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용환 Oct 21. 2023

10. 면회를 갔는데 엄마 머리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 사는 이야기

요양원 입소 후 알게 되었다. 재가 등급에서 시설로 변경은 아주 간단히 서류만 제출하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름 알아보면서 모든 절차를 진행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바보나 다름없었다. 몰라서 비싼 비용을 내고 있었다는 허탈함을 이야기하면서 지금이라도 변경되어 금전적으로 부담이 줄어든 것에 위안을 삼았다. 


돈이 많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엄마가 젊은 시절 어떤 이유에서인지 들어둔 간병인보험이 있었다. 아주 큰돈은 아니었지만, 금전적인 모든 부분은 동생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 나 혼자 해결하고 있었는데 도움이 되었다. 만약을 위해 아니 가난하게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아서 부지런히 20대부터 재테크 공부와 투자를 한 것은 마치 이런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 계획된 것처럼 느껴진 적도 있다. 엄청난 돈을 모으지는 못했어도 월급쟁이 생활로 감당하지 못했을 수많은 상황을 모면하게 해 줬다.      

마치 어느 드라마에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아내에게 남편이 왜 그렇게 궁상을 떠냐고 제발 사람답게 살라고 말하는 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내는 남편의 말에 차분히 대답했다.

     

”우리 엄마, 아빠, 당신 엄마, 아빠 나중에 아프게 되면 이렇게 아낀 돈이 꼭 필요할 거야. 나는 지금 가난한 것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못 지키는 게 더 비참하고 힘들 거 같아. 그래서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     


나도 그렇다. 아직도 내 몸에, 내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게 아깝다. 직장에서 오래된 차를 타고 다니는 나를 보고 바꾸라고 말해도 내 눈에는 아직 10년은 더 탈 수 있는 자동차로 보인다. 내 삶에 만약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왔고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버티면서 살았다. 


엄마도 아빠도 희생하면서 살아왔지만, 결과물을 남겨두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무너졌을 때 그 짐을 내가 들고 힘들게 걸어가야 했다. 원망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감사하다. 덕분에 사치도 모르고 성실히 차분히 투자와 월급쟁이를 병행하며 어긋나지 않고 20년 넘게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가 등급으로 요양원에 오랜 시간 머무셨다면 분명 재정적으로 아주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은 당연했다. 매달 200만 정도 추가 지출을 감당하기에 그저 평민에 불가했기에 하나, 둘 자산을 정리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다행히 등급을 받으니 월 부담금이 80만 원이 되었다. 이렇게라도 금전적인 부담이 줄어드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홀가분했다. 그동안 동생에게도 표현하지 못하고, 외국인이라 어머니에 대해 큰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돈 걱정을 하는 아내도 신경이 쓰였다.     


잠시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어머니 면회를 위해 동생 집으로 향했다. 첫 면회였다. 동생 일하는 병원에 계실 때도, 지금 요양원에 계실 때도 한순간도 내 마음이 편했던 적은 없었기 다를 것은 없었지만 동생 병원에 계실 때는 가끔 동생이 영상통화도 시켜주고, 안부를 들을 수 있어서 정신적으로 버틸 만했다. 하지만 요양원 매우 한정된 정보만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항상 소화불량이 온 것처럼 불편했다.     

면회 요청에 원장 선생님은 방문객은 약국에서 진단키트를 사서 면회 전 코로나 검사를 하고 음성이 나와야만 볼 수 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어서 동생 집에 도착해서 장거리 운전과 일터에서의 스트레스로 인해 나는 실신하듯 바로 잠이 들었다. 동생은 다음 날 반차를 냈기에 우리는 다음 날 오후에 동생이 집으로 오면 같이 요양원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잠이 들고 창문 너머 너무나도 밝게 들어오는 햇살을 맞이하며 눈을 떴다. 예전 엄마 빌라와 비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채광이라 적응이 안 되었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동생은 이미 출근하고 집에 없었다.      

