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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Oct 21. 2023

8. 엄마한테 위치 추적기를 갖고 다니라고 말했다.  

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 이야기

이사를 마치고 골절로 1년 가까이 입원했던 엄마를 모시고 전셋집으로 왔다. 퇴원 며칠 전부터 걱정이 돼서 밤잠을 설쳤다. 중증 치매 환자에게 새로운 환경이 얼마나 부담이 될지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엄마는 입원하기 전과 비교하면 상태가 너무 안 좋아졌다. 특히 폭력적으로 변한 것과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말해도 절대 듣지 않았다. 고집불통 독불장군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퇴원하면 동생과 일주일씩 시간을 나눠서 엄마 곁에서 적응을 돕고,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연습을 시키기로 했다. 걱정할 것은 한둘이 아녔다.

혹시 집 밖을 혼자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부터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했다.     


차를 끌고 병원에 가서 엄마한테 퇴원한다고 이제 집으로 간다고 말했다.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좋아했다. 차를 타고 동생과 함께 새집으로 가서 내렸다. 엄마는 전혀 다른 동네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여기 우리 집 아니잖아. 집으로 가자."     


나와 동생은 서로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집 앞에서 사투가 벌어졌다. 엄마는 계속 조르고 우리는 엄마를 달래고.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 겨우 엄마를 달래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이 비슷한 구조여서 이사하고 짐을 정리하면서 모든 가구 배치를 예전과 집과 거의 비슷하게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적어도 엄마가 어색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하지만 그런 노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이사한 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어디냐면서 화를 냈다. 치매가 진행되면서 감정표현이 격해지고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다른 분들과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


동생은 이런 곤란한 상황을 혼자 대처하면서 죄인처럼 직장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1년 가까운 시간을 혼자 감내했다. 자기 실수로 넘어져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벌을 받는다는 속죄의 마음으로 그 시간을 버텼다. 엄마는 병원에서 다른 환자 물건을 훔치고, 남의 음식을 대놓고 먹고, 치료사들에게 눈앞에서 욕을 하고, 간호사나 의사 선생님 말도 전혀 듣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된 것을 알기에 나는 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감정표현이 폭발해서 엄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


엄마는 내 눈을 쳐다보며 서글픈 듯 바라봤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지만, 엄마를 보니 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어쩔 수 없이 내 입에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엄마한테 2년만 여기에 살고 다시 예전의 집으로 갈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살자.”      


엄마는 내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며 2년, 2년, 2년을 무한 반복했다. 뻔한 거짓말인 것을 속으로 아는 듯했지만, 엄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겨우 엄마를 진정시키고 엄마 방으로 모시고 가서 텔레비전을 켰다. 잠시 후 좋아하는 영화가 나오자, 집안에 바로 평화가 찾아왔다. 마치 말 안 듣는 딸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주면 바로 조용해지는 것처럼 엄마는 언제 화를 냈는지조차 까먹은 듯 큰 소리로 웃으며 영화를 봤다.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동생은 마음이 무거운지 입을 다물고 그저 엄마와 나를 바라봤다. 앞으로 일이 걱정돼서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새집에서 첫날밤은 흘렀다. 결혼해서 엄마에게는 이 집이 5번째 이사를 한 것과 다름없었다. 다음 날 아침 동생은 직장으로 출근했다. 나는 오전에 남은 집 정리를 하고 심심해하는 엄마를 모시고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엄마가 새로운 동네를 좋아하기를 바랐지만, 엄마는 금방 날카로워졌다. 몇 번이나 혼자 집을 찾아가 보라고 했지만, 다른 집으로 들어가고 현관문 비밀번호도 누르지 못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인지 그 쉬운 일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루 종일 엄마와 시간을 보내면서 어쩌면 엄마가 앞으로 이렇게 평범한 집에 다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증상이 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다고 다시 예전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그 집은 다른 사람의 집이 되었다. 더 이상 돌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지금 우리는 절벽 위에 서서 위태롭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뒤로 갈 수도 없고 앞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막막함만 남아 있었다.      

엉망이 된 기분을 전환할 겸 엄마와 이마트에 향했다. 엄마는 이마트를 보자마자 반가워했다. 엄마가 꼬박 10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출근했던 곳이었다. 엄마가 이마트에서 일하기 전에는 동네 식당에서 주야간으로 주방에서 일을 하며 먹고살기 위해 몸을 던졌다. 못난 신랑을 덕분에 고생은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마트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후 엄마는 사람들도 만나고 안정된 환경에서 버틸 수 있었다. 때로는 동료들에게 위로도 받고 서로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이마트 간판만 봐도 금방 기분이 전환되었다.   

  

이마트에서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작고 거친 손은 엄마의 고된 삶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엄마랑 다니면서 문득 이런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고 다녔다. 겨우겨우 나쁜 생각을 떨쳐내고 식료코너에 가서 저녁거리를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말했다.     


“나 똥.”     


최근에 몇 번 실수했다. 병원이라서 다행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나는 급하게 화장실을 찾았다. 점원은 내부에 화장실이 없으니 1층으로 다시 가서 나가라고 했지만, 엄마는 급해 보였다. 결국 점원의 도움으로 직원 화장실을 안내받았다. 직원 통로로 들어가서 엄마를 여자 화장실에 안내하고 앞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다른 직원이 여기는 직원 구역이라면서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통로가 하나기에 별걱정 없이 밖으로 나와서 기다렸다.


