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요양원에서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응급실에 엄마가 무사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작은 충격에도 가루처럼 부서져 버릴 정도 약한 엄마라서 더 걱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치매 증상 중 인지장애가 심한 엄마는 아픔에 대한 표현법을 거의 잃어버렸다. 결국 누가 발견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방치되고, 발견하는 과정에서 받는 검사도 위험했다.
손가락에 작은 가시가 박혀도 불편해서 인상을 찌푸리는 게 정상인데 그 가시가 박혀 염증으로 골음이 나올 때까지 아무 대항도 못하는 연약한 상태라서 이번 사고가 무사히 넘어가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 엄마.. 위세척은 안 해도 될 거 같다고 하는데...."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야.."
"근데 내시경은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네... 아니 지금 하러 들어갔어."
"어? 위 내시경? 수면으로?"
"아니.. 비수면으로 한다고..."
"엄마가 비수면을 어떻게 감당해? 말이 안 되잖아.."
"어.. 상태를 의사도 보고 말도 했는데.."
물론 내시경을 통해 확실히 확인하는 것이 맞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그 과정을 감당할 엄마를 떠올리니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왔다. 건강한 나도 비수면으로 내시경 하면 역겹고 힘들어서 발버둥을 치는데, 분명 엄마가 처참하게 제압당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검사대 위해서 바둥거리며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한 아무런 자각도 없이 무너지고 있을 엄마를 떠올리니 눈물샘이 바로 열려 버렸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동생은 말을 이었다.
"일단 검사 마치고 큰 이상이 없다고 하면 우리 병원에 입원시켜야 할 거 같아. 내가 오늘 마감이라서 꼭 출근을 해야 하는데 지금 급하게 나와서 슬리퍼에 머리도 못 감아서..."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잠시 머뭇거리며 서울로 못 올라간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떤 상황인지 안 봐도 뻔히 보였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엄마 입에서 파란색 세정제가 흘러나오는 그 모습에 당황하고 준비할 틈도 없이 응급실로 온 동생의 상황이 아픈 엄마만큼이나 나를 아프게 했다.
"형이 지금이라도 올라갈까? 너 바쁘잖아."
"아니야. 형도 매번 이러는 거 눈치 많이 보이잖아. 그리고 너무 멀어."
"일단 검사 마치고 바로 전화할게. 우리 병원에 입원하면 수액처방도 부탁하고 피검사도 하고."
내 걱정을 해주는 동생에게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죄책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한편으로 동생이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짐을 많이 덜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도 했다.
"아! 맞다. 형!."
"어 말해."
"엄마... 간병인 보험 같은 거 있나?"
"간병인?"
"아무래도 통합병동 자리가 없어서 간병인이 필요할 거 같아서. 근데 비싸지?"
"간병은 없어. 근데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 우선 병원으로 입원하는 거 확정되면 알려줘. 그건 걱정하지 마."
"어. 전화할게."
비용적인 부분을 걱정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동생에게 그런 짐까지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희생하는 사람은 나보다 동생이었다. 물론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부담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정해진 월급은 매달 빠듯하다. 그동안 퇴직준비를 하면서 꾸준히 모아둔 것들을 간신히 유지하면서 모든 비용을 감당하고 있지만 가끔은 위태롭다고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가족과 돈 관리를 철저하게 따로 하고 있지만 아내는 이런 내 상황을 별로 좋게 여기고 있지 않았다.
몇 달 전 오랜만에 외식을 하면서 전역하면 주택자금이 추가로 들어가고 내가 새로운 직장 잡거나 계획한 것들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니 지금까지 내가 더 많이 부담했던 부분을 조금 나눠서 가족도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과금과 학비를 포함 고정비용은 모두 내가 부담하고 있었기에 꺼낸 이야기였다. 물론 상황이 좋지 않아서 전역에 대한 망설임이 있지만 그렇다고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미루면 평생 원망하게 될 것 같았다. 아내가 내편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모든 일처리는 매끄럽지 못했다. 가족은 엄마 병원비를 내가 모두 내고 있고, 내 월급으로 그런 비용을 감당하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자기에게 지금보다 조금 더 부담하라고 하니 그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물론 서운했다.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이 상황은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줬다. 내 돈은 내 돈이고, 니 돈은 니 돈이 맞지만 공평하게 내 돈이 아깝다는 말로 들렸다. 공평하게 해도 본인이 육아를 더 부담하니 자신은 더 희생자라고 말하는 가족과 말을 섞어봐야 결론은 뻔했다.
딸아이 앞이라서 싸움을 피하기 위해 화살처럼 가슴에 쳐 박히는 정 없는 영어 문장을 그냥 삼켰다. 여기서 내가 한마디 하면 바로 큰 싸움이 될 것이 뻔했다. 이런 속사정을 동생도 물론 알고는 있었다.
