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 이야기
23년 9월 14일 엄마는 11개월의 요양원 생활을 마치고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골절로 병원 입원 1년, 요양원 11개월 이렇게 2년 동안 엄마는 우리를 떠나 있었다.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엄마는 65세가 되셨다.
엄마를 모시러 오기 하루 전날 동생이 이사한 아파트로 향했다. 수없이 서울을 올라갔지만, 이처럼 고속도로 밖 풍경이 눈부신 적은 없었다. 아니 아름다웠다. 엄마가 내일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구름 위를 달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사하고 일주일 먼저 새집에서 생활한 동생이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행복했다. 금전적으로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그동안 열심히 산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서 기뻤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원장 선생님이 큰돈까지 빌려주셔서 감격스러웠다.
물론 엄마가 건강해져서 일반적인 퇴원을 하는 것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에 좋은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작년 11월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고 한순간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면회하러 갈 때마다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만큼 우리도 힘들었다. 더 답답한 것은 치매라서 통화도 불가능하고, 잘 지내는지 안부조차 직원들 도움 없이는 확인이 안 되는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요양원 단톡방에 안부를 묻는 것이 우리 형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겉모습은 무너져 가는데 언제나 너무 잘 계신다는 그 형식적인 답변이 우리를 더 힘들게 했다. 사실대로 답할 수 없는 뻔한 사정을 알면서도 우리는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다. 아니 엄마를 버린 죄책감을 이렇게라도 정당화해야만 했던 거 같다. 그래도 우리는 엄마를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촉탁 병원에 의뢰할 수 있었지만, 매번 동생과 함께 원래 다니던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직장에 눈치 보이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번거로워도 이래야만 마음이 편해지기에 그렇게 했다. 아니 이래야만 숨 쉬고 살 수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엄마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였다.
인지장애로 더 심해져서 어떤 표현도 예전처럼 하지 못했다. 엄마가 원하는 것은 달콤한 것이 전부였다.
안부를 묻는 것도, 사는 게 어떠냐는 사소한 질문도 엄마에게 듣지 못한 지 벌써 6년이 되어가는 것 같다. 누군가는 지금도 엄마의 잔소리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겠지만 이런 상황이 되면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게 엄마의 잔소리이다.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다고 우리 형제는 가끔 목욕탕에서 말하곤 했다.
누구는 감당도 안 되는 엄마를 집에 모시는 것은 사서 고생하는 거라고 혀를 차기도 하지만 상관없다. 매일 볼 수 있고, 잘 먹지도 못하지만 좋아하는 거라도 드릴 수 있고, 깨끗하게 씻겨 드릴 수 있다면 그 걸도 됐다. 너무나 충만하고 충분하다.
전 날밤 도착하자마자 마무리 집 정리를 했다. 엄마 방은 수도 없이 닦았다. 조명도 은은하게 설치했다. 그리고 이제는 의미 없게 보지만 가끔 찾는 작은 텔레비전도 준비했다. 그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소품과 아빠가 살아계실 때 처음으로 찍었던 가족사진도 선반에 올려두었다.
엄마가 퇴소해서 가장 편하게 하루하루를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늦은 밤까지 준비하면서 동생은 계속 혼잣말로
'좋다….' '좋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동안 마음이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갔는지 묻지 않아도 알기에 그 중얼거림 너무 듣기 좋았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우리 형제는 마지막 외식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엄마가 퇴원하면 밖에서 밥을 먹는 것이 힘들기 마지막이라고 단어를 거창하게 붙이고 낯선 동네 맛집을 찾아서 곱창집으로 향했다.
소주와 노릇하게 구워진 소곱창을 먹으며 우리는 전투에 나가는 군인처럼 결의를 다졌다.
아마도 이 집에 엄마의 마지막 집이 될 거라고 우리는 이야기했다. 그 정도로 엄마의 치매는 시간을 초월해서 빛의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시간이 우리에게 아깝고 소중했다. 남들이 생각할 때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여기는 모든 게 절대적으로 붙잡고 싶은 지푸라기 그 자체였다.
오래된 아파트지만 정 남향이라서 아침 햇살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서둘러 요양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풍경을 보며 각자 상황에 맞게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시련이 다가올지 전혀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 그 자체가 큰 힘이 되기 때문에.
요양원에 도착하니 원장 선생님이 한걸음에 다가와 왜 이렇게 빨리 퇴소하냐고 그동안 정들었다고 연기를 하며 정산서를 내밀었다. 그 연기 앞에서 우리는 싸우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10개월 동안 정말 감사했다고 말하고 정산했다. 그렇게 밑에서 행정적인 처리를 하는 동안 몇 분이 흘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엄마가 내려왔다.
