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 이야기
'우리 엄마는 정말 행복하겠다.'
우리 형제는 입으로는 엄마는 정말 행복하다고 우리 같은 아들을 둬서라고 말하면서 표정은 세상에서 슬픈 표정을 하고 이야기했다. 치매 진단을 받은 지 벌써 4년 차 되었다. 이제는 엄마의 고통도 행복으로 포장하는 법을 배웠다. 어떤 날은 엄마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사탕 하나에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 눈치도 안 보고, 부끄럼도 모두 사라지고, 자식들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지지도 않는다.
사실 엄마가 아프지 않고 건강할 때는 항상 걱정 속에 살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지금이 더 행복한 건 아니냐고 종종 동생에게 말한다.
어깨뼈 골절로 동생이 원무과에서 일하는 병원에 입원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장기 입원이 불가능할 거 같다고 동생은 말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틈만 나면 서울로 올라간다.
아무리 자주 간다고 해도 한 달에 3번 정도이다. 그때마다 엄마 얼굴을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엄마를 보기 위해서 올라갔는데 막상 동생이 데리고 내려오면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야윈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핑계를 떠올린다.
막상 만나서 따뜻하게 말 한마디를 엄마한테 하려고 해도 가슴에서 뭔가 올라와서 말 문이 막혀버린다.
엄마는 이제 체중이 32kg이다. 거의 뼈만 남았다.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사탕이나 과자만 간신히 먹는다. 아무리 비싼 영양제를 사서 드려도 먹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병원에 있으니 더 아파 보인다.
동생은 같은 병원에 있어도 매일 엄마를 보러 병실에 올라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런 동생에게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엄마를 봐야지라고 나는 말할 수 없다.
동생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를 본다는 그 고통 말이다. 그리고 코로나로 원무과 직원이 병실을 드나드는 것도 눈치가 보일 것이 뻔했다.
다행히도 동생 병원에 원장 선생님이 엄마를 잘 봐주시는 듯하다.
지금은 말이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 엄마는 원장 선생님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우리 현실이 조금 비참해도 이런 상황이 참 다행이라는 여겨지며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 올라갔을 때 동생 편에 원장 선생님께 손 편지로 글을 써서 작은 선물과 함께 드렸다.
이렇게도 고마움을 표현해야만 했다.
엄마는 유전성 전두엽 조기 치매로 50대 후반부터 이미 빠른 진행이 되고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발견하고 병원을 모시고 갔을 때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이후였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엄마는 증상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처음에 치매 진단 의사 선생님은 5년 정도 지나면 정상적인 생활은 완벽히 불가능할 거라고 했다. 물론 선생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 동생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빠가 간암 말기 판정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을 때도 똑같았다.
"길어야 2년입니다. 그동안 좋은 시간 많이 보내세요."
선생님 말대로 아빠는 2년이 조금 안 되는 시점에 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했다.
지금 엄마는 식욕을 잃었고, 대화를 잃었고, 어린 시절 기억을 잃었고,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요즘은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실수한다. 아기 때처럼 팬티를 대신해서 묵직한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 그래서 엄마의 엉덩이는 가끔 엉망이 되어 버린다. 이후로 동생은 틈만 나면 어머니를 직접 목욕시킨다.
엄마 아들이니까 나도 해야지 하고 처음에는 같이 하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의 알몸을 보는 순간 나는 굳어버렸다. 그 형편 없어진 낡고 보잘것없어진 엄마 몸을 보고 있으면 내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뇌는 나에게 눈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거라고 세뇌한다.
처음에 엄마는 우리 앞에서 옷을 벗는 걸 거부했다. 아무리 인지기능을 상실해도 부끄러움은 남아 있었다. 도망을 치기도 하고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그래도 깨끗한 개운함이 좋았는지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생은 그사이에 엄마 목욕 전문가가 다 되어버렸다.
목욕시키는 그놈 마음은 아마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엄마를 목욕시킨다.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동생이 손길에 따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동생은 분주하게 엄마 몸 이곳저곳에 손을 움직여 닦는다.
엄마는 건강할 때도 대중목욕탕 가는 것을 싫어했다.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만약 딸이 있었다면 아마도 같이 가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목욕탕 대신 엄마는 좁고 좁은 집 화장실에서 혼자 목욕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 큰 아들 앞에서 일주일에 몇 번이고 목욕을 받는다. 하지만 엄마는 목욕하는 동안 슬퍼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것만 같다. 너무 늦게 알게 되었지만, 엄마는 목욕을 좋아했던 거 같다. 단지 혼자 가기 싫었던 거 같다. 그래도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많이 씻겨드릴 수 있어서.
엄마는 항상 말했다.
"난 딸이 있는 엄마들 전혀 부럽지 않아. 딸보다 든든한 너희들이 있어서 단 한 번도 부럽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다들 왜 이렇게 딸이 좋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한테 " 그래도 딸이 좋지, 같이 목욕탕도 가고, 쇼핑도 하고, 애교도 부리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딸보다 두 아들이 더 좋다고 했다.
