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께 많은 조언을 들었다. 간암부터 위암까지 간병을 해봐서 암은 익숙했지만, 치매는 난감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주변 지인 중 환자라도 봤더라면 조금 덜 놀랐을 텐데 우리 형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있었지만 사실 불안했다.
“어머니가 아직 너무 많이 젊으신데 그래서 더 빠르게 진행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분명 유전적인 부분도 원인 중 하나일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모든 촬영과 인지 검사 후 엄마는 ‘중증 전두측두엽 치매’ 진단을 받았다.
10만 명당 3명~15명 정도의 유병률을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 운도 없고 불쌍한 사람은 엄마였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MRI 사진을 보여줬다.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는 우리가 봐도 검은 부분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멀쩡한 다른 쪽 뇌와 비교하니 더 말할 것도 없는 환자의 뇌 그 자체였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 건 바로 엄마의 뇌 사진이었다. 그리고 다른 부위에도 미세한 출혈 흔적이 있다고 설명해 줬다.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뇌는 이미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
동생은 냉정함을 찾고 지금까지 나타난 증상들에 대해 세부적으로 선생님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냉정해져야만 했다. 그래야 엄마를 잘 보살피고 대비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 형제의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어머니한테 무엇을 기대하면 절대로 안 돼요. 그리고 절대 화도 내지 말고요.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지 못 하실 거예요. 하지만 감정을 느끼는 부분은 아직 살아 있어서 자식들이 화내거나 힘들어하면 그 모습을 보고 증상이 더 빨리 악화할 수 있어요. 그냥 정말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옆에서 봐주세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엄마의 치매는 인격 변화와 언어 기능 저하가 두드러지는 게 특징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억력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오래 유지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은 우리 형제에게 희소식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우리가 엄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을 말을 듣고 동생은 계속 침묵했다. 이렇게 아픈지도 모르고 잔소리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내가 결혼하고 엄마와 단둘이 살았고, 그동안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화낼 일이 많았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엄마한테 딸 같은 자식은 동생이었다. 애교도 부리고 투정도 부리면서 엄마를 웃게 하고 나보다 스킨십도 더 잘했다. 엄마는 그래서 딸 있는 집이 절대 부럽지 않다고 자기는 아들 둘이라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자책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간호할 때 내가 했던 행동 때문에 돌아가시고도 오랜 시간 괴로워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한동안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돌아가시고 시간이 흘러가면 그 고통은 더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결국 자비로 책까지 출판해서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그 무한의 고통을 동생이 느끼고 있는 걸 보니 안타까웠다. 그 고통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리고 스스로 극복하는 것 말고는 어떤 조언이나 위로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선생님은 세부적인 검사를 받는 것을 권했다. 그리고 진단서에 중증 치매라고 기록했다. 위암도 모자라서 치매까지 얻은 엄마지만 엄마는 오히려 별로 걱정이 없어 보였다. 오직 드라마와 영화만 찾고 보고 싶어 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더 가슴이 무너졌다. 차라리 어머니가 울면서 억울하다고 소리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 두 아들에게 돈 달라는 차라리 소리치면 없는 돈을 빚을 져서라도 드렸을 텐데 엄마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제 고생하고 자식들 호강 받으며 손녀 재롱을 보면서 곱게 늙어 갈 줄 알았는데. 엄마의 인생 팔자는 사나웠다. 마치 파도처럼 잔잔할 것 같으면 다시 높아져서 방파제에 부딪히고 아파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엄마가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는 엄마가 아닌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상담을 마치고 진료실을 나설 때 선생님이 우리 형제를 조용히 불렀다. 앞으로 진행 속도가 상당히 빨라질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위로했다. 특히, 장기 요양 인정 신청을 빨리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어머니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으면 우발 상황이 걱정되니 주변에 도움을 청하라고 약간 차갑지만 그래도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손을 잡고 병원을 나오는데 엄마 또래의 어머니들이 눈에 보였다. 병원은 다니시지만 정신은 모두 건강해 보였다. 이제까지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듯이 여행도 다니고, 제2의 인생을 보내는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길이라도 잃어버릴까봐 무서워서 마디마디 구부러진 그 작은 손으로 두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 작은 손을 잡고 나는 생각했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에 세상이 야속했다.
