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는 그 모습이 내가 바라던 행복이었다.
금요일 기차 예매가 안되었기에 아내는 엄마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 단호함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차를 타고 올라가면 된다고 계속 설득했지만, 저녁 늦게 차를 타고 올라가고 싶지 않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토요일 기차도 모두 매진되었다고 했는데 다행히 토요일 아침 일찍 차로 올라가는 건 괜찮다고 했다. 금요일 밤은 안되고 토요일 아침은 된다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가족라면 분명 하루라도 더 편하게 자기 집에서 잠을 자고 싶어 할 사람이라 그 문장을 억지로 이해했다. 그래서 토요일에 올라가면 하룻밤만 다른 곳에서 자면 되기에 괜찮다고 분명 말했을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됐다고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정말 심플하게 오케이라고 말하고 아무렇지 않게 남아 있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딸이라도 나를 따라 서울을 간다고 한다면 충분히 가족 혼자 남으라고 할 텐데 엄마가 안 가면 딸도 집에 남겠다고 할 것이 뻔하기 힘없는 나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금요일 밤은 여전히 보통날처럼 저녁 9시 집안에 모든 불빛이 사라지고 어둠으로 변했다. 나는 일찍 잠든 두 사람을 뒤로하고 답답한 마음을 홀로 달리기 위해 밖으로 떠돌았다.
다음날 아침 딸과 아내는 분주했다. 이것저것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잔뜩 챙기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아주 민감한 아내는 이불까지 가지고 갈 태세로 짐을 싸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뭔가 가슴에서 치밀어 올랐지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평화를 위한 선택임을 알기에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챙겨서 한 짐을 들고 차에 올랐다. 그 많은 짐 속에는 오랜만에 보는 엄마를 위한 작은 선물이나 마음이 담긴 그 어떠한 물건도 없었다. 5년 만에 그것도 요양원에서 나오고 처음으로 보는 시어머니인데 역시나 냉정했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한국다운 정서가 담긴 어떠한 행동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아직도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 것은 잘 안다. 요즘 한국 여성들도 이런 일에 큰 신경 안 쓰고 산다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곤 했다. 하지만 아들 마음은 아들 마음이었다. 게다가 이런 모습을 그대로 보고 배우는 딸아이가 더 신경 쓰였다. 할머니를 보러 가는 것보다 하룻밤 혼자 집에 남아 있는 반려견 걱정을 더 하는 그 모습을 딸아이가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반려견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구분 없이 행동할 때는 가끔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어머니 집으로 토요일 아침 차를 타고 출발하게 되었다.
금요일에 갔으면 예약한 산리오 카페를 동생집에서 아침에 지하철로 갈 계획이었지만 모든 계획이 다 틀어졌다. 나는 동생에게 예약을 뒤로 밀어 달라고 부탁하고 운전을 했다. 동생은 서울에서 계속 취소되는 예약을 잡기 위해 노력했고, 야속하게도 고속도로는 밀리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뒤에서 차가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밀어두었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행히도 오후에 빈자리 예약이 있어서 시간을 변경했다고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딸아이 생일축하도 겸한 서울행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가 막혀서 간신히 예약 시간 30분 전에 홍대에 도착했다. 이번 일정 때문에 엄마는 토요일도 주간보호센터에 가셔야만 했다. 모시고 나올까 동생과 나는 고민했지만 감당할 자신이 솔직히 없었다. 동생은 엄마를 아침에 센터로 보내고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홍대로 나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동생을 만나서 딸아이 생일 축하를 하기 위해 어렵게 예약한 산리로 카페로 향했다. 뭐가 되었든 이렇게 서울에 오니 마음은 조금 편했다. 딸아이도 서울 구경이 신기한 듯 이것저것 질문하고 신이 나서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괜히 딸에게 미안해기도 했다. 이런 추억을 더 많이 만들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 눈치 보느라고 조금은 더 빨리 철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 아팠다. 철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는데 어느덧 내 아이는 누구보다 철이 빨리 든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페에서 달콤한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계속 시계를 봤다. 6시 전에 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를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정을 조금 재촉해서 다 같이 차를 타고 이사한 서울 삼촌집으로 향했다. 딸아이는 처음 가는 삼촌과 할머니집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집을 둘러봤다. 작은 방에는 동생에 어제 마련해 둔 아내와 딸아이의 편안한 잠자리가 보였다. 금요일 밤에 올 줄 알고 동생이 이불부터 청소까지 다 해둔 정성이 가득한 작은 방이었다. 그 방을 보고 있자니 괜히 동생에게 미안해졌다.