나오는 길은 한 곳이니 이쪽으로 분명 나올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엄마는 나오지 않았다. 혹시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걱정되었다. 나는 주변 여직원에게 부탁하고 화장실로 급히 달려갔다. 여자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엄마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런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혼자 애절하게 소리 지르는 나를 보고 직원들이 몰려왔고, 무슨 일인지 물어봤다. 다급히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여자 직원분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님, 아무도 없는데요. 어머니 들어가신 거 맞나요?"     


앞이 캄캄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여기 출구가 또 있냐고 묻고 또 물었다. 직원들은 출구는 아니지만 안쪽 창고를 통해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부탁하고 안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어디에도 엄마는 없었다.

엄마를 잃어버렸다. 그것도 중증 치매 환자인 엄마를.      

직원한테 방송을 부탁했다. 그리고 진열대 사이사이를 숨이 차도록 뛰어다녔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혹시라도 엄마를 다시 못 찾을까 봐 무서웠다. 

엄마는 핸드폰도 없었고, 집 주소도 모르고, 자기 집도 어딘지 모른다. 만약 누군가 신고해서 어디로 간다면 실종이 될 것이 뻔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퇴원할 때 위치추적기를 살까? 말까? 동생과 잠시 상의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할 때 바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 등을 누군가 쳤다. 엄마였다. 엄마가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눈에 글썽였던 눈물은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울어도 된다고 엄마는 여기 있다고 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기쁠 때도 눈물이 난다고.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엄마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 사탕…."     


엄마의 그 말에 힘들게 허락받은 눈물은 웃음으로 변해버렸다. 엄마한테 어떻게 나를 찾았냐고 물어볼 필요도 아니 물어도 소용없었다. 중요한 건 잠시 엄마를 잃어버렸다가 찾았고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입술을 여는 것을 대신해서 나는 엄마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들이 걱정했잖아. 미안해 내가 다음부터는 문 앞에서 꼭 기다릴게. 아들 찾느라고 수고했어. 사탕 사러 갈까?"      


엄마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사탕"      


엄마 손을 잡고 사탕 판매대로 갔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시는 이 작은 손을 놓지 않겠다고 엄마가 우리 손을 항상 잡고 다녔던 것처럼 나도 그 옆을 지켜주겠다고.     

엄마를 이마트에서 한번 잃어버리고 나는 바로 휴대용 위치 추적기를 인터넷에서 주문했다. 이런 물건이 있는지 전에는 전혀 알지도 관심도 없었다. 10만 원이면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위치추적기가 많았다.

유아랑 치매 노인들을 위해 제품을 판매하는 설명을 보고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괜히 슬퍼졌다. 최대한 크기가 작고 엄마가 항상 잘 들고 다닐 수 있는 제품을 찾고 또 찾았다. 만약 길이라도 잃어버린다면 엄마를 찾아서 바로 갈 수 있도록. 어릴 때 우리가 길 잃어버리면 우리의 향기를 맡으며 형사보다 빠르게 어떻게 든 우리를 찾아냈던 엄마처럼.     


이틀이 지나고 주문한 제품이 택배로 왔다. 내 핸드폰과 동생 핸드폰에 연동시켰다. 엄마가 몸에 지니고만 있으면 엄마 위치를 실시간으로 바로 확인 수 있었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지역에 반경 설정이 가능해서 엄마가 일정 구역을 벗어나면 바로 알림이 온다는 것이었다.

만약 새로 이사 온 집에서 엄마가 혼자 나갔다가 길을 잃어도 위치 파악이 가능해졌다. 

그 날밤 다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나와 동생은 작은 주황색 위치추적기에 대해 엄마한테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엄마 이거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돼. 알겠지?"     

엄마는 바로 대답했다.      


"이게 뭐야. 싫어."     


우리는 결국 거짓말로 엄마를 협박했다.

"엄마 이거 없으면 손녀딸 동영상 못 봐. 안 나와."     

"안 나와?" 집착의 대상이 빠르게 변하지만 지금 엄마의 집착은 내 딸이 춤을 추는 30초짜리 동영상이었다. 


아마 곧 있으면 안무를 따라 할 정도 많이 봤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엄마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아니 엄마는 감시받기 시작했다.

비교해도 부질없지만 다른 분들은 단풍 구경에, 해외여행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데 엄마는 이렇게 집 앞에 나가는 것도 힘들어 감시까지 받는 것이 안쓰러웠다. 마치 가슴속에 큰 돌이 들어간 것처럼 답답하고 아프고 무거웠다.     


예전 집에 설치했던 홈 카메라 한 개를 엄마 방에 설치하고, 혹시 나가는 장면을 보기 위해 한 개를 더 사서 거실에 설치했다. 엄마는 밖으로 나가면 GPS로 감시를 받고, 안에서는 카메라로 24시간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일주일에 시간을 모두 사용했다. 직장인이고 이곳에서 계속 엄마를 보살필 수 없음에 속상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아빠의 임무를 위해 다시 일터와 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서울을 떠나기 전 새로 이사한 곧 주변에 마트마다 들려서 엄마에 대해 말씀드렸다. 혹시나 길을 잃거나, 물건을 사고 돈 계산 안 하면 이상하게 생각 말고 이 연락처로 연락 달라고 부탁드렸다. 다행히 인심이 나쁘지 않았다. 다들 웃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게다가 힘내라고 위로까지 해주셨다.     


이렇게 엄마는 아름다운 63세 나이에 자신의 모든 흔적을 카메라와 지도에 남기는 일상을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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