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이 사는 이야기
엄마가 치매 진단을 받고 우리 형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냥 조금 달라진 것뿐이라고 서로 위안했다. 큰 병이나 죽을병에 걸린 것이 아니고 조금 엄마가 변하는 것뿐이라고 마음을 추슬렀다.
이기적이지만 나는 자주 보지 못하는 상황을 위안으로 삼았다. 겉모습은 똑같아도 엄마의 변한 행동들은 무엇으로 설명하고 표현하기 어렵고 지켜보기 힘들었다. 엄마는 대충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도 사람을 알아보고 질문하면 대답은 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달라진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엄마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해서 반복하고 무언가 해야겠다는 욕구는 모두 사라졌고, 음식을 먹을 때 자제하지 못하고 날 것도 손으로 집어 먹거나, 뜨거운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가져댔다. 말하고 있는 도중에 전화를 끊고, 그 맛있게 잘하던 요리도 모두 까먹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깨끗했던 집은 언제나 더러웠다. 그리고 씻는 것도 종종 까먹어서 머리카락은 기름이 흐르고 입에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바로 엄마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형제는 천천히 새롭게 다시 태어난 엄마에 대해 적응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과제를 하듯이 밀린 연구하고 관찰하고 새롭게 추억의 페이지를 열어서 기억을 남겼다. 지금의 기억도 나중에 그리워질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꼼꼼히 기록하고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병원도 모시고 갈 겸 서울 집에 갔을 때, 짐으로 가득 차서 발 둘 곳도 없는 엄마 방을 치우기로 결심했다. 이사도 계획하고 있었기에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동생과 나는 눈에 보이는 불필요한 물건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치매가 심해지고 버리는 것에 민감해진 엄마는 가끔 밖에서 남들이 버린 물건까지 주워서 방에 뒀다. 방은 정말 물건으로 가득했다. 서로 청소하던 중 구석에 있는 오래된 밥통을 열어본 동생은 비명을 질렀다. 무엇인지 몰라도 안에는 움직이는 징그러운 것들이 악취와 함께 한가득 있었다. 이렇게 무엇하나 여는 것도 마음 졸이며 하나씩 버릴 것을 거실로 모았다.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는데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점심을 먹고 기운 내서 옷장과 서랍 정리를 시작했다. 서랍장 한쪽에는 엄마가 항상 적던 가계부와 고지서들과 있었다.
2019년 1월 이후로 모든 정리와 기록은 멈춰있었다. 항상 달력과 가계부에 지출을 내역을 꼬박꼬박 기록했던 엄마였다. 지금 와서 보면 엄마의 치매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진행된 것이 분명했다.
서랍장 정리는 마치고 옷장에 옷을 하나씩 추리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는 횟수도 적어지고 더워진 것에 대해서 인지가 없어져서 그렇게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쁘고 좋은 것들만 남기고 모두 버리기로 했다. 큰 서랍장을 하나씩 비우면서 왠지 모를 감정들이 몰려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방을 정리하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많은 물건을 버렸는데 달라진 것은 그때는 엄마와 함께 아빠 물건을 버렸다는 것이고 지금은 살아계신 엄마 물건을 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랍장 중 맨 위쪽에는 각종 추억이 담긴 사진과 물건들이 가득했다. 앨범에 들어가지 못한 우리 형제들의 아기 때 사진과, 비싸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에 받은 것 같은 선물들이 있었다.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잘 정리해서 한 곳에 담아두기로 했다. 작은 박스를 열 때마다 지나온 엄마의 인생을 읽을 수 있었다.
슬픔, 고통, 인내, 행복, 추억,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물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란색 서류 봉투 하나에는 편지들만 있었다.
대부분 나와 동생이 엄마에게 쓴 편지들이었다. 군대 입대 후 쓴 편지부터 중간중간 사고 치거나 미안했을 때 엄마에게 쓴 손 편지였다. 엄마는 노란 봉투 속에 그런 것들을 모아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참 나는 동생과 편지들을 다시 읽으면서 지나온 추억을 떠올렸다.
건강했던 그 시절, 꿈 많았던 그 시절, 힘들었지만 희망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
지금보다 가난하고 희망 없어 보였지만 모두가 건강했고 앞으로 행복할 거라고 서로 응원했던 그 예전을 보니 씁쓸했다.
그러던 중 그 틈에서 엄마가 엄마에게 쓴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글을 읽은 나는 눈이 바로 촉촉해졌다. 엄마가 자신에게 글을 남기던 그때의 심정을 떠올려 보았다.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식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 자식 눈에서 눈물 흐르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 글자는 엄마의 진심이고 엄마의 사랑이었다.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서 쓴 그 애절함이 나를 무너트렸다.
언제 저 글을 썼을까? 생각하니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깊게 남아 있던 그날이 엄마에게는 더 고통스러웠던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 기억이 강렬하지 않았다면 아빠를 생각하며 쓴 보잘것없는 사람 첫 시점도 그날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렵게 결정해서 모든 걸 걸고 영국으로 유학 간 나를 한국으로 불러 들어야 했던 엄마의 미안한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마는 아빠의 잘못을 막지 못한 것을 본인의 실수라고 말하며 자녀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이혼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울던 내게 죄를 지은 것 같은 죄책감으로 글을 남겼다.
방 한쪽에서 작은 책상에 앉아 홀로 메모장에 글을 남겼던 그 순간 엄마는 분명 홀로 울고 있었을 것이다.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심정이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있었다. 결국 내가 엄마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부담감이 지금의 치매를 불러온 것만 같아서 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예전처럼 엄마랑 밤새도록 수다를 떨 수만 있다면.
