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이 사는 이야기
육아휴직 동안 서울 집에 올라오는 횟수가 늘어났다. 치매 진단이 확정되고 친한 친구분들께 연락드리고 어머니 소식을 전했다. 소식을 듣고 반응은 예측과 같았다. 안타까워하면서 말을 멈추고 믿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고, 가까이 사는 친구분들은 엄마를 보러 집에 오셨다. 그때까지는 모두 연락드렸다고 생각했었다. 놓친 분 없이 모두 연락했고 소식을 전했다고 말이다. 정말 소중한 분을 놓쳤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늦은 저녁에 모르는 번호로 자기한테 연락이 와서, 횡설수설하면서 술에 취해서 엄마는 괜찮냐고 울면서 전화했다고 했다. 동생은 그분이 너무 울고 있어서 도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이름이라도 기억하냐고 물었다. 동생은 기억을 더듬어 00이라고 들은 거 같다고 말했다. 순간 엄마와 예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시설에서 나와서 일본 자수 배우는 곳에서 만난 친구 중 이 친구가 가장 친했고 엄마에게 정말 마음을 써주며 잘해줬다고 했었다.
‘아…. 맞다. 엄마가 옛날에 말했던 그 친한 친구이구나.’
죄송스러웠다. 다른 친구분들을 통해 전해 들은 것이 분명했다. 서운했을 것이고 놀라셨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해서 내 이름을 말하니 바로 이모는 흐느끼며 "어떡하냐고….“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슬픈 심정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나까지 슬프기 싫어 억지로 밝은 목소리 톤으로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이모는 괜찮다면서 본인이 엄마를 보러 가고 싶은데, 일하는 것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 힘들다면서 대신 이모 집에 엄마가 올 수만 있으면 하룻밤 엄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마침 서울 올라갈 일정이 있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겠다고 말하니 이모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계속 말씀하셨다.
며칠 지나서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이모 집에 갈 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이모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 기분 좋아했다. 이것저것을 챙겨서 출발했다. 뒷자리에서 엄마는 친구 이름을 부르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00은 나한테 참 잘했는데, 옛날에 나한테 옷도 사주고 결혼하기 전에 같이 여행도 많이 가고 했는데. 근데 난 걔 남편이 싫더라. 우리 00 고생만 시키고…."
마음속에 숨겨둔 진심들이었다. 이제는 속마음은 더 이상 속마음이 아니었다. 이모 앞에서 그런 말을 할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올림픽대로는 친구를 보고 싶은 엄마 마음도 모르고, 끝도 없이 막히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움직이지도 않고 멈춰있으니, 엄마는 답답해하며 언제 도착하냐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금방 간다고 엄마한테 거짓을 하며 2시간 넘게 운전해서 겨우 이모 집에 도착했다. 이모는 집 앞에 나와서 엄마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모는 엄마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포옹했다. 엄마 이름을 계속 부르며 왜 이런 일이 너한테 생기는 거냐고 절규했다. 고생만 하면서 살았는데 왜 이런 꼴이 되었냐고 하늘을 원망했다. 이모가 받은 충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모처럼 울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더 단단해져야 했다. 처음에 치매 증상이 점점 나타나면서 동생과 이야기할 때는 우리는 종종 말없이 울었다. 언제나 눈물은 예고 없이 두 뺨을 스치고 내려갔다. 하지만 우리가 운다고 달라질 것은 없기에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알기에 눈물은 삼켰다.
하지만 이모는 달랐다. 정말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변해버린 친구의 모습에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본인이 더 여유 있게 살았으면 얼굴도 자주 봤을 텐데…. 라고 후회의 말을 끝도 없이 반복하며 엄마 뺨을 만지고 또 만졌다.
골목에서 한참 동안 재회의 시간을 가진 후 이모는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먹고 가라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모가 사는 집은 오래된 반지하 빌라였다.
나는 세상이 순간 미워졌다. 왜 이토록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 걸까?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뿐인데 왜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모의 표정은 너무도 밝았다. 누군가 비교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행복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앉아서 차를 마시는 동안 이모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마땅히 드릴 것이 없어서 내 책을 선물로 드렸다. 이모는 엄마랑 가고 싶은 곳들을 정했다고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영화도 보고, 카페도 가고, 엄마가 좋아했다던 남한산성도 갈 거라고 했다.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 형제들도 버겁고 힘들어서 어느 순간 포기했던 단순한 외출이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이모한테 엄마랑 어디 다니기 조금 많이 힘들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모는 단호했다.
"괜찮아, 다 잘할 수 있을 거야,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야. 걱정하지 말고 그동안 너무 힘들었을 텐데 동생이랑 편하게 하룻밤이라도 시간 보내."
이모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서 나는 사랑을 느꼈다. 엄마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위로를 전하는 듯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리웠던 엄마의 사랑이 떠올랐다. 언제나 본인보다 자식들을 위해 서운한 감정도 숨기고, 힘들어도 참고, 줄 것이 없으면 마음이라도 주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던 그 사랑이었다.
나는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 이모 집을 나섰다. 엄마는 맑은 미소로 나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집으로 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내면의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고만 치던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어서 어머니의 위암 소식은 우리 형제들 가슴에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을 냈다. 힘들게 5년이라는 시간을 넘겼다. 전이 없는 완치를 응원하며 제2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엄마의 삶을 기대했다. 그런데 5년 후 완치가 아닌 중증 치매 진단을 받았다.
