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빌라에서의 새로운 일상
몇 달이 흐르고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월세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비록 초반에 추가 비용을 냈어도, 일하지 않아도 돈이 들어오는 경험은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만약 이렇게 아파트를 계속 늘려 가면 분명 경제적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월세 받아 사는 부자'가 눈앞에 있는 듯했다.
주택 매수 후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악착같이 저축을 늘렸다. 1억 가까운 돈을 빌린 것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라도 불필요한 지출은 할 수 없었다. 빨리 목돈을 모아 다른 아파트를 사겠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월세와 저축이 더해지니 잔고가 빠르게 늘었다. 세입자에게 받은 보증금까지 더하니 3천만 원이라는 목돈이 만들어졌다. 처음 4천만 원을 모을 때는 그토록 힘들었는데, 월급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무언가 내 시간을 앞당긴 것 같은 마법을 경험했다. 가계부를 정리하며 매달 소비 내용을 비교해 보니 집을 사기 전보다 소비가 훨씬 줄어 있었다.
나는 통장에 모인 목돈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조금은 안정된 마음으로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갔다. 다 같이 외식이라도 하자고 했는데 엄마의 표정이 어두웠다. 물어도 대꾸가 없자 조용히 동생을 불러 물었다. 동생은 최근 집주인과 엄마가 통화를 자주 한 것 같다고 했다.
“엄마, 무슨 걱정 있어요?”
“아니야. 별일 없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그냥… 재계약해야 하는데 집세 때문에. 근데 엄마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집 앞 고깃집에서 배를 채우고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는데 엄마는 숨을 심하게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제는 부모님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건 모두에게 옳지 않았다. 한 번 집을 매수하고 나니, 충분히 엄마 집도 마련이 가능할 것 같았다. 뭔가 모를 경험이 내 속에 자리 잡았다.
“엄마, 지금 이 집 보증금이랑 내 돈 보태서 이사 가요.”
“이사?”
“충분히 집 살 수 있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라고요?”
“나중에 청약해야지.”
“청약도 좋지. 근데 로또랑 다름없잖아요. 그거 하나 바라보다 늙고 병들면 나중에 누구 좋은 일 시키는 건데요.”
“모르겠다. 집 사서 가는 건 좀 그렇고… 엄마가 어떻게 해볼게.”
“아니, 그러지 말고 나랑 집 보러 다녀요. 이 근처 신축 빌라라도 한 번 봐요, 응? 나 목돈 있어요. 걱정 말고 그냥 보러 가요.”
엄마는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한동안 설득하고 또 설득해 겨우 몇 군데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짓이라던 엄마도, 빌라지만 깨끗한 신축을 보며 점점 욕심이 생기는 듯했다. 아니 솔직히 부러워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반지하 단칸방을 시작으로 엄마가 살아온 흔적은 가난 그 자체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민망함을 숨기며 살아온 엄마였다.
그렇게 한 달 동안 틈나는 대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세를 확인하고, 어느 정도 선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밤마다 계산기를 두드렸다. 성격이 무모하지는 않았는데, 한 번 아파트를 산 경험과 1억이 넘는 대출을 받고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욱 과감해졌다. 죽어도 경기도로는 가기 싫다는 엄마의 말을 존중해, 역세권이면서 엄마 직장과도 가까운 빌라를 찾고 또 찾았다.
노력 끝에 은평구에서 시세 대비 저렴한 쓰리룸 신축을 찾았다. 건축주가 직접 분양하는데 마지막 한 채가 남아 1억 9천에 해 준다고 했다. 주변 시세보다 확실히 저렴했다. 대출 가능 금액을 확인하니 최고 1억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이사를 반대하던 무능한 아빠는 놔두고, 나는 엄마와 동생만 데리고 집을 보러 갔다.
동생은 입에서 “와”를 연발하며 이곳저곳 총총거리며 방문을 여닫았다. 엄마는 주방 싱크대를 만지작거리며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예전에 아빠 친구 집에 갔을 때 보았던 그 부러움 가득한 표정이었다. 주차도 일렬로 편리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도로 안쪽 깊은 곳에 있어 사방이 다른 집에 둘러싸였다는 점이었다. 엄마는 이 집은 얼마냐고 속삭이듯 물었다.
“1억 9천이래. 근데 다른 데보다 확실히 싸요.”
“1억 9천만 원이면 우리 사는 동네보다는 비싸네.”
“여긴 역세권이잖아요. 그리고 평지고…. 비교가 안 되지.”
“형, 나도 모아 둔 돈 좀 있어. 여기 방도 세 개나 되고 거실도 넓어서 식탁이랑 소파도 둘 수 있겠던데….”
“응, 좋지?”
집을 보고 나서 건축주와 담당 직원에게 집요하게 연락했다. 꼭 사고 싶다고, 하지만 다 해도 1억 7천5백이 전부라 제발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처음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채라서 흔들렸는지 1억 8천만 원은 가능하다고 연락이 왔다. 점점 희망이 보였다. 엄마 보증금 4천만 원과 내 돈 3천만 원을 합치면 7천만 원, 거기에 마이너스 통장까지 쓰면 가능해 보였다. 엄마한테 충분히 집을 살 수 있다고, 노트를 펼쳐 우리가 한 달에 갚아야 할 이자와 가용 자금에 관해 설명했다.
매달 60만 원 고정으로 이자가 빠져나간다고 하니 엄마는 겁부터 먹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동생이 거들고 나섰다.