엄마 치매 진단을 받고 많은 걱정이 몰려왔다.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엄마를 옆에서 보살필 여건도 안 됐다. 병원을 다녀와서 동생과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다. 형이지만 지방에서 일하는 것 때문에 동생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고 지금도 많이 지쳐 보였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고단한 원무과 생활에 매번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느라 전반기 휴가까지 모두 사용한 상태였다. 그저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내가 일하면서 아빠를 전담해서 간호할 때 내 모습처럼 위태롭고 연약해 보였다.
우리는 일단 냉정해지기로 했다.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사고에 관해 이야기했다.
'홀로 집 밖을 나갔다가 혹시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가스 불을 끄지 않아서 불이 나지 않을까?'
'사람들이 엄마의 증세를 모르니 밖에서 큰 싸움이나 곤경에 처하지 않을까?'
이런 사소한 걱정으로 시작한 대화는 우리를 점점 무겁게 만들었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막상 이렇게 큰일이 생길 때 의지하고 도움을 받을 곳은 없었다. 친척이나 친한 지인이나 어머니 친구분들도 걱정은 많이 해줬지만 남은 결국 남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의지한다면 우리가 전부였다. 한편으로는 나는 동생이 있어서 너무 든든했다. 만약 이런 상황에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했다면, 나는 주저앉았을 것이다. 결혼했지만 아내는 파란 눈의 외국인이고 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공감해 주지 않았다. 역시나 혼자 감당했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동생에게 고마웠다.
동생과 한참 동안 여러 대안을 생각했다. 우선 주간 돌봄 센터나 요양보호사를 부르려고 알아봤지만, 요양 등급이 없어서 불가능했다. 그래서 해당 지역 구청에 심사신청을 했다. 하지만 절차대로 진행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지금 텔레비전을 보는 것 말고는 큰 행동이 없기에 다행이지만,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옆에서 항상 지켜볼 수 없기에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이미 엄마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고 거는 것에 대한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동생이나 내가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핸드폰은 마치 딸아이 장난감처럼 집안 구석에 장식품이 된 지 오래되었다.
동생과 한 없이 이야기하다가 어머니의 주요 동선에 CCTV를 설치하면 어떨지 생각했다. 동시에 떠오른 좋은 아이디어였다. 물론 내가 지방에 있고, 동생이 일을 하지만 적어도 엄마가 집에 있는지, 없지는 바로 확인이 가능했다. 그 정도 확인할 수 있어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바로 동생과 대형 마트로 향했다. 그리고 어머니 방과 거실에 홈 카메라를 설치했다. 설명서를 보니 어렵지 않았다. 모든 설치를 마치고 앱을 설치하고 스마트폰과 연동시켰다.
단돈 몇만 원에 이렇게 셀프 설치로 누군가를 확인할 수 있는 요즘 세상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괜히 잡스 형님이 고맙기까지 했다. 만약 스마트폰이 없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페어링을 마치고 나니 동생과 내 스마트폰에 실시간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나는 소리까지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혹시 밖을 나가면 화면을 볼 수 없을까 봐 한 명씩 나가서 작동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이런 목적으로 CCTV를 설치한 것이 가슴 아프고 힘들었지만, 이게 우리 형제가 할 수 있는 지금의 최선이었다. 이보다 최선은 찾을 수 없었다.
모든 설치를 맞추고 출근하기 위해 다시 지방으로 내려왔다. 누구도 내 심정을 묻지 않았고 나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일터에서 하던 대로 바쁘게 일을 처리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치매로 아픈 엄마는 여전히 집에 있고, 동생은 나처럼 정신없이 일터에서 일하고 우리는 다시 각자 위치에 돌아왔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이제는 실시간으로 엄마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틈만 나면 나는 앱을 열고 엄마를 지켜봤다.
혼자 웃는 모습, TV를 보다가 지쳐서 잠자는 모습, 가끔 뭐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동생이 오기 전까지 엄마는 하루 종일 거실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항상 거실 소파 앞에 그 자리에 있었다. 가끔 화면을 보다가 엄마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 오디오를 연결해서 듣곤 했다.
무슨 이런 불쌍한 인생이 있을까? 우울해지다가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마치 물속에 오리처럼 처량했다. 물 위에 사람들은 우리가 발버둥 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나와 동생은 어머니를 감시하기로 아니 보호하기로 했다. 요즘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카메라지만, 그 작은 렌즈로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는 엄마를 볼 수 있어서 오늘도 행복하고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