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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Oct 21. 2023

11.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이랑 죽는 날까지 살자

50대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와 두 아들  이야기

엄마의 세 번째 CDR 검사를 위해 우리는 휴가를 냈다. 요양원에 모시러 간다고 미리 말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갔다. 두 달 만에 보는 엄마 얼굴인데 얼마나 상했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아직 이렇게 세 명이 모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병원 가기 전날 동생 집으로 왔다. 꽃구경을 인파 때문에 길이 막힌다는 교통방송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차 때문에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관광버스에서 수많은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들이 밝은 표정과 밝은 색 옷을 입고 내리셨다. 가난하고 부자고, 살만하고 힘들고를 떠나 모두 행복해 보이셨다. 중년을 즐기며 지나간 젊은 시절을 보상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한참 어린 우리 엄마가 요양원에 있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팔자니 운명이니 이딴 걸 믿지는 않지만 10년 전 일까지 떠올랐다. 경복궁 근처로 오랜만 셋이 구경을 갔다. 그러다 우연히 길거리에 계시는 흰색 수염의 할아버지에게 우리는 사주를 봤다. 원래 그런 것을 안 하는 우리인데 그날따라 그냥 하고 싶었다.          


"아이고…. 남편 복은 정말 없는데 그래도 여사님이 자식 복이 넘쳐나시네요."     


엄마는 남편 복 없다는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식 복이라는 말에 웃으면서 몇 번이고 우리를 바라봤다.      

나는 할아버지한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냐고 그냥 물었다. 남편 복을 맞췄으니, 족집게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냥 물어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음식 잘 드시네요."     


말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 말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엄마가 사신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거짓말 쟁이었다. 엄마는 오래오래 건강하지 못했다.      


‘자식 복이 있는 건지’ 그 말도 요즘은 믿을 수 없다. 우리 형제는 엄마를 요양원에 두고 왔으니, 엄마가 자식 복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다음 날 아침 병원 갈 준비를 하고 바로 요양원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엄마가 우리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우리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얼굴에는 그 어떤 벚꽃보다 밝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엄마의 미소는 눈이 부셨다. 하지만 엄마가 우리를 보고 너무 반가워하니 그 모습에 우리는 죄책감이 들었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엄마는 변함없이 사탕을 달라고 뒤에서 조르고 또 졸랐다. 주머니에서 엄마에게 사탕 하나를 꺼내서 주면 얼굴을 보니 얼굴에 눈곱이 하나 가득 있었다. 도대체 며칠 동안 세수를 안 하면 저렇게 눈곱이 많이 생길 수 있을까? 예상대로 엄마는 방치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 아무런 관심도 돌봄도 잘 못 받고 계시는 게 분명했다. 동생은 바로 물티슈를 꺼내 엄마 눈곱을 닦아주며 말없이 엄마 손을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재회의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느끼며 작은 차 안에서 침묵으로 슬픔을 표현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시작한 인지 검사는 저번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집중도, 대답도 전혀 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하는 말은 두 아들 이름과 사탕이 전부였다. 선생님은 보호자인 우리에게 대신 질문을 하며 애써 위로해주셨다.

검사 결과를 보기 위해 주치의 선생님을 기다렸다. 나와 동생은 엄마 손을 하나씩 나눠서 잡고 쓰다듬었다. 손은 작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미 관절이 다 상해서 마디마디가 울퉁불퉁했지만, 엄마 손은 마법의 손이었다.

배탈이 나면 배를 동그랗게 문질러주던 따뜻한 어린 시절 엄마 손이 떠올랐다. 작지만 강인하고 당당했던 여자였는데 세월이 한 사람을 이토록 초라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애석했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선생님을 만나러 들어갔다. 우리 형제를 보고 참 잘하고 있다고 잘 버티고 있다고 보자마자 격려해 주셨다. 이렇게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어서 많이 힘들 텐데 엄마가 참 복이 많으신 거 같다고 하셨다.


 아픈 엄마를 돌보는 것이 칭찬받을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엄마가 행복해 보인다는 말에 위안이 되었다. 약물을 더 독하게 처방받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외출 복귀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우리는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이마트에 도착해서 엄마 옷을 고르는데 엄마는 사탕과 과자를 보고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입으로 가지고 갔다. 한 명은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진열대에 다시 물건을 돌려다 놓고, 한 명은 아동 코너에 가서 엄마 옷을 골랐다. 이제 성인 코너에서 엄마에게 맞는 옷은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요양원에 가고 몇 달이 지난 지금 엄마의 체중은 30kg이 되었다.

어렵게 엄마를 아동복 코너로 데리고 왔는데 갑자기 마트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엄마는 그 리듬에 맞춰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는 눈을 의심했다. 손을 모아서 동글게 그리면서 앞뒤로 스텝을 밟고 있었다. 엄마는 너무나 행복하게 춤을 추며 웃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엄마를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이상한 눈초리로 보다가 이내 웃고 말았다. 엄마는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사랑하는 아들을 봐서 행복하고, 가장 좋아하는 사탕이 넘쳐나는 곳에 있어서 더 행복한 것이 분명했다.



엄마의 춤은 한 참 동안 이어졌다.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두 아들에게 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요양원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이렇게 행복하다고 그러니 이렇게 가끔만 와도 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동영상으로 녹화했다. 엄마는 마치 아이돌처럼 카메라를 요리조리 보면서 계속 춤을 췄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춤을 추는구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쑥스러워했던 엄마였는데 아니 어쩌면 우리가 엄마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살았던 게 아닌가 싶었다. 엄마도 사실 이렇게 밝고 유쾌한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우리를 키우고 사는 게 너무 버거워서 지금 같은 모습을 가슴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몇 달이 흘렀다. 

