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직장 근처로 이사를 하고 엄마와 동생이 생활한 지 어느덧 두 달이 되어간다. 이사 전부터 지금까지 짧게 몇 번을 올라갔었다. 올라갈 때마다 항상 동생이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청소나 음식 등 가사 일을 도와주고 엄마와 함께 밖을 나가는 것을 함께 했다. 그런데 최근에 연락이 왔다. 약간 미안한 말투로 뜸을 들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형 이때 사흘정도 아니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휴가 낼 수 있어?"
"휴가? 모두 평일이네. 무슨 일인데?"
동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번에 병원에서 새로 추진하는 사업 때문에 일본 출장을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 그래? 일본? 너 정말 가고 싶어 했던 나라잖아. 좋겠다. 잘됐다!"
나는 동생이 출장을 간다는 말이 좀 어색했지만 기뻤다. 이제 병원에서 정말 자리를 잡아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생은 엄마를 부탁하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린 듯했다.
"고마워. 근데 형도 일을 많이 빠져서.. 그리고 엄마랑 계속 있으면 힘들 텐데.."
나는 약간 서운했다. 마치 엄마 아들이 한 명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살짝 들었지만, 최대한 유쾌하게 말했다.
"걱정 말어. 엄마가 작은 아들이랑 있다가 큰 아들이랑 지내는 게 뭐가 이상해서. 내가 직장에 잘 말하고 어떻게든 시간 만들어서 갈 테니까. 넌 출장 준비나 잘해."
밝은 목소리를 말하니 동생은 약간 마음이 놓는 듯했다.
물론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나도 눈치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일단 기간이 길었다. 그 사이에 대학원 수업도 있었다. 박사과정이고 발표하는 순번이 아니라서 괜찮았다. 하지만 다음으로 가족이 떠올랐다. 외국인이고 니 것과 내 것이 명확해서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평소에는 무관심한데 이런 식으로 오랜 시간 육아에서 열외 하면 서운하다는 식으로 바로 표현했다. 물론 한 두 번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화가 치밀어 올라오고 이런 상황에 저런 발상을 하는 자체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한국사람끼리 결혼해도 이런 상황이면 서로 힘들 텐데 나는 문화가 전혀 다른 사람과 한 집에서 살고 있으니 마찰이 생기면 불꽃이 대형급 화재로 번지곤 했다.
다음은 직장이었다. 아무리 20년 차라고 해도 눈치는 당연히 보였다. 책임질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계급이 낮으니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를 하고 승인받아야 하는 절차가 여간 불편했다. 그 사이 엄마 일로 휴가를 많이 써왔기에 눈치 주지 않아도 스스로 눈치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무원의 장점을 앞세워 그냥 모른 척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누군가 내편에 서서 말해 준 적도 있지만 월급이 들어오면 왠지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밀려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엄마를 요양원에서 모시고 올 때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엄마는 24시간 누군가와 항상 같이 있어야 했다. 주간보호센터는 말 그대로 주간에 엄마를 보호한다. 야간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가족들의 몫이었다. 누군가에는 지친 몸을 위해 휴식을 주는 달콤한 밤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완전한 휴식은 없었다.
동생은 엄마랑 같이 지내면 웃을 일이 많을 거라고 내게 말해줬다. 그 말은 엄마가 밤에 나름 많은 활동을 한다는 것으로 들렸다. 나는 그냥 웃으며 뭐 때문이냐고 묻지 않았다. 동생도 세부적인 것을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화요일 새벽 비행기로 일본에 가기 때문에 나는 월요일 퇴근과 동시에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이것저것 짐을 한가득 챙겼다. 낮에 남는 시간에 할 일도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생 집에 수리가 필요하다고 한 부분을 고치기 위해 연장도 챙겼다. 내가 짐을 싸는 동안 가족은 아무 말 없었다. 대신 금요일 언제 오냐고 계속 물었다. 이유는 한 달 전에 말한 여행 때문이었다. 외국인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은 간다고 말했었다.