안 본 사이에 엄마는 더 말라 있었다.
머리도 남자처럼 짧게 잘려 있었고, 옷에는 얼룩이 가득했다. 전투 본능이 나를 지배했으나 싸울 가치도 없는 전쟁에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서두르는 우리 형제를 보면서 원장 선생님은 웃으며 밖으로 직접 배웅 나왔다.
엄마한테 정들었다고 말하며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엄마는 그 손을 뿌리쳤다.
엄마에게 원장 선생님 어쩌면 몇 번 보지도 못한 아주 낯선 사람인 듯싶었다. 우리는 빨리 인사를 하고 엄마를 차에 태웠다. 원장 선생님은 마지막에 어이없는 말을 했다.
“나중에 상태가 더 안 좋아지면 꼭 다시 오세요.”
색조 화장으로 얼굴을 두껍게 가린 원장 선생님은 얼굴을 가렸지만, 마음은 가리지 못했다. 마치 더 빨리 아파지라고 바라는 것 같아서 조금 역겨웠다. 소금이 있다면 폭설처럼 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뒀다. 차가 출발하자. 엄마는 우리를 한 단어로 웃겼다.
"사탕 줘!" 뒷자리에 아주 당당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집으로 오는 길에 식당에 가려고 했는데 엄마의 옷이 너무 더러워서 포기하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동생은 도착하자마자 엄마를 벗기고 자연스럽게 바로 목욕을 시켰다. 그리고 곧 나를 화장실로 불렀다. 엄마의 몸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목욕을 마치고 몸무게를 확인하니 28kg이었다.
치매를 떠나서 말라서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동생과 나는 가지보다 더 앙상한 엄마 몸을 보면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엄마가 정말 환하게 웃으며 우리 두 형제와 바라봤다.
그 미소는 정말 행복한 미소였다. 아마 우리의 고통을 느낀 엄마가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엄마 방으로 모시고 갔다. 텔레비전을 틀어주면서 엄마한테 이게 엄마 방이라고 설명해 줬다.
엄마는 말없이 매트리스에 누었다. 기력이 없는지 잠을 자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조금 방을 나섰다. 그렇게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방에서 몇 시간을 잤다.
나는 그 모습을 문밖에서 계속 지켜봤다.
엄마는 편안해 보였다.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도
이 집은 뭐냐고 궁금해하지도
아무런 질문은 없었지만
엄마가 지금 행복한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불행하지 않았다. 며칠 휴가를 내서 엄마의 적응을 동생과 함께 돕기로 했다.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것들을 분주하게 설치했다. 다행히 이사한 집은 포근하고 아늑했다. 최소한 필요한 것만 남기고 버릴 것을 모두 버렸다. 하지만 미니멀하고 짐이 별로 없다고 중증 치매 환자에게 안전한 집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안전을 위해 미리 주문한 물건들이 하나씩 집에 도착했다.
첫 번째 우리가 신경을 쓴 것은 식탐이 강해진 엄마를 위한 잠금장치였다. 만약 동생이 깊은 잠이 든 새벽에 엄마가 홀로 일어나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거나,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그래서 3자리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냉장고 잠금 경첩을 먼저 설치했다. 치매가 아니라면 칼로 손쉽게 해체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해 보였지만, 역시나 엄마는 잠금장치가 혼자 열지 못하셨다. 하지만 며칠 동안 냉장고와 연애라도 하듯 일어나면 바로 냉장고로 가서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열리지 않는 냉장고를 만졌다. 지켜보면서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아주 평범한 것도 불가능하게 만든 치매라는 질병이 원망스러웠다.
다음으로 현관문을 내부에서 열지 못하게 이중으로 잠금을 보강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새벽에 혼자 나가서 다치거나, 길을 잃어버릴까 봐 설치해야만 했다. 혹시 엄마가 열까, 걱정했지만 역시 엄마는 문을 열지 못했다. 이제는 그 흔한 전자 도어록 버튼 누르는 것도 잊어버린 게 바로 엄마였다.