몇 시간이 흐르고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검사는 무사히 마쳤고, 다행히도 많이 체외로 배출돼서 세정제 잔여량이 조금 위에 남아 있지만 약물처방을 하면 세척은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체내에 남은 소량이라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기에 정말 관찰이 잘해야 하고 혹시나 무슨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응급실로 와야 한다고 했다.
결국 동생은 슬리퍼에 누추한 차림으로 엄마를 모시고 자기가 일하는 병원으로 가서 입원을 시켰다. 직원들에게 그 모습을 보일 때 동생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감시 상상이 안 되었다. 바쁜 것 같아서 길게 대화는 안 했지만 간병인까지 배정받고 밀린 일을 하기 위해 씻고 다시 직장으로 가는 것 같았다.
담담하게 버티기에 어쩌면 우리는 절벽 끝자락에 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끝도 없이 깊은 절벽 밑으로 한없이 떨어질 것이 뻔했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지금 이 상태가 조금이라도 평화롭게 지속되기를 바랐지만, 사고는 끊임없이 터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에게는 기댈 곳이 절실히 필요했다. 서로서로 의지하며 두 손을 꼭 잡고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의 다른 손길이 필요하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엄마의 소식을 기다리고 반응하면서 일터에서 보낸 시간은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정신없이 흘러갔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해서 나는 한참 동안 차 안에서 내리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 기분으로 집에 가봐야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설령 말한다고 이해나 위안이 될 일은 없기에 그저 무거운 감정을 딸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차에서 내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멍하니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딸에게는 일이 많다고 거짓말로 카톡을 보냈다. 행복한 것만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나란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라서 이런 선택을 종종 하곤 했다.
한참을 생각을 비우고 있는데 저녁 10시쯤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카페구먼?"
"어.. 엄마는?"
"간병인 분이 잘 보살펴 주시네.. 파란색 세정제도 이제 거의 안 나와."
"다행이다. 다행이야. 퇴근하는 길이야?"
"어 이제 조금 급한 게 마무리돼서.."
"빨리 가서 쉬어. 정말 힘들었을 텐데.."
"형.. 엄마 이왕 입원한 거 3일 정도 계시야..."
"어, 그렇게 해. 그렇게 하면 되지."
"내가 일도 많고, 병원에 오랜만에 오니 다들 엄마를 반가워해서 검사도 좀 받고.."
그렇게 엄마는 며 칠 더 입원하게 되었다. 다행히 후유증이나 다른 증상은 없었다. 간병인 분이 음식을 먹여주면 잘 드신다고 동생은 신기하다는 듯 몇 번 전화로 이야기해 줬다.
이후 동생과 통화할 때 그놈이 많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인이 세정제를 살 때 다른 형식을 된 것을 샀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자책하고 있었다. 돈 몇 푼 아끼겠다고 그걸 사서 집에 방치해 둔 것 때문에 엄마가 힘들게 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런 동생에게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토닥거렸다. 집에서 중증 치매환자를 돌본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이런 일이 몇 번은 생길 거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다. 매번 놀라겠지만 누군가의 잘못을 따지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동생 말처럼 지금처럼 사고 치는 순간이 분명 그리워질 거라고, 엄마가 거동을 못하게 되면 그때는 보살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보내줘야 한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그러니 형도 약해지지 말고 형 하고 싶은 거 엄마나 가족 때문에 더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고. 충분하다고.
이런 상황에서 동생에게도 내 걱정을 해주는 이 놈이 있다는 것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동생이 나를 많이 따른다고 엄마가 건강할 때 자주 말하곤 했다. 그리고 엄마는 우리가 잘 지내는 모습이 너무 든든하다고 좋다고 그래서 참 행복하다고 했다. 아마 엄마가 버려져 의지할 곳도 혼자 자라면서 형제자매가 주변 친구들이 부러웠을 것이다. 표현도 못하고 그 부러움을 간직한 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지내는 모습이 엄마에는 큰 의미가 되었을 것이었다.
엄마한테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엄마의 그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래서 어린 시절 동생이 조금씩 방황할 때마다 손을 내밀고 잡았는지도 모른다.
나를 믿고 내 손을 잡고 잘 따라와 준 동생에게 고맙다. 지금은 나약해져 가는 나를 어쩌면 동생이 잡아주고 있는 것만 같다.
<두 아들과 치매환자가 된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브런치 북입니다.>
[브런치북] 엄마 방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brunch.co.kr)
<미웠던 원망했던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결국 사랑했다는 깨달음을 담은 첫 번째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