엄마가 지금보다 조금 더 건강할 때 종종 엄마를 모시고 우리 집에 왔었다. 아내는 엄마와 동생이 내려온다고 해도 그 어떤 준비나 챙김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잠자는 시간이 되면 불을 다 끄고 평소처럼 잠자기 바빴다. 밤늦게 도착이라도 하면 나는 엄마와 동생에게 조용하라고 눈치 주기 일쑤였다. 아들 집이자 형집인데 우리 가족들은 눈치를 봐야 했다. 가족의 온기를 느끼며 살고 싶었던 나의 작은 소망은 결혼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냥 내가 살던 대로 밤늦게까지 수다도 떨면서 영화도 보면서, 때로는 늦잠도 자면서 그렇게 가끔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다 같이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총각 때 많이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내게 사치였고 가질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어쩌면 점점 멀어진 우리 관계도 이런 사소한 문제가 반복되면서 상처가 커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착한 동생은 친절하게도 형수와 조카를 챙겨주었다. 집에 도착해서 몇 분이 흐르자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동생과 함께 내려가서 같이 엄마를 모시고 올라왔다. 엄마는 차에서 내릴 때 내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엄마한테 내가 누구냐고 장난을 치며 동생과 양쪽에서 싸우듯이 엄마에게 팔짱을 끼고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집에 들어와서 손녀딸과 며느리 얼굴을 보고 잠시 무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보이셨다. 그리고 피곤했는지 곧바로 방으로 가서 누우셨다. 조용히 말없이 자기 방에 가서 눕고 초점 없는 눈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셨다. 딸아이는 오랜만에 본 할머니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럴만했도 했다. 자주 봤어야 하는데 안 본 지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딸을 데리고 엄마방에 가서 방구석구석 걸려있는 딸아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반복해서 말했다. 할머니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그 마음을 대신 설명했다. 그러자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딸아이가 누워있는 할머니 앞에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 몸짓에 차가웠던 집에 온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동생과 상의했으나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에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결국 배달음식을 시켜서 먹기로 했다. 메뉴를 고르는 게 조금 어려웠다. 결국 가족과 딸이 좋아하는 간단한 음식을 시키기로 했다. 음식이 별로인지 입맛이 없는지 엄마는 거의 음식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냥 의자에 앉아서 두 눈을 감고 앉아 계셨다. 보통 먹고 싶은 것이 없거나 피곤하면 그러시기는 하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계속 눈을 감고 계셨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딸아이는 계속 할머니한테 눈을 뜨라고 말했다.
한쪽에서는 영어로, 딸아이는 아이대로, 동생과 나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오랜만에 우리 가족은 한 곳에 모여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이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이토록 힘든지 조금은 허무했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어갈 때쯤 우리는 거실에서 다 같이 딸이 좋아하는 만화를 보고 있었다. 딸은 오랜만에 삼촌에게 말도 걸고 나한테 장난도 치면서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나는 좋았다. 그냥 사람 사는 향기가 품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다 같이 좁은 공간에 모여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쓸데없는 것일지라도 함께 보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그동안 너무 그리웠다. 그런데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는 저녁 8시가 다가오자 딸아이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빨리 씻고,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밖에 나와도 집에서 하던 데로 스케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내의 육아 철학이었다. 하지만 딸아이는 큰소리로 엄마한테 반항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와서 그것도 하룻밤 자고 가는데 분위기는 정말 급격하게 싸늘해져 갔다. 물론 예상하기는 했었다. 분명 이런 식으로 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한 번도 예측을 벗어난 적 없기에 오늘도 자기가 맞다고 주장하며 강하게 자기식대로 몰아칠 거라고. 그리고 역시나 빗나가지 않았다.
딸은 두 시간 정도 강력하게 엄마에게 저항했다. 아내는 몇 번을 포기한다는 듯 루틴이 서울 와서 깨졌다고 투덜거리고 화를 내며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누웠지만, 잠자리가 불편하네, 집에 너무 덥네, 너무 환하네라고 말하며 이내 밖으로 나와 우리와 함께 있는 딸아이를 억지로 끌고 작은 방으로 몇 번이나 들어갔다. 그렇게 몇 번이나 딸아이는 작은 방에 끌려갔다가 몰래 나오기를 반복했다. 동생 앞에서 민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화가 났다.