그리고 혹시나 걷다가 넘어질까 봐 엄마 동선에 있는 모든 물건의 위치를, 엄마를 기준으로 조정했다. 직접 걷기도 하고 엄마를 데리고 다니면서 관찰도 하면서 최대한 엄마가 다치지 않게 했다. 물론 쓰레기통도 숨겨야 둬야 했다.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문지방에 넘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신경 써야 했다. 집 안에 모든 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이사한 집은 오래된 아파트지만 화장실이 정말 넓었다. 동생은 처음 화장실을 보고 엄마 목욕시킬 때 편할 것 같다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 모습이 내게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막상 이사하고 집에서 엄마 목욕을 시키려고 하니 작은 플라스틱 의자 앉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체중이 너무 빠져서 이제는 일어서고 앉는 것도 마치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게 돼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 의자를 구매했다. 인터넷에 가격을 보고 놀라기는 했는데 요양 등급으로 감면을 받으니 살만했다. 목욕 의자를 조립하고 화장실 설치해도 공간은 충분했다.
동생은 조립한 의자에서 처음으로 목욕을 시켜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불렀다. 뭔 일인가 해서 한걸음에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은 웃고 있었다. 엄마를 본 나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엄마는 목욕 의자에 도도하게 앉아 젓가락보다 가는 다리를 꼬고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편해 보이기도 하고 웃겨서 슬픈 상황이지만 진짜로 웃고 또 웃었다. 엄마는 두 아들놈 속마음도 모르고 웃는 우리를 보고 따라 웃기 시작했다. 사실 엄마의 알몸을 보는 것이 아직도 힘들고 두렵다. 그래서 일부러 피했다. 다행히 동생이 목욕시켜서 피하고 싶을 때 피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작은 체구에 작은 키로 아담했던 엄마는 이제는 큰 주머니에 직접 넣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잘 먹지 못해서 마른 것을 잘 알지만, 왠지 우리를 키우느라 이렇게 홀쭉해진 거 같아서 엄마한테 미안했다. 이렇게 아프게 된 것이 유전적인 요인이 가장 크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지만, 철없던 시절 엄마 속을 검게 만든 내 잘못 때문일까 후회가 밀려왔다.
엄마에게 미안했던 기억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지금 이렇게 사람인 척 살지만, 모두 엄마 덕이다. 충격적인 사고와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가끔 엉뚱한 사고도 쳤지만, 엄마는 항상 나를 믿어줬다.
일해서 돈 벌겠다고 고등학교를 갑자기 자퇴한 후 1년 동안 방황하며 게임만 할 때도 잔소리도 아끼며 지지해 줬고, 중학교 때 잠시 전화로만 연락한 풋사랑 부산 누나를 만나러 내려간다고 할 때도 미성년자를 떠나 한 사람으로 인격과 풋사랑을 존중해 주며 응원해 줬다. 아직도 부산에서 누나를 찾겠다고 3주간 개고생 하고 거지꼴로 집에 돌아왔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는 좁고 좁은 거실에 누워서 집에 온 나를 보며 한마디 했다.
"아들 잘 다녀왔어? 어때? 근데 후회했지? 얼른 씻어. 엄마가 김치찌개 해줄게."
집에 온 나는 엄마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김치찌개가 너무 맛있어서 할 말을 잃어버렸었다.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나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떨 때는 그냥 기억 속에 두고 혼자 보는 게 좋을 때가 있더라고. 직접 보면 실망하기도 하거든 그럼 기억 속에 좋은 모습이 같이 망가지니까. 좋았던 건 좋았던 상태로 두는 게 그래서 살다 보면 필요해."
기억 속의 엄마와 눈앞에 있는 엄마는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몸이 늙는 것보다 기억이 늙어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 과거라는 지나간 시간을 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기에 그래서 더 엄마의 과거를 대신 기억하고 간직해주고 싶었다. 엄마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어린 시절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엄마의 도도한 목욕이 끝마치고 나는 동생과 엄마 방에 홈 카메라를 다시 설치했다. 엄마가 초기 치매 증상을 보일 때 걱정이 돼서 거실과 방에 두 개를 설치했었다. 경기도로 이사했을 때도 같이 살 줄 알고 설치했었다. 아직도 그때의 영상과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설치하고 있다.
5년 전 첫 영상과 비교할 때 엄마는 많이 변해있었다. 잊고 있었지만, 오래된 영상을 보니 엄마는 너무 건강해 보였다. 집중해서 텔레비전도 보고, 우리랑 대화도 했다. 먹는 것도 혼자 잘 먹었다.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나는 와이파이와 카메라를 페어링 하고 밖으로 나가 테스트를 했다.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실감했다. 영상 재생 버튼을 누르자 엄마 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마음은 조금 씁쓸했지만, 멀리서도 실시간으로 엄마의 자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다.
동생은 같이 살기 때문에, 사실 지금 홈 카메라는 필요 없다. 하지만 내가 엄마를 보고 싶어서 설치했다.
이렇게라도 엄마의 모습을 매일매일 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