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집의 고함, 작은 아이의 비밀
1984년 봄, 나는 서울 강북의 반지하 단칸방에서 태어났다. 그 집이 어디였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교 시절, 방 구석에 놓인 앨범을 뒤적이다가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좁은 문, 그 아래 계단 중간쯤에서 어두운 배경을 뒤로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기. 그 아기가 바로 나였다. 사진을 들고 엄마에게 물었다.
“이게 어디예요?”
“거기서 네가 태어났지.”
“우리 지하에서 살았어요, 엄마?”
“응. 네 살 때 거기서 이사 나왔어.”
네 해나 살았다는데도 기억이 전혀 없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다시 앨범 속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좁은 방, 습기 가득한 벽, 희미한 전구빛. 그런데도 부모님은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때 몰랐다. 가난이란 게 이렇게 낮고 좁은 곳에서 시작된다는 걸.
네 살 때 이사 온 집이 내 기억 속 첫 번째 집이었다. 큰 단독주택이었고, 1층에는 작은 상가가 세 칸 있었다. 집을 끼고 옆 언덕을 오르면 2층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었다. 대문을 열면 오른편에 이층짜리 주인집이 있었고, 1층에는 주인집 가족이 살았다. 2층에는 다른 세입자가 있었다. 주인집 앞쪽에는 작은 쪽방 두 칸이 붙어 있었는데, 그곳엔 젊은 부부 한 쌍과 홀로 사는 아저씨가 살았다.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여러 삶이 서로 다른 결을 드러내며 공존했다.
우리 집은 주인집 옆에 딸린 방이었다. 주인집 현관문을 지나 옆으로 돌면 울퉁불퉁한 유리창이 끼워진 녹슨 철문 하나가 있었다. 그 문을 열면 항상 ‘끼익’ 소리가 났다. 문 안쪽에는 두 사람이 겨우 설 만한 좁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연탄보일러와 가스레인지, 수도꼭지가 놓여 있었다. 다시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나무문이 하나 있었고, 그 문을 열면 방 한 칸이 나왔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집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방은 원래 주인집의 일부였다. 벽을 세워 따로 만든 공간이었다. 그러나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부모님은 불평이 없었다. 좁디좁은 주방조차 엄마는 기꺼이 부엌이라 불렀다. 그곳에서 엄마는 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지어주었다.
어릴 적 나는 집이 꼭 방이 많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가끔 엄마를 따라 주인집에 들어가면,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넓은 거실, 반짝이는 가죽 소파,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 부럽다기보다는 그저 궁금했다. 저런 집에서 살면 어떤 기분일까? 왜 우리는 창고 같은 집에 살아야 할까?
부모님은 단칸방이어도 지상, 그것도 2층에 산다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어린 눈으로 보아도, 앨범 속 반지하는 어둡고 답답했다. 그곳에선 결코 쾌적함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단칸방의 좋은 점 하나는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큰 대문으로 들어가는 나를 본 친구들이 내가 그 집에 사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2층짜리 으리으리한 집 안에 쪽방 두 칸과 창고 같은 우리 집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초대하지 않는 한 절대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지 않았다. 순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차마 보여주고 싶지 않은 비밀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동생이 태어난 날, 친할머니가 몸조리를 돕겠다며 집에 오셨다. 평소에는 잘 곳이 없어 고모 집에 묵으셨지만, 이번에는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며칠 우리 집에 머무셨다. 방이 좁아 아버지와 나는 여름밤을 핑계 삼아 주인집 옥상에 올라가 침낭을 깔고 잤다.
옥상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별빛은 유난히 선명했다. 하지만 옆에 피워둔 모기향 냄새는 바람에 휘날리며 코를 찔렀고, 귓가에서는 모기들이 끊임없이 윙윙거렸다. 나는 몇 번이나 모기에 쏘여 눈을 떴다. 내려가고 싶었지만, 좁은 방에는 내 몸 하나 뉘일 자리조차 없었다. 침낭을 머리끝까지 덮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마 그날이 내 생애 처음으로 밖에서 잔 날이었다.
동생이 태어나자 집은 더 좁아졌다. 면 기저귀와 아기 용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내 장난감 아지트까지 빼앗겼다. 그런데도 동생은 밉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학교에서 돌아와 동생을 안아보고 싶어 설레곤 했다.
아빠는 석유 소매업을 했고, 겨울이면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엄마도 어린 동생을 업고 가정용 등유를 퍼주고, 전화기를 붙잡고 주문을 받느라 분주했다. 나는 아빠 사무실에 자주 갔다. 집보다 넓었고, 마음 편히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엄마는 가끔 나에게 동생을 잘 돌보라고 부탁했다. 나는 형이라는 책임감에 주인집 마당으로 동생을 데리고 나가 뛰어놀곤 했다. 그때만큼은 작은 마당이 놀이터였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봄날, 주인집 아주머니가 문을 열더니 우리 형제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왜 맨날 여기서 시끄럽게 뛰어! 집 안에서 놀든가, 밖으로 나가!”
동생은 그 기세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그러자 아주머니는 눈을 부릅뜨며 다시 쏘아붙였다.
“너희 엄마 아빠는 이런 것도 안 가르치나?”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모님 이야기를 듣자 서러움이 북받쳤다. 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는 동생 손을 붙잡고 서둘러 아빠 사무실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동생도 그 순간만큼은 주인집의 고함에 기가 눌려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엄마가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왜 울어? 무슨 일이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딱풀로 입술을 붙여놓은 것 같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엄마가 속상해할 것만 같았다. 나는 동생 옆에서 같이 울었다.
그날,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주인집 마당에서 놀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