아빠 걱정, 동생 걱정으로 수도 없는 고민을 말하던 엄마의 그 말을 다시 들어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는 내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든든한 조력자였다. 내가 잘못된 길로 잠시 빠져도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지지했다. 잠시 방황해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나를 기다려 줬다.
엄마가 바랐던 것처럼 내가 우리 가족들에게 웃음과 행복이 끊임없이 넘쳐나도록 노력하겠다고 비록 치매로 아픈 엄마가 되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틈나는 대로 서울 집에 올라오는 횟수를 늘렸다. 서울에 볼일이 있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 집을 정리하다 보니 일이 끝나지 않아서 동생과 함께 시간을 맞춰서 정리하고 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치매 이후 멈춰버린 시간 속에 사는 엄마의 모든 것을 정리할 때마다 언제부터 이렇게 아프게 됐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었다.
가슴 아픈 것은 대략 2019년부터 치매 초기증상이 시작된 것 같은 흔적들이었다. 그때 나는 일하는 것이 바빠 서울 올라오기도 힘들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어머니를 보러 올라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를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울 오기 며칠 전 동생은 이번에는 엄마의 보물 상자인 김치냉장고를 정리하자고 하였다. 동생이 가끔 열어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그 속에 있다며 혹시 썩거나 버릴 것이 많을지도 모른다면서 두려워했다.
저녁에 퇴근하는 동생을 배웅하고 같이 밖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화를 시킬 겸 고무장갑을 끼고 오래된 김치냉장고 문을 열었다.
알 수 없는 검은색 봉투들이 위에 쌓여있었다.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마른 버섯, 마른 호박, 마른 무,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이 그 속에 들어있었다. 생각보다 괜찮다면서 웃으면서 그것들을 봉투에 담고 나니 저 밑에 나란히 놓여있는 김치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길했다.
최소 3년은 넘게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았는데 과연 저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동생은 썩은 김치가 있을 거라면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통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것이 분명 무거운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서 가서 열자고 했다.
큰 김치통은 총 7개가 있었다. 상했을까 봐 큰마음을 먹고 뚜껑을 열었는데 김치냉장고에 김치는 없었다.
그 대신 오이장아찌와 고추장아찌만 가득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정말 좋아했던 반찬들이었다. 아버지는 유독 짠지와 간장에 절인 무랑 고추를 좋아했다. 가난한 시절 배고픔을 달래주던 '추억의 밥도둑'이었다. 할머니가 간장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서 어릴 적 맨날 먹었다고 하면서 살아계실 때 늘 밥상에서 그 말을 하곤 했다.
먹을 게 없는 시절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엄마가 신경 써서 다른 반찬을 정성스럽게 만들어도 아빠는 오이장아찌에 밥 한 공기를 뚝딱 먹곤 하셨다.
처음부터 엄마의 장아찌를 아빠가 맛있어하고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해주던 그 맛이 아니라면서 힘들게 만든 엄마한테 반찬 투정을 하곤 했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장아찌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아빠한테 합격 점수를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엄마는 할머니의 오래된 레시피를 찾아냈다. 사실 우리 가족 중에 아버지를 제외하고 그 반찬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동생도 엄마도 우리는 육식과 면을 더 좋아했다. 오로지 못난 아빠를 위한 반찬이었다.
눈앞에 장아찌들을 보다 보니 반창고로 엄마가 적어둔 글씨가 보였다.
'2017년 2월 만듦', '2018년 5월 만듦' , '2018년 11월 만듦'
그 짠지와 짠 무, 그리고 절인 고추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마가 혼자 만든 것이었다. 아빠를 보내고 홀로 아빠를 떠올리며 아무도 먹지도 찾지도 않을 반찬을 만든 것이었다.
그토록 속이 다 타게 고생만 시켰던 아빠인데 엄마는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30년 세월 동안 매일 얼굴 보며 살았던 시간 속에 미움이라는 감정도, 철없는 아버지의 행동도, 모두 사랑으로 변해서 치유되고 용서가 되었던 것이 분명했다.
분명 만들어도 아무도 먹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을 텐데. 그런데도 손길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아 아버지와 보내왔던 시간을 냉장고 속에 꼭꼭 숨겨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오랫동안 맛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이제 다 커서 밖으로 싸돌아 다니고, 한 집안에 가장이 되어 버린 두 아들에게 사고만 친 아빠가 그립다고 말할 수 없어서 그래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그리움과 공허함은 그리고 먼저 떠난 아빠를 엄마는 보고 싶어 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장아찌를 앞에 두고 한참 동안 버리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음식이 아닌 엄마의 추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집어서 한 입 먹어보았다.
어머니의 바로 그 맛이었다. 그 아버지가 콧노래를 부르며 맛있다고 칭찬했던 그 맛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본인에게 치매가 오고 있다는 것을 더 빨리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한테 인정받았던 그 시절이 잊히기 전에 다시 가슴에 새겨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난했지만, 조금은 불안했지만 그래도 우리 네 식구가 온전하게 존재했던 그 시절이 미친 듯이 그리웠다. 지금은 마치 장아찌처럼 검은 봉투에 담겨 어디론가 버려진 거 같았지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나와 동생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엄마가 숨겨둔 보물을 비닐에 담아 버렸다. 김치냉장고 속에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장아찌처럼 아빠를 잃고 홀로 외로워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우리는 그날 저녁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