마치 저주받아서 고통의 물레방아 위에 끝도 없이 올라선 느낌이었다. 옆에서 그 변해가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은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차라리 조금 늦게 찾아왔더라면 원 없이 효도라도 했더라면 적어도 후회가 덜 되었을 텐데. 무엇이 그리 급해서 엄마를 삶을 빼앗아 가는지 묻고 싶었다.
잡념과 운전대를 잡고 겨우 집에 도착하니 이모에게 카톡이 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 사진들이었다. 살면서 웃는 날보다 슬픈 날이 많았던 엄마에게 지금 이렇게라도 웃을 수 있다는 것에 잠시 위안을 삼았다.
이모에게 고맙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동생과 밖으로 나가 저녁을 먹었다. 동생은 이모 전화를 받은 첫날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얼마나 엄마를 아끼는지 전화기 너머로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고 했다. 동생 말을 들으며 그래도 엄마 인생에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으니, 엄마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동생과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엄마를 돌본다고 해도 자식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이기적이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친구들, 좋아하는 색깔, 좋고 싶은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는데 자식이라는 우리는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꿈을 가지고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어떤 것을 할 때 가장 행복했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받기만 하느라고 사랑한다고 말만 하고 시간이 영원히 존재할 거라고 착각하며 엄마한테 소홀하게 했던 그 모든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분명 엄마도 꿈 많던 젊은 시절이 있었을 텐데 우리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면서 모든 걸 희생한 대가는 초라했다.
이제는 물어보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이 아닌 나중에 그 언젠가 나중에 다시 엄마를 만나면 그때는 꼭 물어볼 거라고 다짐했다. 그때는 꼭 꿈 많았던 그 소녀를 지켜주고 간직해 주겠다고 조용히 속으로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얼마 후 5월이 되었다. 5월은 특별했다. 이유는 엄마 생일은 음력 4월이고 내 생일은 양력 5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에 엄마랑 내 생일 파티를 하곤 했다. 올해는 3일 차이가 났다. 동생은 최근 들어 휴대전화로 손녀딸 동영상만 무한반복으로 보는 엄마가 안타까워 생일도 축하할 겸 4시간 운전해서 우리 집에 왔다.
올해로 63세가 되는 엄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라고 외치며 한걸음에 달려오는 내 딸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제 제법 커서 애교를 부리는 딸이었다. 마음 한구석은 슬펐지만 그래도 아직 손녀딸을 기억하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치매 때문에 딸과 놀 때 코드가 더 잘 맞는 듯했다. 할머니가 아프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딸은 엄마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그동안 자신이 그렸던 그림과 장난감을 자랑하듯이 보여줬다. 엄마는 그저 웃기만 했다. 딸의 순수함과 엄마의 깨끗함이 온 집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며,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어떤 음식을 만들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제대로 된 집밥을 몇 년째 먹지 못하고 일하는 안타까운 동생 놈과 치매가 심해지면서 편식이 심해진 엄마를 위한 메뉴 선정은 어려웠다. 게다가 입맛이 까다로운 딸도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엄마가 내려오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주방에서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어서 식탁에 음식을 차렸다.
갈비찜과 미역국 그리고 계란찜, 김치 볶음을 만들어서 한 상을 차리고 식탁에 다 같이 앉았다. 음식을 보자 엄마는 바로 한마디를 던졌다.
"누구 생일이야? 왜? 미역국이야? 나 미역국 싫은데…."
주방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동생이 곧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엄마하고 형 생일이잖아, 기억나지?"라고 물었다.
21살부터 밖에 나와서 살았던 내게 생일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음식은 잘 챙겨 먹냐고 가난해서 밖에서 사는 아들에게 미안함을 대신해서 안부를 묻곤 했다. 비싼 선물을 주고받는 그런 형편도 아니고, 군인이라 항상 바빴다. 생일날 집에 못 가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엄마는 언제나 내 생일을 기억해 줬다.
하지만 이제 엄마는 큰아들 생일을 잊어버렸다. 본인 생일도 기억에서 같이 지워버렸다. 아이처럼 축하받고 싶어서 서운한 게 아니었다. 그냥 무엇인가 중요한 것들이 엄마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게 화가 났다.
하지만 우리는 태연하게 식탁에 앉아 아무 일 없다는 듯 식사를 마치고 케이크를 올렸다. 가장 신이 난 사람은 바로 딸이었다. 촛불을 끄고 싶어서 엉덩이를 좌우로 계속 움직였다. 그리고 생일 축하 노래를 다 같이 불렀다. 그리고 왜 촛불이 끄는지도 모르는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딸아이는 함께 촛불을 껐다.
나는 조용히 이 시간을 감미했다. 입안에 재료를 하나씩 혀끝에 올리고 눈을 감고 하나씩 씹었다. 향기가 퍼지는 것을 느끼며 이 행복한 시간을 오감으로 느끼고 기억하고 싶었다. 지금, 이 모습이라면 괜찮다고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면서 한 편으로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엄마가 아파도 지금처럼 앞에 같이 앉아 있게 조금만 더 허락해 달라고 같이 간절히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신을 향해 속삭였다.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앞으로 2년 안에 모든 인지기능을 포함해서 거동하는 것까지 힘들어질 확률이 매우 높다고 그러니 행복한 기억을 많이 만들라고. 결국 시한부 인생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모든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웃을 일 별로 없는 힘든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태어나 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우리들의 엄마가 되어줘서 우리는 너무 행복했고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