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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Nov 03. 2023

53. 엄마 생각하다가 버스를 박았다.

마음도 아픈데 몸까지 힘들어졌다.

동생 출장기간 동안 엄마랑 보낸 시간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동안 동생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몸으로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엄마가 주간보호센터를 갔기에 아침과 밤에만 같이 있었지만 그 시간 짧은 시간도 지치기에 충분했다. 아침은 언제나 정신없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엄마를 준비시키는 것은 6살 딸아이를 준비시켜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갔다. 하지만 엄마의 깜짝 애교와 황당하지만 귀여운 행동으로 상쇄할 수 있었다.


가장 걱정되지만 어쩔 수 없는 시간은 밤이었다. 특히 나처럼 밤에 잠들면 지진이 나도 못 일어나는 유형의 사람에게는 특히나 불안했다. 그렇다고 홀로 불침번을 서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뭔가 큰 소리가 나면 나도 모르게 눈이 떠지기는 했다.


동생이 오기 하루 전날 밤, 이상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보통은 화장실 주변에 있는데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계속 긁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나는 돌덩이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쓰러지듯 빠져나와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거실에 있는 엄마를 보고 나는 멍하니 한참을 바라봤다. 엄마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엄마가 잠들기 전 음식이 들어있는 모든 곳은 잠금장치로 잠근다. 엄마가 아무거나 먹거나 혹시 음식 때문에 다시 잠을 자지 않고 돌아다닐까 봐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엄마 쇠줄로 잠겨 있는 냉장고에 앞에서 서서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겠는 작은 가위를 들고 쇠줄을 열심히 긁고 있었다.

그냥 버튼을 누르면 바로 열리는데 엄마는 처절하게 그것을 잘라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슬펐다. 어떤 지독한 병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는 원망스러웠다. 냉장고에 엄마가 좋아하는 특별한 것도 들어있지 않았는데 아마도 엄마는 냉장고가 보물상자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나는 한참 동안 엄마의 마른 몸을 바라봤다. 그냥 말없이 조용히 엄마의 모습을 가슴속에 넣고 있었다. 멀지 않은 언젠가 이 모습도 그리워서 나를 미치게 만들 것을 잘 알기에 기억에 그 행동 하나하나를 깊이 넣어두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마음을 채우고 엄마에게 다가가 뒤에서 백허그를 했다.

이렇게 여자를 뒤에서 안아 본적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엄마는 놀랐는지 가위를 내려놓고 고개를 떨궜다. 엄마의 몸은 보잘것없었다. 목욕을 시킬 때도 안쓰러워 샤워기에 흐르는 물로 눈물을 감췄는데 뒤에서 끌어안으니 그 연약함과 부서질 거 같은 약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떻게 이런 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걸까.. '

'지금 엄마에게 남아 있는 의식은 무엇일까?'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엄마가 행복하다고 더 느끼게 해 드릴 수 있을까?'


내 머릿속은 어지럽도록 돌고 돌았다.


한 동안 엄마의 체온 느끼고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드렸다. 엄마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활짝 웃으며 냉장고 안에 머리를 넣고 정신없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 엄마를 보며 뒤에서 조용히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아무것도 없어. 거기에 사탕 없어."

엄마는 사탕이 없다는 말을 듣고 대답했다.

"없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응, 없어. 엄마 방으로 가면 아들이 사탕 금방 만들어 올게. 가자 방으로."

사탕을 만들어 온다는 말에 고분고분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엄마를 눕히고 싱크대에 숨겨둔 무설탕 사탕을 꺼내서 방으로 갔다. 엄마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포장을 뜯고 입에 넣어드렸다. 향긋한 향기를 느끼며 엄마는 눈을 감았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시간을 보니 어느덧 새벽 4시가 되어 있었다.


엄마를 홀로 보내는 다음 날 아침 알람을 듣고 일어나서 아침을 차렸다. 오늘도 안 먹고 과자를 달라고 하겠지만 뭐라도 만들어야 내 속이 편했다. 이렇게 차린 음식에 손도 안 대고 떠나면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래야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서 어릴 적 못난 내 행동이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엄마는 아무리 바빠도 우리 형제나 아빠에게 아침을 차려주셨다. 빵도 아니고 국이랑 반찬 그리고 쌀밥을 주셨다. 지금 결혼해서 빵조각도 구경 못하고 커피로 배를 달래고 일터로 나가는 일상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그때 엄마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겨우 깨닫는다. 그런데 어릴 적 나는 못된 아들이었다.

먹을 시간도 부족한데 무슨 국이냐고 엄마한테 투정을 부렸다. 어떤 날은 맛없다고 이게 뭐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엄마의 표정은 돌하르방처럼 어둡게 변했다. 하지만 철없고 못된 아들놈은 미안한지도 모르고 한참을 그랬다. 지금은 먹고 싶어도 절대 먹지 못하는 음식인데 그때만 해도 내가 엄마처럼 늙을 때까지 계속 엄마한테 말하면 언제나 엄마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한심한 착각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엄마가 내게 소심한 복수를 하는 건 아니가 싶었다. 너도 그랬으니 나도 그러겠다고.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만들어도 나도 바쁘니 그냥 사탕을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날도 역시나 엄마는 음식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그냥 보낼 수 없어 결국 달달한 것을 꺼내서 드렸다. 그렇게 아침을 먹이고 차량이 올 때까지 먼저 나가서 엄마 손을 잡고 아파트 주차장 주변을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옆에서 지켜본 엄마 모습은 피곤해 보였다. 머리도 눌려있고 뭔가 지저분한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불편했다. 센터에 있는 동안 아무리 행동이 이상해도 겉모습이라도 깨끗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야 그곳에 계시는 분들도 무시 안 하고 더 잘 챙겨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에서.

