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 이야기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고 동생과 나는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를 나름 모셨던 그 시간 때문에 동생은 죄책감에 방향감각까지 상실한 것 같았다. 이 결정이 동생을 그리고 엄마를 구덩이로 몰아넣을까 봐 나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돌릴 수는 없었다.
대신 동생을 위로했다. 그동안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엄마는 다 이해하실 거라고'
하지만 어떤 위로도 동생에게 와닿지 않았다. 엄마를 모시고 출근하고 퇴근할 때 픽업해서 집에서 모실 수 있다고…. 아직 결혼을 안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던 자신을 증오하고 있었다.
엄마를 보낸 그날 엄마 없이 저녁을 먹고 동생한테 말했다.
"우리 목욕탕 갈까?"
동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욕탕은 우리에게 얼어붙은 차가운 마음을 녹여주는 나름의 안식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우리 형제는 장례식을 마치고 뜨거운 탕 속에 몸을 넣었다. 고통이 뜨거운 물에 녹아 없어지기를 바라는 불쌍한 얼음과 같았다.
그리고 엄마가 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불안에 떨고 있는 엄마가 잠이 든 것을 보고 우리 형제는 목욕탕을 갔었다.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불안한 몸부림을 고요한 탕 속에 숨기고 조용히 물방울이 떨어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 형제는 고통이 찾아와서 무너지면 목욕탕으로 향했다.
오늘도 우리는 말없이 옷을 벗고 탕에 몸은 밀어 넣고 말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엄마가 요양원에 가니 이렇게까지 난도질당한 마음에서 피가 흘러넘쳤다. 엄마를 요양원에 보낸 대역죄를 지은 두 아들이었다. 탕 속에서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멍하니 초점 없는 눈빛으로 눈물을 땀으로 위장한 채 말없이 흐느꼈다.
말이 없는 동생에게 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어떤 말도 지금 들리지 않을 것을 알기에. 맨날 일에 치이고,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형이 더 힘들 거라고 내게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동생이라서 어리광도 부리고 싶었겠지만 내가 사는 모습을 잘 알기에 외국인과 결혼해서 매 순간 자녀를 양육하면서 불안한 가정을 이끌고, 꿈도 꾸역꾸역 접어 둔 채 오래전부터 아빠를 대신해서 불안함을 감추고 춥고 외로워도 가족을 위해 조용히 말없이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형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착한 동생 놈이라서. 동생도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탕에서 나와서 동생 등을 밀어주는데 아버지의 뼈만 남았던 초라한 등이 떠올랐다. 이놈도 정말 힘들구나. 나는 동생의 등을 밀면서 말없이 울었다.
내가 울고 있는 것을 아는지 등을 밀고 있는 내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형…. 부모는 자식을 안 버리는데…. 우리는 아니 나는 왜 엄마를 버린 걸까?"
슬픈 무게감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질문에 정답은 없었다. 우리가 한 행동은 오답이 분명했다.
고집 센 외국인 아내를 만나서 어떠한 공유도 공감도 공유하지 못하고 외롭게 버티며 딸 하나 바라보고 사는 내게. 부모라서 딸을 버릴 수 없어, 인생을 포기하는 결정을 받아들이고 사는 나라서 ‘부모는 자식을 안 버린다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
물론 이렇게 희생했다고 나중에 알아 달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늙어서 우리 형제처럼 내 딸이 나를 요양원 보냈다고 원망하거나 딸에게 서운하다는 표현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외롭게 요양원에 있는 것보다 더 힘들 테니 말이다. 부모라서 이렇게 산다고.
한참이 흘러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가 없었다면 형은 진작에 엄마를 요양원에 보냈을 거야. 그래도 너 때문에 명절 때마다 엄마를 볼 수 있어서 행복했고, 엄마도 나름 편하게 지냈어. 엄마는 너 때문에 더 행복했어. 엄마는 분명 괜찮다고 할 거야. 건강하셨으면 이제 미뤘던 결혼도 하고 제발 너도 행복하게 살라고 말했을 거야."
동생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조용히 혼자 눈물 흘릴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핑계를 대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저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더러운 껍질을 닦은 것뿐인데 뱃속은 배고프다고 요동을 쳤다.
이런 상황에도 사람은 배가 고프구나….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동물이네! 우리도. 나는 싱거운 말을 혼자 내뱉고 동생이 좋아하는 소 곱창을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동생은 말없이 곱창집으로 따라왔다.
엄마의 요양원은 이사한 집에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말마다 자가진단키트를 하고 방문하면 면회도 충분히 가능했다. 단지 마음이 사막처럼 갈라져서 죄책감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식당 도착해서 소주 한 병을 시키고 곱창을 입에 넣었다. 참 한심하게도 소주는 설탕보다 달고, 곱창은 고소했다.
웃자고 힘내자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불편한 진실이지만 이런 상황에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고 배가 고프니까.
그리고 내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일터로 돌아가서 주어진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니까. 엄마는 요양원 생활이 걱정되지만 우리는 바빠서 허덕거리며 매일매일 살아갈 테니까.
