어보라고 했는데 전화번호를 적어서 그 번호로 연락했다고 했다. 다행히도 석유 장사 때문에 동생은 가게 전단지를 연습장 삼아 색칠 공부를 했고 자연스럽게 쉬운 전화번호를 외운 것이었다.     

엄마는 동생을 보자마자 포옹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 엄마는 두려워서 미칠 정도까지 갔었다. 자식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리고 누군가를 버린다는 것은 엄마의 과거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바로 가난해서 할머니가 엄마를 보육원에 두고 떠났던 것.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고아로 알고 외롭게 자랐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가 우리 자식들에게 비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엄마에게는 이모도 있고, 친척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성인이 돼서 할머니가 다시 찾아왔고 그렇게 엄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힘들게 홀로 지낸 시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엄마는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너무도 싶게 자신은 고아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친척들이 있음에도 자신은 혼자 컸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마가 혼자 외롭게 보육원에서 자란 것은 사실이기에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엄마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이고 엄마의 과거였다. 차라리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 힘들었던 시절의 기억부터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픈 기억이 사라지면 엄마의 행복한 기억만 남아서 더 웃을 수 있도록.     

이전 01화 1. 아빠가 떠나고 혼자가 돼서 우울해서 그럴 거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