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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Jan 01. 2024

59. 5년 만에 시어머니 집에 온 며느리(1)

서운함은 가슴에 남는다.

  부부사이에 서운함은 국경을 초월한 거리만큼 커져만 갔다. 그 서운함이 일방적인 나의 감정이라면 그것도 내 잘못이겠지만 엄마의 증상이 심해지고 내 마음은 얼음처럼 더 차가워졌다. 안 그래도 서울로 장거리 드라이브 하는 것을 싫어해서 겨우겨우 데리고 갔었는데 코로나를 핑계로 발걸음은 완벽하게 멈췄다.

다른 곳에서 자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인 것은 결혼 초기에 알았지만 살면서 자기주장이 더 강해져서 나중에 어떤 설득도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나도 사람인지라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홀로 서울을 수시로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엄마가 점점 약해지고 증세가 심해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하나뿐인 손녀를 잘 보여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들인 나를 자책하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요양원에서 다시 집으로 모실 때도 어떠한 반응이나 관심이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라서 서운한 감정 따위는 들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범주를 작게 보는 그냥 문화적 차이라고 여기는 게 편했다. 그런데 엄마가 자기 방을 갖게 되고 조금 안정을 찾자 손녀딸을 가끔 찾는 일이 많아졌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혼잣말로 조용히 손녀딸 사진을 보며 이름을 부른다는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은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황폐해졌다.


아이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모습을 최대한 피하려고 서양 스타일로 키우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해도 그냥 두었는데 그것에 오히려 문제에 근원이 된 듯했다. 딸아이도 엄마를 닮아서 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것을 꺼려했고, 마땅히 서울로 간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장난감에 인형에 선물을 사준다고 사정해도 엄마가 안 가면 자신도 집에 있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게다가 매일 일찍 저녁잠을 자는 습관이 8년 동안 배어 있어서 오랜 시간 어디로 이동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이런 상황을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고, 불평이나 늘어놓는 것 같아서 부끄럽고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둘 곳이 시간을 몇 년이나 흘러 보냈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내세워 내가 해외에 산다면 나도 저런 고집스러운 행동을 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살아갈까 생각을 수차례 하였지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딸아이가 적극적으로 서울에 가고 싶다고 말을 꺼낸 것이다. 물론 할머니를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틈나면 딸아이에게 말한 것도 조금 영향이 있었겠지만 아주 큰 이유는 산리오 카페를 가는 것이었다. 서울 홍대에 유명한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서울을 데리고 갈 수 없으니 그런 나들이는 남들이나 하는 꿈같은 가족의 모습이라고 넘겨버렸는데, 친구가 다녀왔다는 말에 딸아이가 내게 먼저 서울 할머니 집에 가고 싶다고 한 것이다.


딸아이를 앞세워서 아내를 설득했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생각해 보겠다고 내게 답변하였다. 느낌으로 볼 때 정말 오랜만에 온 가족이 차를 타고 엄마를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체만으로 그냥 기뻤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남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계속 못하다 보면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결국 우리는 금요일 밤에 올라가서 일요일에 내려오기로 일정을 잡았다. 단 한 가지 단서가 붙었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자는 것이었다. 하기 싫은 건 지구가 멸망해도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차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아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동생까지 동원해서 산리오 카페 예약을 하기 위해 수시로 예약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막상 올라가도 엄마랑 뭐 크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보통 가족들처럼 쫑알거리는 손녀딸 수다도 들려주고, 엄마의 보금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 풍경 속에 잠기고 싶었다. 동생도 신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양원에 계셨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그런 만남이자 시간이기에 더 소중함을 느끼는 듯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형의 무능함 때문에 엄마가 요양원에 있는 1년 동안 나는 내 가족을 데리고 단 한 번도 면회를 가지 못했다. 아니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었다. 요양원 원장선생님이 내가 혼자 면회를 갈 때마다 엄마가 손녀딸을 찾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쓴웃음으로 그냥 대답을 회피했었다.


이런 준비 끝에 어렵게 카페 예약을 마치고 기차를 알아보는데 11월 중순에 서울로 향하는 기차표는 모두 매진이었다. 앞이 깜깜했다. 분명 기차로 간다고 했으니 무조건 기차로 가야만 했다. 스케줄에 매우 민감한 성격이라 중간에 계획 변경은 언제나 어려웠다. 주변에 스트레스를 주기 일쑤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들어 자리를 매번 피하곤 했던 게 나였다. 나는 혹시 자리가 날까 일하면서도 틈틈이 KTX예약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어차피 내가 운전하는데 차로 올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지만 그만큼 내 가족을 데리고 올라가고 싶었다.


그냥 아픈 엄마이고, 치매로 인지가 거의 마비상태가 된 엄마지만 아직 큰 아들 잘 버티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작은 아들인 동생보다 유난히 굴곡이 심했던 나를 엄마는 더 걱정했다. 결혼도 그랬다. 내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아들을 응원하는 엄마였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을 울린다. 엄마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잘 버티고 하나뿐인 딸에게 좋은 아빠가 되기를 바랬다.

아니 누구보다 속정이 많은 놈이라 잘 견디고 가정을 꾸려갈 수 있을 거라고 낮은 목소리로 흘러가듯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더 지키고 싶었다.


분명 엄마는 표현하지 못해도 자기가 사는 공간에 우리가 온 것을 기억할 것이라고 믿고 있기에 더 간절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기차표를 목요일 밤까지 예매하지 못했다. 동생에게는 형수를 설득해서 차를 타고 금요일 밤에 올라갈 거라고 말했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퇴근해서 평소에도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기차를 예약하지 못했다고'


아내는 내 말을 듣고 바로 인상을 썼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아내가 입을 열면 큰 싸움이 날 것만 같았다. 문화가  다르고 남편 나라에 산다는 훈장하나로 쏟아내는 그 말을 들어줄 공간은 이미 오래전에 바닥이 났기에 핑계를 대고 빠르게 집을 나왔다.


에 사는 것도, 다른 나라에 살아서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시어머니집도 아닌데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내 자식을 데리고 우리 엄마가 사는 집에 가는 게 힘들 줄 정말 몰랐다. 다른 것도 신경 쓸 것이 너무나 많은데 이런 것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꼭 가족들을 데리고 올라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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