하지만 준비를 시킨다고 해도 부족하고 부족했다. 결국 나는 엄마의 눌린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엄마를 차에 태웠다.


익숙함이 무섭다고 엄마를 보내고 바로 집으로 올라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특별히 할 일은 없었지만 집에 머물기 싫었다. 엄마가 떠난 집은 고요하고 평범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노트북과 과제를 챙겨서 나오려고 하는데 아침에 한기를 느끼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 되겠다 싶어서 쇼핑몰로 향했다. 익숙하게 유니클로 아동복 코너로 갔다. 이제 성인 사이즈는 엄마에게 무조건 오버핏이기에 아동복을 입혀야 했다. 아동복 중에서 입어도 가장 어울리는 옷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아파도 남들 눈에 이상한 사람을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아 코너를 찾고 찾아서 안에 기모 안감이 들어있는 따뜻한 옷을 몇 벌을 샀다.

며 칠 동안 같이 지내고 보니 아무리 새 옷을 입혀서 보내도 센터에서 돌아오면 엄마의 옷을 얼룩으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동생은 일본 출장 중에 걱정이 됐는지 계속 카톡을 보내왔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도 일이지만, 저녁때는 한적한 시간 좀 가지라고 말해줬다. 욕심만은 나는 허영심과 욕망을 찾아서 해외를 많이 기웃거렸다. 유학휴직을 내고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어서 필리핀 어학연수을 다녀왔고, 그것도 모자라서 영국에서 반년 넘게 공부를 했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공부를 하는 동안 주변 나라 몇 곳을 다녀왔다. 이렇게 될 줄 몰랐기 때문에 미래는 행복으로 가득할 줄 착각하고 젊음이라는 핑계를 내세워서 그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경험 덕분에 지금이 아주 비참하지는 않다. 그런데 동생은 그렇지 못했다.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온 적도 없었다.

동생은 틈만 나면 우리 집 기둥이 돼줘서 고맙다고 나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부끄럽다. 오히려 동생이 지금 우리 집에 가장 큰 기둥인 것 같다. 혼자 모든 것을 감수하고 형이 힘들어할까 봐 티도 내지 않는 그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저녁 11시가 돼서 동생은 피곤한 모습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두 손에는 선물이 가득했다. 딱 봐도 조카 선물이었다. 산리오 캐릭터에 푹 빠진 조카를 위해 일본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을 것이 분명했다.


"잘 다녀왔어?, 배고플까 봐 뭐 좀 만들었는데 먹을래?"

"고마워, 형. 엄마는?"


오자마자 엄마 걱정을 했다. 지금 주무신다고 말하고 동생 밥을 차렸다. 그렇게 우리는 새벽 1시까지 수다를 떨었다. 일본 요양원을 방문해서 시스템을 확인하고 병원에서 앞으로 시작할 사업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했다. 신이 나서 말하는 동생을 모습을 보니 불편한 마음이 잠잠해졌다.

이놈도 이렇게 미래를 꿈꾸고 밝게 살 수 있는데 힘들게 사는 게 안타까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하루하루 사람 노릇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했다.


다음날 아침 엄마 보낼 준비를 같이 하고 새로 산 옷을 입혀서 센터로 보냈다. 동생은 바로 출근을 하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딸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돌아갈 곳으로 가는데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집에 와서 주말 내내 신경이 쓰였다. 엄마 걱정보다 동생이 더 걱정됐다. 표현은 안 했지만 세금문제로 직장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일할 것이 많아 보였다.

 야근을 하지 못하는 이런 환경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집이라도 가까웠다면 매일 동생 집에 가서 대신 엄마를 돌봤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늦은 저녁 차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도 없이 동네를 서성였다. 머릿속이 복작해서 비우고 싶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앞이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앞으로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찰나였지만 나는 앞유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귀에서 삐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몇 초였지만 시간은 길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버스를 박은 것이었다. 그것도 정차해 있는 버스를.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차에서 내리자 기사분도 내려서 내게 다가왔다. 순간 무슨 일인가 싶었다. 왜 내가 버스를 박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막차라 그런지 승객분들은 4명 정도 버스 안에 보였다. 경미한 사고였다.


하지만 기사분은 허리를 부여잡았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하고 같이 블랙박스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나는 버스 앞에 정차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발을 했다. 거리는 10m도 안되었기에 경미한 사고였지만 모든 것이 나의 과실이었다.

19살 면허를 따고 이렇게 사고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놀랐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보험사 직원까지 떠나고 난 후 자리에 주저앉았다. 뭔 일인가 싶기도 하고 머리도 아팠다. 누군가에서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이해조차 못할 것이고, 동생은 걱정하느라 밤 잠을 설칠게 뻔했다.

몸이 여기 있어도 정신이 딴 곳에 있으니 이런 사고까지 나는구나 싶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11시지만 우리 집은 새벽보다 더 고요했다. 그 고요를 깨면 바로 싸움이 되기에 이런 고요함을 존중해줘야만 했다.  아무리 경미해도 무방비 상태로 부딪친 머리는 미묘한 진동이 있었다. 빨리 오늘을 잊고 싶어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조용히 내 방 침대에 누웠다.


무슨 큰 일도 아니지만 서러움이 밀려왔다. 약해지면 안 되는데, 약한 모습보이면 안되는데 어딘가 기대고 의지하고 싶었다.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버틴 시간이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내가 주저앉으면 안 되기에 강한 척하면서 지낸 세월이 나를 압박했다. 그동안 내린 모든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들. 어른이 되는 과정이 이토록 가혹한지 미리 알았다면 더 준비를 했을 텐데 아직도 부족한 것 투성인 것 같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ymother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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