하지만 동생은 나보다 더 태연하게 반응했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한 지 오래라는 듯한 태도였다. 화가 나서 점점 타오르는 것은 나였다. 여기까지 와서 꼭 저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노력하려고 해도 절대 되지 않았다. 어쩜 사람이 저기까지일까 싶었다. 심심한 것도 불편한 것도 모두 이해되는데 어른이라면 하루정도는 참을 수 있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어린 딸이 하룻밤 정도는 삼촌과 아빠랑 조금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냥 놔두면 안 될까 싶었다. 딸도 뭔가를 느꼈는지 얼마 안 가서 포기했다. 눈치가 보였는지 거실에 있는 나와 동생에게 손을 흔들며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작은 방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그렇게 정신없는 토요일 밤이 흘러갔다. 딸과 아내가 잠들 때까지 불을 다 끄고 서로 어둠속에서 스마트폰만 보면서 조용조용히 있었다. 어디를 가나 항상 똑같았다. 여행을 가서도, 엄마 집에 와서도, 우리 집에서도.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환경을 가족은 만들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기 몸의 바이오 리듬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완벽한 개인주의 그 자체였다.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새벽에 나는 동생과 둘이 남아 거실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조용히 야식을 시켜서 주방에서 먹기 시작했다. 분명 가족을 모두 데리고 올라왔는데 마치 나 혼자 엄마집에 온 것만 같았다. 예상했지만 예상대로 되고 말았다. 허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엄마에게 가족들 얼굴 한 번 보여준 것에 만족하고자 마음을 돌렸다. 그래야 내일을 또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생과의 수다는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엄마 증상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요즘 동생 직장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내 계획들까지 어두운 거실에서 우리들 사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이렇게 엄마를 요양원에서 집으로 모시고 오니 식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도 하고 좋다고 말하며, 동생은 이사하고 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매우 만족한다고 했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고, 이렇게라도 한 공간에 모일 수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에 잠시 복잡해졌던 감정을 내려놓고 이 작은 공간을 살폈다. 이사까지 힘겹고 복잡했지만 그래도 다시 보금자리가 생겨서 아늑하고 좋았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 거실에서 자고 있는 나를 딸이 깨웠다. 뒤척거리며 딸아이 목소리에 무거운 눈을 겨우 뜨고 주위를 살피니 소파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딸이 할머니 옆에 앉아서 간식을 나눠먹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며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감격스럽도록 행복함이 밀려왔다. 이게 뭐라고 눈물까지 핑 돌았다. 나는 그 시간을 붙잡고 싶어 소파 한구석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엄마와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딸아이와 엄마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참으로 따뜻함이 감도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행복을 찾은 것만 같았다.
다음날을 위해 조금 서둘러 밑으로 내려와야 했기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루만 더 있다가 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미 가족은 내려갈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아쉽지만 그래도 이곳에 오랜만에 와서 좋은 시간을 보낸 것만 기억하고 싶었다. 오기까지 쉽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행복한 주말이었다. 잠시였지만 그 온기를 품고 내려갈 수 있어서 좋았다.
차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딸은 뒷자리에서 종알종알 이야기를 계속했다. 삼촌에게 받은 선물을 계속 만지작 거리고 할머니가 어떤 과자를 좋아하는지도 계속 말했다. 나는 맞장구를 쳐주며 할머니집에 갔던 그 기억이 딸에게 오랫동안 남도록 좋은 말을 해주며 운전을 했다. 내일이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테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을 데리고 서울 갔다는 것에 내게는 의미가 컸던 주말이었다. 만약 올라가지 않았다면 토요일, 일요일 육아 시간을 나눠서 아이를 돌보고 남는 시간에 카페로 향해서 글을 쓰거나 공부를 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서로 존재하고 있다고 대놓고 말하면서 아이에게 좋은 것도 추억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현실을 속상해하면서 달리 해결법을 찾지 못해서 죄책감에 눈을 감았을 주말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았다.
금요일 출발이 깨지면서 어머니보다 집에 반려견을 더 걱정하는 아내에게 실망했어도, 서울에 올라가서 역시나 좋은 모습만 보이지 못하고 서로 이빨을 드러냈어도 그럼에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가족다운 모습을 하고 있노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하는지 딸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삼촌이 얼마나 우리 가족을 아끼고 배려하는지 보여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몸속에 작은 염증이 생겨도 불편함을 감출 수 없듯이 내게도 염증과 같은 것들이 삶에 존재한다. 그것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어머니의 치매일지도 모르고, 내 마음을 몰라주고 물 건너온 문화를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아내일지도 모르고, 사십 년 넘은 인생을 살았지만 아직도 모든 것을 품지 못하는 좁은 내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루하루 버틴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비록 아직 부러운 것이 너무 많은 철없는 사십대지만 나 또한 어떤 이들에게 부러움에 대상이 될지도 모르기에 자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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