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이 사는 이야기
생일 축하를 마치고 서울로 가기 전 딸아이가 졸라서 다 같이 동네 키즈카페로 향했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보다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다 외동으로 항상 외롭게 지내는 딸에게 할머니와 삼촌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었다. 카페 도착하고 딸은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놀기 시작했다. 역시나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엄마를 자신이 가는 곳마다 이곳저곳 끌고 다녔다.
치매 증상이 악화하면서 엄마는 손녀딸에 대해 집착이 더 심해져 갔다. 서울 집에 있으면 손녀딸 이름을 부르면 핸드폰 사진을 바라보고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엄마였다. 그래서 엄마에게 어쩌면 이 시간이 가장 큰 생일 선물인 것 같다고 동생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2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딸도 엄마도 지쳤는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간이 종료되고 나는 동생에서 천천히 엄마를 모시고 먼저 차에 가 있으라고 했다. 아내와 딸도 보내고 마지막으로 계산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엄마는 신음을 내며 주차장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내는 딸아이를 데리고 그냥 걸어서 가겠다고 나를 보자마자 황급히 떠났다. 동생은 화가 난 표정으로 어머니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뭐 하는 거냐고 고함을 치며 무슨 일이냐고 동생에게 다그쳤다.
"엄마가 뛰지 말라니까 말 안 듣고 뛰다가 주차장 바닥의 돌에 걸려 넘어졌어."
동생은 분노하고 있었다. 안에서 밖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다친 엄마를 보고 속상해서 그런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를 바닥에 저렇게 두는 것은 옳지 않았다. 동생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우선 엄마를 같이 부축하자고 했다. 엄마를 일으켜 세우는데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어깨가 아프다고 아기처럼 말했다. 그냥 넘어진 게 아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른쪽 어깨는 건들지 않아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엄마는 신음 소리를 냈다. 결국 나는 엄마를 부축하고 동생에게 한마디 했다.
"넌 엄마가 다쳤는데 뭐 하는 짓거리냐?"
동생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형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엄마 모시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동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동생은 내게 엄마를 모시고 지금 당장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화가 난 동생을 나는 설득했다. 지금 엄마 몸 상태도 잘 모르는데 4시간 동안 운전해서 서울로 가는 건 위험할지 모르니 일단 동네 큰 병원에 가자고 했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 응급실에서 우리는 상황을 말했다. 그리고 바로 엑스레이와 간단한 진료를 봤다. 엄마는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의사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더니 엄마 어깨뼈가 골절됐다고 했다. 그냥 넘어진 줄 알았는데 엄마의 몸은 종이처럼 약해져 있었다. 아파하는 엄마를 앞에 두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두통이 몰려왔다. 만약 수술하게 될 경우도 고려해야 했고, 장기 요양 등급이 현재 인지 등급이라서 무엇인가 조치를 받는 데 제한사항 너무 많았다. 우선 여기서 입원하는 건 맞지 않아서 진통제를 맞고 어깨 보호대를 한 후 병원을 나섰다.
의사는 수술 여부 확인을 위해 바로 정밀검사를 권유했지만, 연고가 있는 서울에 다니던 병원에 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 모든 상황은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 한 명만 입장이 가능해서 동생은 모르고 있었다.
보호대를 하고 엄마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오자, 동생은 뛰어왔다.
"엄마 어깨뼈가 골절됐단다."
말을 듣고 동생은 자신을 자책하며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린아이 돌보듯 옆에 부축해서 주차장으로 갔다며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라고 후회하고 있었다. 아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빠르게 엄마와 동생의 짐을 챙겨서 나는 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동생은 미안해서인지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형이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어떻게든 해결책을 생각할 테니 조심히
운전하고."
동생은 알겠다고 짧게 대답하고 떠났다. 난 홀로 주차장에 서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같이 따라가고 싶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현실이라는 핑계를 방패 삼아.
엄마의 치매는 멀쩡한 척 보이는 우리 형제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부모에 대한 도리는 남들이 보지 않아도 우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환자의 보호자들이 받는 심리적인 충격과 스트레스의 관리도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지쳐서 서로 싸우고 분열되어 버리면 엄마는 홀로 남게 될 것이 뻔했다. 혼자 단지 주변을 서성이면서 엄마가 수술이나 추가적인 골절로 입원하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엄마의 상태로 여러 환자분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식탐도 늘어났고, 가끔 욕설과 폭력적인 행동도 나타났다. 우리는 가족이라 웃어넘기지만, 다른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은 그저 희망 사항이었다. 결국 엄마는 어깨뼈 골절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동생 일하는 병원이 재활의학을 전문으로 하고 입원실이 있어서 입원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감수하고 동생을 봐서 원장 선생님은 고민하지 말고 입원하라고 다른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격려해 주셨다. 엄마는 수술이 불가능하여 장기간 입원을 하며 상태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나는 안도했다. 적어도 동생이 매일 출근하는 병원에 입원하니 엄마를 매일 볼 수 있고, 다른 분들께 피해를 준다고 해도 바로 대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호의지만 그래도 직장 신세를 지는 것에 동생이 눈칫밥을 먹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 우리 상황에 이보다 최선은 없었다.
이렇게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얼마 지나서 나는 동생과 중대한 결정을 실천으로 옮기기로 했다. 바로 이사였다. 지금까지 살고 있던 엄마 집을 처분하고 조금 한적한 곳으로 이사하기 위해 부동산에 물건을 내놓았다. 많이 망설였다. 이유는 집을 사는데 내가 많은 돈을 줬다고 해도 그 집은 엄마 인생에 첫 번째 내 집이었다. 이사하고 지금까지 모든 물건 하나하나에 엄마 손길이 묻어 있는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공간이었다.
