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살게 되었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고생할 동생에 몸은 지방에 있어도 영혼은 서울 집에 머물렀다. 그래서 틈만 나면 동생에게 전화하고, 홈 카메라로 엄마를 봤다. 동생과 특별히 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엄마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서 걱정으로 통화를 마쳤다.
싱글이라서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퇴근 후 매일 저녁 엄마와 붙어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발이 묶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때로는 자식이지만 벗어나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도움 줄 방법이 없기에 이렇게 미안한 마음을 전화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생은 너무 전화 자주 안 해도 된다고 괜찮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를 해줬다. 작은 말 한마디에 세상에 이보다 더 고마운 존재가 또 어디에 있을까 감사했다.
걱정하는 내게 동생은 별로 힘든 일이 없다고 말했다. 엄마가 1년 전 모시려고 할 때와 달리 저녁에 기운이 없어서 별 행동 없이 침대에 누워만 있다고 했다. 그 뻔한 거짓말을 듣고 나는 다행이라고 태연한 척 말했다.
엄마 방 카메라로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는 나는 동생이 얼마냐고 고생하는지, 엄마가 늦은 밤에 자주 일어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가 움직이면 ‘행동이 감시되었습니다.’라고 알림이 오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동생이 걱정됐다.
동생도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잠을 잘 잔다고 거짓말을 했다. 모두 나를 위한 거짓말이었다. 형이라도 마음 편했으면 하는 그 배려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무엇하나 뜻대로 된다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을 어린 시절 경험을 통해 일찍 배웠다. 그래서 어떤 고난이 와도 남들보다 잘 견딜 수 있다고, 아무리 강펀치도 몸 빵으로 버틴다고 오만한 생각으로 살았지만, 막상 절대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지니 금세 나약해져 버리는 나를 보았다.
그럼에도 한 줄기 희망을 억지로 찾아가며 우리는 버티며 서로 격려했다.
다행히 주간보호센터에서 보호자를 참 많이 배려한다는 점이었다. 운영시간도 생각보다 길었다. 엄마는 저녁 7시 20분쯤 도착했다. 동생이 퇴근하고 아주 잠시 마트에 들러 장을 볼 정도의 시간은 주어졌다. 게다가 토요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주 운영해서 토요일까지 엄마를 보내기로 했다.
처음에 선택권은 없었다. 동생이 격주로 주말에 출근했다. 하지만 회사의 배려로 출근을 안 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생은 토요일도 자기가 돌보겠다고 고집부렸다. 하지만 나는 설득했다.
"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사랑하는 부모를 모신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휴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거라고 네가 지치면 엄마에게 감정적으로 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후회는 네가 평생 후회를 안고 살아야 한다고 그러니 제발 토요일이라도 스트레스 좀 풀고 평범한 사람처럼 잠시 시간을 보내라고…."
동생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운동도 알아보며 그 시간을 활용해서 정비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 시간은 집에서 빨래와 청소, 엄마 물품을 사러 다니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테니스라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이렇게 동생이 서울로 이사하고 나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직장인, 한 아이의 아빠, 대학원생의 모습으로 순간순간을 바쁘게 보냈다. 특히, 박사과정 과제와 소논문은 내게 많은 시간을 빼앗아 갔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렇게 1초가 아깝게 미친 듯이 바쁘게 지내야만 겨우 맨 정신에 버틸 수 있었다.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서 엄마를 포함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에 지진이 나곤 했다.
이렇게 살고 있는 내 모습에 동생은 화를 내거나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응원해 줬다. 동생은 내가 군대를 그만두고 정말 원하는 일을 하루 빨리 시작해서 내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물론 군인도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18살 자퇴 후 지금까지 집에 계속 도움을 주며 2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동생이 나를 잘 따르는 이유도 내가 고생한 것을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생의 응원 내게 마지막 불빛 같은 것이었다.
만약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엄마는 항상 나를 응원했다. 잠시 돌아가도 언제나 괜찮다고 내 길이 옳다고 나를 지지했다. 어쩌면 그 응원 때문에 딴 길로 빠지지 않고 언제나 돌아왔던 거 같다.
다행인 것은 본인도 자극받는다며 직장을 다니며 자격증 및 다른 것들도 부지런히 한다는 것이다. 마냥 힘들다고 술통에 빠져 살아도 아무 말도 못 했을 것이다. 힘든 사람이 힘들다고 말하는데 뭐라고 말리겠는가. 그래서 지금 상황이 참 다행이구나 싶었다.
학회 게재할 소논문을 지도교수님 최종 검토까지 받고 바로 학회에 접수를 마쳤다. 나는 그 길로 바로 서울로 차를 돌렸다. 요양원에 있을 때는 보고 싶어도 엄마를 보는 게 힘들어서 짜증 났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
동생 집으로 가면 언제나 엄마가 그곳에 있다. 그래서 유난히 행복했다.
늦은 밤 고속도로는 뻥 뚫려 있었다. 오디오북을 들으며 운전하는 그 평온한 시간은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는 자정이 조금 넘어 동생 집에 도착했다. 동생에게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자라고 했지만, 착한 놈은 야식까지 시켜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엄마를 보기 위해 엄마 방을 열었다.
엄마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평범해 보였다. 그냥 보통 사람보다 많이 마른 그런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그 누구도 중증 치매로 인지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 못 것 같았다.
동생과 3주 만에 만나서 우리 형제는 주방 작은 식탁에 앉아 맥주를 한 캔 마시며 엄마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흘렀을까 갑자기 엄마가 방에서 나오셨다. 보통 이 시간에 주무신다고 했는데 아마도 우리가 떠드는 소리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일 아침에 하기로 생각한 포옹을 하루 당겨서 했다. 엄마는 가늘고 연약했다. 살보다 뼈가 먼저 닿았다. 하지만 따뜻했다.