일어나서 다시 한번 우리가 면회한다고 원장 선생님께 톡을 보냈다. 그리고 세수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과 요양원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엄마를 잃어버렸던 그 이마트로 향했다.

무설탕 사탕, 기저귀, 마스크, 수면양말, 물티슈, 딸기, 그리고 과자들을 장바구니에 담으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짧은 면회지만 엄마가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리고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우리 형제를 보고 밝게 웃어줬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했다. 마음이 불편하게 요양원 면회를 마치는 고통받는 것은 우리 형제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마음이 불편했다. 엄마 물품을 사고 마지막으로 보호사분들께 드릴 음료와 과일을 사서 집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간에 동생도 도착해서 우리는 약국에서 진단키트를 사고 서로의 코를 쑤셨다. 혹시나 양성이 나올까 봐 불안감이 감돌았지만, 다행히 모두 음성이었다.


 요양원은 이사한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자주 보지 못하는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만약 코로나가 아니라면 동생은 퇴근길에 거의 매일 면회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예약하고 코를 쑤셔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요양원 정문에 도착해서 벨을 누른 후 1층 로비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걱정했는데 요양원 내부는 춥지 않았다. 한파로 조금 걱정하기는 했다. 몇 분이 흐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보호사 선생님이 엄마를 모시고 왔다.     


엄마는 우리를 보고 얼굴을 몇 차례나 확인하고 동생 이름을 몇십 번 반복적으로 불렀다. 순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서 서운했지만, 엄마가 눈앞에 있다는 것 하나로 모든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엄마 손을 잡고 얼굴 요기조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엄마는 곧 적응하고 우리에게 사탕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모든 관심사는 오직 달콤한 것에 집중되었었다. 여러 간식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서 동생은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물론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엄마의 태도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엄마, 텔레비전은 잘 봐?"

"엄마, 사탕 맛있어?"     

엄마는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엄마 여기서 잘해줘?"     


마지막 질문에 엄마는 고민도 없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표현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엄마의 반응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그냥 엄마한테 미안했다.

이렇게 엄마를 이곳에 버려둬서, 이렇게 엄마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이렇게 우리는 엄마와 30분 정도 시간을 보냈다. 조금 지나서 직원이 내려와서 주말 프로그램이 있다고 엄마를 모시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해진 면회 시간을 공지받았으니, 예상은 했지만,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서 슬펐다. 직원 엄마가 너무 잘 적응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우리에게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였다.      

거짓말처럼 들렸지만, 웃는 얼굴로 직원분께 고맙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더 있으면 있을수록 마음이 아파서 우리는 엄마와 작별 인사를 하기로 했다.


잘 부탁드린다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직원들 먹으라고 과일 바구니와 엄마 용품을 드렸다. 그렇게 엄마와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말했다.     


"집에 가자. 빨리 집에 가자."     

엄마는 집에 가자고 말하며 직원 팔을 뿌리치려고 했다.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직원도 엄마 행동에 당황했는지 엄마를 더 붙잡으며 어색한 웃음을 우리에 지어 보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빨리 닫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엄마는 올라갔다. 나와 동생은 세상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서 서 있었다. 몇 초가 흘렀지만 느낌은 몇십 년이 지난 것만 같았다.

누군가 우리 형제의 가슴을 망치로 때린 것처럼 시퍼런 멍이 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요양원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동생은 내게 분노찬 목소리로 말했다.     

"형…. 엄마 머리에서 엄청 심하게 냄새가 났어."     


어린 시절부터 후각이 마비된 나는 동생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동생은 후각에 민감했다. 아마 처음 엄마를 보자마자 한 번에 알아차렸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표현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어 꾹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냄새를 맡지 못해도 엄마는 전혀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냄새가 난다는 말이 놀랍지도 않았지만, 막상 듣고 나니 이마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형. 면회를 일주일 전에 꼭 연락 달라고 강조한 거 보니까. 아마 그때만 씻겨 드리나 봐. 기저귀는 잘 갈아주는지. 정말 믿음이 안 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저렇지 않았는데"     

절제하고 있었지만, 동생의 말속에는 후회의 감정이 아주 짙게 섞여 있었다.