사실 동생이 출장 이야기를 안 했다면 금요일까지 까먹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 오냐는 물음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왠지 너무 따로따로 인 것 같아서 울화가 치밀었다. 최근 있었던 일도 있고 해서 그냥 대답을 회피하는 것으로 소심한 감정표현을 했다. 만약 내가 지금 입을 열면 또 화를 낸다고 오해하거나 곱게 보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이제는 어설픈 영어 엑센트에서도 내 감정을 찾아내고 나를 몰아세우기 때문에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하거나 카톡을 보내곤 한다. 차라리 감정을 볼 수 없는 글이 속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일을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왠지 피곤했다. 휴식의 시간이라고 여기려고 노력해도 엄마랑 오랜만에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무엇인가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같이 있기 싫어서가 아니라 보고 있으면 내가 견디기 힘들까 봐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었다. 다가오는 파도를 막을 방법은 해변의 돌멩이들은 배우지 못해 모래알로 변하고 만다. 안타깝게도 우리는아직 돌멩이라서 깎이고 아파할 마음이 남아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도착했다. 서울 한복판 구축 아파트는 주차할 곳이 없었다. 나는 몇 바퀴를 돌고 돌아 모퉁이 한 구석에 차를 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동생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차로 오는 동안 몇 번 통화를 했다. 동생은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춰 음식을 시키겠다고 무엇을 먹겠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아무거나 시키라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훤히 보였다. 식성이 비슷해서 난 그냥 아무거나 라고 말했던 것뿐인데 동생은 알면서 유난히 몇 번이나 물었다. 미안함에 대한 표현이구나 싶었다.
내가 식탁에 앉자 동생은 내 얼굴을 쳐다봤다.
"뭐가 그리 힘들어? 얼굴이 영 별로네?"
"그래? 요즘 그냥."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제 이놈에게 말하는 것도 자중해야겠다고 요즘 생각했다. 안 그래도 엄마를 모시고 사느라 스트레스를 받을 텐데 형이란 놈이 동생에게 투정 부리는 건 아니다 싶었다.
동생은 나를 항상 등대로 표현했다. 존경한다고 하면서 그런데 사실 요즘 동생이 나의 등대이다.
나에게 힘내라고! 할 수 있다고 진심이 담긴 용기를 주는 사람은 동생이다. 이런 위로와 용기를 결혼한 배우자에게 받으면 가장 좋겠지만 세상은 언제나 얇밉도록 공평하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는 동생이 계속 마음에 걸려 나는 야식을 거의 흡입하듯 먹어치웠다. 동생은 엄마를 돌보는데 필요한 것들을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보호센터 전화번호만 넘기면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신경 쓰지 말고 출장이나 신경 쓰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딸이 태어났을 때가 떠올랐다.
아주 어린 아기일 때 가족은 종종 외출을 했다. 나는 한 번도 막아본 적이 없다. 막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걱정되었는지 어떻게 아이를 챙기면 되는지 계속 말했다. 속으로 이렇게 걱정되면 친구들 집으로 초대하거나 데리고 가지 뭐 하나 싶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는 초등학교를 다닌다. 요즘 가끔 보면 언제 이렇게 컸나 세월을 의심하기도 한다.
문득 엄마의 치매도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 완치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치료제라도 나온다면 모든 걸 다 털어서 사기 위해 가장 먼저 준비할 텐데 이런 행운은 안타깝게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았다.
나는 서둘러 동생을 재우고 혼자 밖으로 나왔다. 내일부터 홀로 밤길을 걷는 이 산책도 불가능할 테니 가을밤을 즐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조용히 근처 공원으로 가서 핸드폰에 적어둔 메모장을 열었다.
- 엄마 목욕시키기
- 아침밥 준비 0630
- 엄마 겨울옷 정리하고 주간에 사러 가기
- 엄마방 침대 설치하기
- 현관문 잠금장치 설치하기
- 엄마랑 같이 산책하기
- 엄마 머리 말려드리기
혹시 빠진 것이 있나, 더 해야 할 일이 있나 곰곰이 앉아서 생각했다. 그러다 매일매일 이렇게 보내고 있는 동생이 떠올랐다. 나처럼 걱정 많고 미래가 불안하고 생각할 것이 넘쳐날 텐데 그 희생을 혼자 감당하겠다고 말한 동생이 눈에 아른거렸다.
아마 잘 태어났다면 어쩌면 더 훨훨 비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내 동생 인생도 안쓰러웠다.
그동안 나만 잘 살겠다고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한 건 아닌가 반성도 하면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동생 케리어에 조용히 봉투를 넣었다.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가고 싶었던 일본인지 잘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