엄마는 조용히 식탁 의자에 앉아 우리가 먹고 있는 안주를 봤다. 엄마가 좋아하는 달콤한 것이 없어서인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엄마는 곧 자리를 떠나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벽만 바라봤다.
나와 동생은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맥주를 먹었다. 잠시 후 엄마는 냉장고 앞에서 와서 냉장고 문을 열기 위해 최고의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냉장고는 잠금장치는 튼튼했다. 결국 엄마는 열지 못하고 우리 형제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동생은 안타까웠는지 엄마가 유일하게 잘 먹는 카스텔라 빵을 드렸다. 하지만 엄마는 먹자마자 다시 냉장고 앞으로 가서 사투를 벌였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참 어린아이와 같다고 느꼈다. 이렇게 다시 우리는 아이로 돌아가는구나 싶었다.
엄마를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동생 직장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있어서 잠시 눈길을 드리지 못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엄마가 아주 또박또박한 목소리와 예전 말투로 우리에게 말했다.
"야, 얼른 냉장고 좀 열어봐!"
나와 동생은 깜짝 놀랐다. 엄마가 말을 안 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말해도 ‘사탕’ 정도의 단어가 전부였다. 하지만 방금 그 말투는 정말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온전한 말투였다.
우리는 엄마를 바라봤다. 아주 강렬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힘차게 냉장고를 손가락질했다. 열어 달라는 최후의 통보처럼 보였다.
우리 형제는 새벽 1시에 엄마 때문에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왜 우리를 웃게 했는지 아마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모를 것이다. 엄마는 우리가 웃는 모습을 보더니 한참 뒤 냉장고를 포기하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옆에 앉은 엄마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생은 웃다가 옆에 앉은 엄마에게 농담을 던졌다.
"김 여사, 혹시 지금까지 치매 환자 연기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동생의 말에 한 번 더 웃었다. 엄마는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를 따라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그때 예전에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형, 우리가 양쪽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아주아주 멀리서 누군가 본다면 분명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 같아. 멀리서 보면 엄마가 치매인지, 우리가 사실 울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그냥 멀리서 보면 모든 게 다 좋아 보이잖아."
나는 오늘도 이 상황도 누군가 멀리서 봤다면 아주 화목하고 행복한 집안이라고 생각했구나 싶었다. 불행과 어려움, 힘든 따위는 전혀 없는 웃음이 가득한 행복한 가족이라고 부럽다고 하면서.
나는 엄마를 다시 방으로 눕혀 드리고 거실에 누워 잠자기 전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 동생 말대로 엄마가 우리 형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연기하고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우리에게 모든 게 몰래카메라였다고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냉정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말을 던지며, 때로는 김치찌개도 만들어 주고, 때로는 같이 여행도 가고, 때로는 2시간 넘게 엄마랑 이야기하며 아들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때의 엄마가 미친 듯이 그리웠다.
그렇게 나는 그날 밤 옛날의 엄마 모습을 꿈속에서 보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 힘들어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하루가 아직은 남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눈가는 촉촉해도 입에는 미소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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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슬프다. 좋은 일만 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형제에게 좋은 일은 별로 없기에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린다.
억울하고 안쓰럽고 때로는 버겁기도 하다. 엄마가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 것조차 세상은 허락해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엄마는 세상과 작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세상과 이별하기에 그 이별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엄마의 삶이 엄마 것이 아닌 상태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엄마는 외롭게 컸다.
어려운 형편에 버려졌고, 성인이 된 후 할머니와 누나를 만났다. 억울하고 화가 났을 어린 엄마는 착했다. 내가 본 엄마는 그분들을 원망하고 있지 않았다. 나라면 아마도 원망하고 미워했을 텐데. 왜 자신을 버렸냐고 하면서. 하지만 엄마는 지금이라도 핏줄을 찾은 것에 감사했고, 의지했다. 여기까지만 불쌍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엄마는 남편 복도 없었다. 아빠가 정말 최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어린 시절 한때는 다정하고 열심히 살았던 그 순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는 게 어렵다 보니 서서히 무너지고 망가지고 쓰러져 갔다. 결국 부담과 책임감은 고스란히 엄마에게로 왔다. 그렇게 엄마는 다시 마음을 잡고 우리 형제를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왔다.
지금은 이렇게 효자인 척 글을 쓰지만 나도 동생도 엄마 가슴에 대포를 쏘아 댔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엄마는 작은 어깨로 우리를 지지하며 믿어줬다.
사실 나는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지 않는다. 현실이 그렇다. 정말 행복해져야 하는 사람은 더 불행해지고, 불행해야 마땅한 사람은 평생 불행이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작별한다. 엄마를 보면서 더욱 공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만약 세상이 공평하다면 적어도 우리 엄마에게 이런 병을 줬으면 안 된다고, 믿는 신도 없으면서 가끔 너무 답답하며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떠들어 댄다. 그래서 나와 동생은 엄마한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우리는 엄마에게 삶의 이유였고, 자랑이었고 자부심이었고, 심장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부족하지만,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엄마를 사랑한다.
아직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 슬프지 않다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와 두 아들 이야기는 매거진을 통해 계속 됩니다. 독자분들의 격려가 얼마나 저희 형제에게 큰 위로가 되었는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응원해주시는 만큼 어머니가 끝까지 행복하실 수 있도록 매일매일 사랑하며 살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