나는 그런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 좋은 곳을 찾아보자. 이제 등급도 나왔으니까. 정말 좋은 곳을 찾자. 돈을 더 내서라도 엄마가 편하게 깨끗이 있을 곳을 찾아보자. 그러니까 조금만 참자.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동생은 뭔가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말을 아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곳에 비싼 돈으로 모셔도 우리 기준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곳은 절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형제는 이미 요양원에 대해 엄청난 불신을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서 조카 입학식을 본다고 서울에서 동생이 혼자 내려왔다. 내려오기 전부터 몇 번이나 내게 전화했다.     

'형, 엄마 외출이 될까?'     


동생은 엄마가 아무리 아프고 기억을 잃어가도 하나뿐인 손녀딸이랑 초등학교 입학식에 같이 사진 한 장은 찍어야 몇 번이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 애쓰지 말라고 동생을 달랬다. 요양원에 입소 후 병원 진료를 위한 외출도 마음 편하게 허락해 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는 엄마랑 4시간 걸리는 장거리 운전은 더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 위험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입학식 왔으면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은 어머니가 내려오는 것을 너무 불편했다. 아마 한국 여자랑 내가 결혼했어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운함은 커져만 갔다. 이런 결혼을 선택한 나 자신을 몇 번이나 원망했지만 결국 어른이 되는 과정은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 너무 빨리 배웠기에 가슴에 묻어두기로 했다. 어떤 선택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후회는 항상 우리 인생을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은 절대 뒤로 돌릴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만 생각하는 것을 계속 연습하며 살고 있지만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결국 동생은 혼자 내려오기로 했다. 혼자이니 운전하지 않고 기차 타고 오겠다고 했다. 동생도 치열하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직장인이기에 얼마나 고단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퇴근하고 역으로 마중 나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중요한 회식 잡혀서 어쩔 수 없이 동생은 택시를 타고 혼자 우리 집으로 왔다.      

다음날 마침 휴일이라 동생과 나는 딸아이와 데리고 마트로 갔다. 삼촌을 본 딸은 어떻게든 장난감을 얻어 내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폭풍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결국 삼촌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만약 엄마가 건강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속으로 몇 번이나 만약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도 없이 그냥 건강하셨다면 그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셨다면 지금, 이 순간을 엄마는 너무 행복해하셨을 텐데. 엄마에게 내 딸은 자랑거리 그 자체였다. 첫 손녀였다. 잠시 건강할 때 엄마는 보는 사람마다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서 자랑하기 바빴다. 이사하기 전 엄마 방 화장대 위에는 딸아이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외국인 며느리라 어려워하고 서로 의사소통은 못 했지만 그래도 이런 이쁜 손녀를 안겨 준 것에 엄마는 감사해했다. 같이 사는 것에 아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셨다. 자식 하나 바라보고 살아온 당신처럼 나도 그렇게 사는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나라면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넌지시 말해주곤 했다. 그리고 아무리 딸이 부럽지 않다고 해도 징그러운 아들 두 놈을 키웠으니, 손녀딸은 아마 더 이뻤을 것이다.      


입학식이 시작되고 동생은 걱정하며 학교로 가는 조그마한 조카를 보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말 시간 빠르다. 우리 조카가 벌써 학교에 가네. 삼촌은 오늘 너무 행복하다."     


딸아이는 행복하다는 삼촌 말을 듣고 왜 행복하냐고 자꾸 묻고 또 물었다. 아물 집요하게 물어도 동생은 딸에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 아니 설명할 수 없었다. 이 감정은 말로, 어떠한 글로도 표현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는 그냥 옆에서 웃었다. 

짧은 입학식이 끝나고 나는 동생과 함께 딸아이 태권도 학원 등록을 위해 같이 방문했다. 많은 아이들이 밝게 운동하고 있었다. 관장 선생님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도장을 나오는데 동생이 말했다.     