50세가 넘도록 자기 집 하나 없이 남의 집에서 서럽게 살았다. 비록 자식들에게 손 벌려서 어렵게 산 신축 빌라였지만, 그 집은 어머니의 전부였다. 아직도 이사하고 엄마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거실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 전 식탁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던 엄마의 모습은 어제의 모습처럼 선명했다. 가난한 아빠를 만나서 자신이 모은 돈으로 반지하 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형편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노력했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내가 5살이 되던 해 우리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물론 거기도 단칸방이었다. 동생은 그렇게 지상에서 태어났고, 난 지하에서 태어났다. 그 후로 부모님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아니 자식들에게 방 한 칸이라도 주기 위해 몇 년을 고생했다.
그렇게 방 두 개 오래된 빌라 전세를 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엄마는 밤새도록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자퇴 후 돈을 벌러 밖으로 나갔다. 그럼에도 가장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형편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고 우리는 더 이상 이사 가지 못했다. 결국 전세 보증금을 올리지 못해서 월세로 전환해서 오래된 빨간 벽돌집에 계속 살아야 했다. 그러다 끈질긴 내 설득에 무리해서 지금의 신축 빌라를 산 것이었다. 명의는 엄마 이름으로 했다. 아빠는 서운해했지만, 당시 아빠의 자리는 우리 집에 없었다. 일은 하고 계셨지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못했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아빠는 적은 월급은 공중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몇 년 뒤 치매는 모든 상황을 다르게 만들었다. 이사를 고려한 이유는 우선 증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 빨리 적응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변두리 서울 빌라촌인 지금 동네는 차도 많이 다니고 언제나 복잡했다. 혹시나 길을 잃어버리거나, 사고라도 날까 봐 항상 불안했던 우리 형제였다. 무엇보다 현재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동생이 이사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미신일지 몰라도 신축이지만 저렴했던 그 빌라는 사방이 막혀있었다. 이상하게 집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서 빛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신축이고 엄마가 좋아해서 살았지만 이후 우리 가족들에게 좋지 않은 일만 벌어졌다. 이사하고 몇 년 후 아빠의 도박으로 생긴 작은 빚들이 연체되어 엄청난 이자가 붙어서 우리에게 돌아왔다. 나는 직업군인을 전역하고 새 출발을 하려고 준비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문제를 수습해야 했다. 빌라를 팔아서 갚으면 되었지만 그렇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개인회생과 일부 금액을 갚는 것으로 어렵게 아빠 사고를 수습했다.
그렇게 모든 게 좋아지나 했더니 아빠는 몇 달 후 간암 말기 판정으로 받고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엄마는 위암과 치매로 지금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 더 심각했던 일은 가족들 수시로 가위에 눌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직업 때문에 밖에 살고 있어 가끔 집에 왔기에 잘 몰랐다. 하지만 모든 상황으로 볼 때 집터가 분명히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집을 처분하고 싶었다. 엄마가 건강할 때 몇 번이나 이사 시도했지만, 엄마는 그 집이 좋다면서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애원했다. 물론 집 때문에 이런 모든 일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하게 살았어도 이렇게 모든 가족이 아프고 나쁜 일들이 몰려서 왔던 적은 없었다.
지금 와서 정리한다고 달라질 것도 더 나빠질 것도 없을 만큼 최악이었지만, 동생에게 혹시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걱정되었고 그냥 그 집이 싫었다. 그래서 엄마가 입원한 사이에 처분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집을 내놓고 나니 왠지 모를 씁쓸함과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던 엄마의 첫 집인데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떠돌아다녔다.
'어머니가 퇴원해서 새로 이사한 집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과연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이사한 곳에서 엄마가 적응하지 못하게 어떡하지?'
다행히 부동산에서 많은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집값 상승과 전세가 자취를 감춘 것 때문에 서울 변두리 빌라도 귀한 물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게다가 시세도 제법 올라 있었다. 주변 시세를 철저히 확인하고 매입가보다 6천만 원 정도 높여 내놓았다. 그런데도 산다는 사람이 바로 나타났다. 매수자를 물어보니 갭 투자를 한다고 했다. 순간 집을 팔지 말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냥 전세로 돌리고 이사를 가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집과 이별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결론을 지었다.
엄마 집 계약서를 작성하고 경기도 전셋집을 알아보기 위해 틈나는 대로 서울로 와서 동생과 움직였다. 마침 채광도 좋고, 동네도 조용한 모든 조건이 좋은 저렴한 빌라는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중개사 사장님 소개로 구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동생은 새로 구한 김포 집을 좋아했다. 한적해서 엄마가 퇴원하면 같이 모시고 산책하기도 좋고, 도로에 차도 별로 없어서 엄마가 사고를 당할 우려도 적었다. 게다가 출근이 가능한 지하철역도 도보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삿날을 잡았다. 매도 생긴 차액은 오로지 엄마를 위해 쓰기 동생과 상의하고 앞날을 계획했다.
만약 그 집이 정말 재수 없는 곳이라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이라면 이제는 좋을 일만 생길 거라고 서로 위로하고 희망을 품었다.
그런 기적은 없겠지만 엄마 병세도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싱거운 농담도 하면서 잠시 불행 속 저 밑에 깔려있던 행복을 끄집어내서 서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