엄마가 요양원에서 간지 벌써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0개월 동안 부단히 노력했지만, 엄마를 8번을 아주 짧게 만났다. 물론 동생은 나보다 몇 번 더 찾아갔었다. 이렇게 우리는 300일 동안 엄마를 버렸다는 죄책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며 살았다. 그 사이에 동생은 집요하게 나를 설득했다. 아니 이제는 선포였다.     

"형, 더는 안 되겠어. 엄마를 모시고 살 거야."     



알겠다고 그렇게 하자고 한 번에 말해줬으면 좋았을 테지만, 동생까지 힘들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모실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더 싫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마음이 약해졌다.

요양원에서 엄마의 모습은 가면 갈수록 더 초라해져 갔다. 내 자식처럼 보살펴 줄 거라는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냄새나는 상태로 외출이나 면회를 가도 우리에게 데리고 나오는 그 태도를 보면서 도저히 엄마를 그런 곳에 둘 수 없었다. 물론 다른 좋은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첫 경험에서 모든 신뢰가 무너지니 다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동생이 모시고 나온다는 말에 힘들어질 것을 알면서도 허락했다. 동생은 신이 나서 직장 바로 근처에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시간을 내서 서울을 오가며 동생 집을 찾으러 다녔다. 출퇴근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생 직장 도보권에 있는 집을 집중적으로 알아봤다. 그렇게 우리는 엄마를 다시 데려오기 위한 나날을 준비했다. 그리고 동생은 월세 집을 계약했다. 그런데 계약하고 보니 집주인이 위층에 사는데 아주 깐깐한 사람인 것을 이사하기 전에 알게 되었다. 


세입자들이 지켜야 하는 사항이라며 관리 차원에서 미리 당부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이후 동생은 이사하기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물론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고 고금리라도 대출까지 받으면 직장 근처에 연립주택을 매수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목돈을 어찌 될지 모르는 빌라에 투자하는 것이 좋은 대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강서구 동생 직장 주변에 저렴한 아파트를 찾고 또 찾았다. 혹시나 우리 형편에 살 수 있는 집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나중에 동생 신혼집으로 살아도 좋을 만큼 편한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며칠을 꼬박 손품을 팔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 눈에 500세대 정도 되는 아주 오래된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매물은 23평이고 가격은 4억 중반이었다. 종전가 비하면 급매물이었다. 직접 내부를 봐야만 될 거 같았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급하게 서울로 가서 동생과 함께 집을 보러 갔다. 동생 직장에서 멀지 않았고, 지하철역도 도보권이었다. 단점이라면 35년 된 구축이라는 점과 주차장이 문제였다. 


하지만 차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생은 회사 차를 주로 몰고 다녀서 주차할 일이 없었다. 문제는 실매물 여부와 내부 집 상태였다.     

어렵게 중개사를 통해서 매도인과 연락하였고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내부가 리모델링이 되어있었다. 그것도 아주 고급 브랜드를 쓴 상태로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집주인들은 나보다 조금 나이가 있는 신혼부부였다. 몇 마디 나누다 보니 대출을 받아서 상급지로 갈아타기 위해 이사 간다고 했다. 그래서 급매라고 말했다.     

나는 동생에게 어떠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이유는 동생 표정이 너무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쓰리룸이라 가끔 내가 올라왔거나 우리 가족들이 온다고 해도 머물기 좋았고, 혹시 동생 여자친구가 놀러 와도 편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 집이 동생의 신혼집으로 너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그 집을 계약했다. 투자 관점으로 접근해도 손해 볼 것은 없었고 강서구 일대 고도 제한이 해제되면 미래에 보상도 기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동생이 소망하던 대로 집주인 눈치 안 보고 엄마를 모실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렇게 그날 계약금을 입금하고 우리는 오랜만에 무겁지 않은 행복한 마음으로 희망을 이야기했다. 물론 빌라 계약금을 날린 것은 조금 속상했지만, 이 집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웃으며 넘기기로 했다.

     

누군가는 우리 형제를 말린다. 고통으로 뛰어드는 결정이 어리석다고 걱정한다. 엄마를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더 걱정하기에 하는 소리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모시는 동생도 지켜보는 나도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겨우 만났을 때 우리랑 떨어지기 싫어하는 엄마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동생과 나는 여전히 엄마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매 순간 느낀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변하는 이 시간에도 엄마는 우리 형제에 대한 사랑을 담아 표현해 준다. 때로는 마트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어떤 날은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기고 하고, 가끔은 싫어도 우리를 위해 조용히 이별을 해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포집 만기 날에 맞춰 8월 이삿날을 정했다. 나랑 동생은 더 바빠졌다. 요즘은 부쩍 통화하는 날이 늘어났다.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엄마랑 여행도 가고 싶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 마음대로 먹게 하고, 추억이 담긴 이마트에 데리고 가서 춤도 추게 하고, 손녀딸도 보여주면서 언젠가 찾아올 이별을 행복하게 준비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이런 시간이 주어졌음에 축복받았다고 여긴다.      


'엄마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기다려. 정말로 집으로 가자. 

그리고 마지막 숨결까지 우리 곁에서 같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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