"형, 나는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엄마가 어릴 때는 항상 있었는데. 항상 엄마가 있었어. 그때 엄마도 내가 집에 잘 오고 있나 얼마나 걱정했을까?"     

그 말을 듣고 나니 우리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휴대폰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초품아라는 단어도 존재하지 않아서 학교도 멀었던 그때 그 시절. 당시 엄마는 집에서 부업을 하면서 아빠 사업을 돕고 있었다. 전화 응대를 했기에 꼼짝도 못 하고 전화만 받아야 했다. 그런 엄마의 사정도 모른 채 가끔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랑 노느라 정신 팔려서 집에 늦게 들어가면 엄마는 화를 냈다. 얼마나 걱정되었을까? 이제야 감히 이해된다. 그 심정이.     


입학식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생과 나와서 이야기했다. 아내는 부족한 한국어 실력을 떠나서 이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손님이 와도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잠을 자야 했고, 그건 딸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동생은 하나뿐인 형 집에 와서도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처음에 이런 일로 가족이랑 많이 싸웠다. 하지만 싸운다고, 글을 쓴다고, 호소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만 미친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냥 내가 피한다. 좋게 보면 아내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관계에서 이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고 성립될 수 없다. 그냥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그날도 서울에서 내려온 동생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동생이 내려온다고 하면 무조건 오라고 하기보다 내가 올라간다. 차라리 내가 8시간 운전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


밖에서 간단히 호프를 하는데 동생은 내게 결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형, 나 사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어. “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다시 물었다.     

"뭐를?"     

"엄마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오는 거."     

언젠가 동생이 이 말을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시기가 빨랐다. 당황하긴 했지만 태연한 척 바라봤다.     

"엄마 저번에 냄새난다고 했잖아. 그것도 그렇고 생각해 봐. 2년 전에 엄마 우리랑 같이 공원도 갔잖아.”     

동생은 잠시 말을 멈추고 땅바닥을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엄마에게 시간이 없다고. 아니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2년 뒤면 엄마를…."     


동생은 말을 멈췄다. 엄마의 증상은 정말 대한민국 인터넷 속도보다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치병이다. 특히 엄마처럼 완벽한 노화로 인한 치매 진행이 아닌 경우에는 그 속도는 더 빨랐다.


동생은 어차피 지금 만나는 애인이랑 결혼도 늦게 하기로 합의했는데 2년 후 평생 후회할 일 생기기 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내게 애절하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사실 동생이 내게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다. 엄마를 모시게 되면 발목에 족쇄를 차는 것은 동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호하면서 분명 평생 가슴에 상처로 남을 행동을 엄마한테 하게 될 것이다. 내게 아빠를 간호하면 그랬던 것처럼.      


간에서 폐 전이된 암은 마지막에 머리로 전이가 되었다. 뇌로 전이가 되자마자 아빠는 반신이 마비되었다. 아빠는 나름 강한 남자였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자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했다. 당시 나는 아빠의 우는 모습을 정말 많이 봤다. 병실 간이침대에서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면 아빠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불쌍했다. 아무리 실수하고 힘들게 하고 무능력했던 그런 아빠라도 그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 결국 뇌에 암세포를 제거하기로 큰 결심을 했고 아빠는 큰 수술을 받고 기적처럼 다시 움직이게 되었다. 


그때 아빠가 좋아하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한 번 죽음의 문턱을 넘고 나니 사람이 더 악랄하게 변해버렸다. 개인회생 절차가 진행 중이었는데 매달 갚을 돈을 가지고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모진 말을 많이 했다. 여린 엄마는 아빠에게 아무 말도 못 했고, 동생은 어렸다. 집안에서 악역을 해야 한다면 내가 주연을 맞아야만 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토록 아빠에게 미안하고 후회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정말 몰랐다. 평생 가슴에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밉고 싫다고 생각했던 아빠를 사실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전 09화 9. 엄마를 요양원에 보냈는데 밥이 넘어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