이런 기억이 살아 있어서 그런지 엄마는 행복해 보인다. 뼈만 남은 몸처럼 인생의 굴곡도 많았지만, 그 굴곡들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언젠가 나도 같이 목욕을 시켜야지 하고 다짐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다시 집으로 향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멀쩡한 척 오늘도 일터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퇴근하면 집에 와서 딸아이를 보며 저녁을 먹고, 엄마는 고통은 잠시 땅에 내려두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딸아이에게 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준다. 아마 같은 시간 동생은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엄마 목욕을 시켜드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우리 형제는 행복하다. 사고만 치던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가끔 그리워지는 날이 삶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냥 아빠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실수하고 능력이 없다고 모질게 했던 그 과거의 시간이 후회돼서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떠난 아빠를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 아빠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사진 속에서 웃고만 있다. 하지만 엄마는 다르다.
아직 우리는 엄마를 만지고, 이야기하고, 바라보고,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엄마를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아직 볼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제 곧 연말이고 다른 사람들은 월드컵도 보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며 아쉬웠던 22년을 추억하고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희망에 찬 새 노트를 각자 꺼내서 페이지를 열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한 집안에 가장 노릇을 하면서 사는 동안 나는 새해가 무겁고 두렵기도 하다.
더욱 다가오는 23년은 더 무섭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물론 동생 말대로 아직 엄마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할 날이 더 많이 남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어쩌면 아직 고통은 시작도 안 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엄마에게 22년은 거의 꼬박 동생 병원에서 보냈다. 가끔 우리 집에 외출을 받아서 대학병원에 가거나 앞에서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 엄마는 거의 활동이 없다. 이제는 환자복이 더 잘 어울린다.
22년 동안 내가 안타까웠던 것은 가끔 올라가서 엄마를 만나면 언제나 나를 보고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자."라고, 말했다.
얼마나 병원이 지겨웠을까. 하지만 엄마가 이렇게 집에 가자고 하면 너무 고통스럽고 엄마가 밉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인지 못 하는 것이 화가 나고, 모시고 내려가서 곁에 둘 수도 없는 내 현실 때문에 더 비참했다. 그런데 그것도 복에 겨운 투정이었다는 것을 안다. 퇴원이 다가올수록 병원에 가서 엄마가 면회하면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신다. 더 이상 집에 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나를 보고 밝게 웃어 준다. 기운이 다 빠져서 말도 못 하는 것 같다. 양치를 못 하고 관리가 안 되다 보니 이미 이빨도 다 빠지고, 체중은 계속 빠지고, 남들에게 1년이지만 엄마는 마치 10년 보낸 것처럼 초월해 늙어버렸다.
물론 그런 변화를 느끼고 힘들어하는 것은 나와 동생이다. 엄마 아무것도 모른다. 이제는 핸드폰을 찾지도 않고, 엄마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직접 연락도 못 한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이 세상에 홀로 살아남을 수가 없다.
11월 말이면 엄마는 병원에서 퇴원해야 한다. 막막하다. 65세 미만이라 치매 진행 상태가 심해도 등급은 낮게 나온다. 대학병원 선생님이 아무리 안타깝게 생각해도 글을 잘 써줘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국은 현재 재가 4등급에 맞춰서 퇴원하면 엄마를 주간보호 센터에 모셔야만 한다. 그래서 연말에 동생 직장 근처에 있는 보호센터를 알아보기 위해 틈나는 대로 휴가를 써서 서울에 간다. 직장에 눈치도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너만 효자냐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다.
좋은 보호센터 찾기 위해 이곳저곳 동생과 시간을 나눠서 방문했다. 갈 때마다 참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다. 아마도 비슷한 경험을 한 분들은 모두 느끼셨을 그 감정이다. 수많은 어르신이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그곳의 공기와 시간은 마치 다르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그곳에 직원분들이 불친절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모두 한때는 젊었고, 꿈도 많았고,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자신을 희생했을 분들이었다. 하지만 나이 먹고 그렇게 한 곳에 모두 모여서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만 보는 게 참으로 허탈했다.
처음에는 요양원은 보낼 수 없으니 요양 병원이라도 알아보려고 했다. 아니 그래야만 동생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거 같았다. 동생까지 엄마 때문에 지장을 받으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아마 주저앉아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은 없었다. 누군가는 더 힘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동생은 지금은 너무 이르다 버틸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리고 사실 나도 그렇게 엄마를 다른 곳에 두고 오고 싶지 않았다.
말이 좋아서 요양 병원이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모를 포기한 것 아닌가….
앞으로 퇴원하면 동생과 아침에 같이 일어나서 엄마는 보호센터로 동생은 직장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면 동생이 엄마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오는 이런 삶이 시작될 것이다. 마치 어린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일을 갔다가 픽업해서 집에 오는 것처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는 성장하고 엄마는 멈췄다는 것이다. 이런 걱정을 연말에 미리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피할 수도 없다. 다가오는 불행을 막을 방법은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배운 것이 있다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 모두 살아갈 수 있다. 그래도 목욕시켜드리고 볼 수 있는 것에 행복하다고 서로에게 위로를 보낸다. 참 다행이라고 혼자가 아니라서 동생이 있어서 너무 힘이 된다고 엄마한테 동생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