요양원에 어머니를 보내고 우리는 각자 일상으로 돌아왔다. 정신없는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어느덧 녹초가 된 몸을 질질 끌고 집에 도착했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일하면서 엄마를 떠올릴 틈조차 없었다. 이제 홈 카메라로 볼 수도 없으니 그리움은 더 커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라고 외치며 하나뿐인 딸이 조잘조잘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준다. 예전이라면 마냥 행복했을 텐데 딸아이를 보니 엄마가 더 떠올라 서글퍼졌다. 하지만 퇴근하고 다시 육아 출근을 하니 어느덧 엄마는 기억에서 흐릿해졌다.
딸이 잠이 들고 다시 집에 침묵과 고요가 찾아왔다. 어두운 우리 집에 유일하게 밝은 곳으로 남아 있는 내 방 책상에 홀로 앉아 걸려 있는 가족사진을 말없이 바라봤다. 약간 통통하고 건강했던 시절에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보니 다시 미안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엄마를 요양원에 보낸 후 억지로 적응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 사이 요양원 원장님은 동생과 나를 포함해서 가족 톡방을 개설해 줬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몇 장의 엄마 사진을 올려주셨다.
사진이 올라오기 전까지 나는 동생과 많은 통화를 했다.
"형, 엄마 잘 계시겠지? 그냥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좀 기다려 보자. 단톡방 만들어 준다고 했으니까?"
"그냥 걱정돼서 그래도 우리 병원에 계실 때는 자주 볼 수 있어서 마음이 이렇지는 않았는데 이거 너무 힘드네. “
"형은 너희 병원에 엄마가 있을 때부터 마음이 불편했어. 그래도 네가 곁에 있으니까 조금 마음이 놓였던 거지. 뭐가 되었던 엄마가 병원에 있으니까. 서울에서 엄마를 보고 내려갈 때마다 차에서 혼자 울었어. 그냥 눈물이 막 나더라고."
"형은 그랬겠구나. 내 마음이 지금 그러네."
계획대로 돌봄 센터로 보냈으면 아쉬움이 말속에 숨어 있었다. 이사한 집으로 엄마를 모시고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동생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밤마다 일어나서 음식을 뒤지고, 잠을 자지 않고 밖으로 나가고, 동생과 나를 깨우는 며칠이 반복되었다. 동생은 결국 엄마에게 화를 냈다. 엄마는 동생이 왜 화를 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몇 날을 지켜보면서 동생 계획대로 보호센터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경기도로 이사를 한 터라 운전해서 출근하는 시간만 꼬박 1시간이 걸렸고, 이렇게 매일 잠을 못 자서 졸음운전을 할 것도 걱정됐다. 결국 나는 등급이 없어 감당할 돈이 많아도 요양원에 보내자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처음에는 심하게 저항했지만, 본인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우주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생은 ‘저녁마다 매일 엄마를 볼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냉정하다고 나를 욕한다고 해도 누군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말한 내 심장은 이미 멈춘 지 오래였다.
4일째 되는 날 원장 선생님이 엄마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줬다. 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눈길이 갔다.
사랑하는 엄마는 그 속에 있었다.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동영상 봤지? 그런데 왜 여기 환자복이 없어? 엄마 아직도 입원할 때 옷을 아직도 입고 있던데." 보낸 지 얼마 안 돼서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복 챙겨가냐고 하니까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렇지?" 동생은 화를 참지 못하고 따지듯이 내게 물었다.
"어. 없었어.
"아…." 끝도 없는 한숨이 전화기 너머로 몰려왔다.
같이 동요되기보다는 침착해야 했다. 하지만 걱정되기는 똑같았다.
'목욕은 시켜주고 있는 건지?'
'속옷은 갈아입었는지?'
'밥은 정말 잘 챙겨주고 있는 건지?'
머릿속은 금방 불신과 분노로 가득 차 버렸다.
결국 다음 날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원장 선생님. 요양원 환자복이 없나요?"
"네. 저희는 사복을 입혀드려요."
"그런데 왜? 추가로 사복을 달라고 안 하셨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바쁘신데 제가 집에 있는 거 그냥 입혀드리면 돼요."
태연한 태도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물어보지 않았다면 도대체 같은 옷을 며칠 동안 입고 있었을지 그냥 엄마한테 미안할 뿐이었다.
물론 요양원이 많은 어르신을 동시에 돌봐야 하는 상황이고 당연히 자식만큼 돌봐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식 마음은 그게 아닌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톡을 보고 동생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화가 났지만, 동생 앞에서 침착한 척해야 했다.
"퇴근하는 길에 옷을 넉넉하게 챙겨서 드려. 이게 보니까 뭐가 필요하다는 말조차 잘 안 해줄 거 같은데."
동생은 씩씩거리며 알겠다고 짧게 대답하고 끊었다.
그 날밤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은 절제된 목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분노로 말하기도 버거워 보였다.
“형, 엄마 얼굴도 못 봤어. 코로나라 사전 면회 신청 안 했다고 안된데. 물건만 문 앞에 두고 가라고 해서 직원도 못 보고 돌아왔어.
나는 기가 막혔다. 코로나를 정말 걱정하는 건지, 편의를 위해 이용하는 건지 도대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동생이 고생해도 주간보호 센터에 가게 둬야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마치 엄마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