“생활비 드릴게요. 한 달에 20만 원은 충분히 가능하니까 그 돈으로 이자 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동생은 모은 돈이라며, 이사 비용까지 보태겠다고 전 재산이 든 통장을 내게 주었다. 이제는 지겹다며, 바퀴벌레 집인지 사람 집인지 구분도 안 되는 산꼭대기 빨간 벽돌집에서 탈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엄마를 설득하는 과정에 분양 사무소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모델하우스로 한 번 와주실 수 있나요?”
“지금 최대한 돈을 모으고 있는데… 혹시 집이 나갔나요?”
“그게 아니고요. 사장님이 직접 얼굴 보고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셔서요.”
전화를 받은 다음날 퇴근과 동시에 신축 빌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저번에 말씀드린 가격에 하면 바로 계약 가능하세요?”
“7천5백이요?”
“네.”
아직 엄마의 답을 듣지 못했지만 나도 모르게 “네”라고 답했다. 동일 평수 다른 호수 중 일부는 2억 2천만 원에 입주한 분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무조건 이익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이거 엄청 저렴하게 드리는 거 아시죠? 절대로 이 가격에 계약했다고 다른 분들께 말하면 안 돼요. 저랑 약속하셔야 합니다. 큰일 나요.”
“각서라도 쓸 수 있습니다. 절대 말 안 할게요. 나라 지키는 사람이 거짓말하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계약금의 10%를 계좌로 입금해 버렸다. 뒷일은 나중 문제이고 엄마가 이런 곳에서 마음이 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상의도 없이 입금한 계약금 때문에 마음에 걸렸다. 현장을 나와 바로 집으로 향했다.
“엄마, 미안해. 근데 계약금 입금했어요. 이제 포기하면 돈 2천만 원 구경도 못 하고 날아가. 우리 마음 편하게 이사 가자.”
…….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엄마의 손을 바라봤다. 관절염이 와서 이미 구불구불해진 거친 손. 젊음은 사라지고 초라함이 남아있었다.
“7천5백만 원에 해주겠다고 연락이 와서 방금 입금하고 오는 길이에요. 정말 싸게 산 거니까 절대로 손해 보지 않을 거예요.”
“사실 엄마도 그 집 아주 마음에 들더라. 그래, 살아보자. 엄마도 정말 더 열심히 일 할게.”
이사를 준비하는 동안 엄마는 웃고 또 웃었다. 태어나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행복해 보였다. 아빠는 계속 청약을 외쳤지만, 똘똘 뭉친 두 아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손에 쥔 돈도 없었다. 만약 아빠가 돈이 많았다면 본인 마음대로 했겠지만, 뒷방에서 잔소리 늘어놓는 게 전부였다. 나는 어깨가 내려간 아빠가 안쓰러워 잘될 거라고 지지해 달라 부탁했고, 주유소 일을 꾸준히 다녀줘서 감사하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없었지만 아빠는 분명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미안함을 투덜거림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부모님은 반평생 남의 집에서만 세입자로만 살다가 ‘내 집’을 갖게 되었다.
이사 당일 아침, 미리 곱게 포장해 둔 짐들 앞에서 엄마는 검은색 밥상을 쓰다듬고 있었다.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와 함께했던 다용도 밥상이었다.
“엄마, 설마 그 밥상도 가져가려고요?”
“버려야지. 이제 우리도 의자에 앉아서 밥 먹는데….”
나와 동생은 엄마가 밥상을 가지고 갈까 봐 살짝은 걱정스러웠다.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도 있지만 추억에 약한 사람이었다. 아빠도 마찬가지로 물건에 애착이 많아서 이것저것 서랍에 넣어두고 버리지 않았다.
“왜?, 서운해요?”
“이걸 왜 버려? 비싼 건데….” 옆에서 지켜본 아빠는 엄마가 버릴까 봐 걱정되었는지 좋은 걸 왜 버리냐고 한마디 했다.
“그럼 주유소에 가지고 가세요.”
“아직 쓸 만한데…. 이거 신혼 때 나름 비싸게 주고 산 거야.”
“그냥 버립시다.”
“이 사람이 집 사더니 갑자기 통이 커졌나….”
잠시동안 아빠랑 엄마는 밥상 하나를 두고 추억을 소환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답답하면서도 행복했다. 새로운 터전으로 가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아주 작은 충돌들, 너무 사소해서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밥상 토론을 하던 중 이삿짐 직원들이 초인종을 눌렀다. 이삿짐은 신속하게 차로 옮겨졌다. 우리가 특별히 할 것도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포장이사라 가족들은 어색하게 서 있었다.
“먼저 가 계셔도 돼요. 한 분만 남으세요. 이렇게 지켜보지 않으셔도 저희가 알아서 해요. 하하.”
“아…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도 만진 적 없는 '새집'에 부모님 물건과 가구들이 채워지자, 공허했던 공간은 사람 향기가 나는 집으로 변했다. 직원들이 청소까지 해주고 떠났지만, 엄마는 방 곳곳을 닦고 또 닦았다. 엄마 이름 세 글자를 간직한 작은 공간을 온몸으로 느끼고 계셨다.
‘눈치 볼 것 없는 삶’, ‘집주인이 없는 삶’.
엄마가 바로 주인인 그 집에서 처음으로 중국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이렇게 부모님은 50대 중반, 은행과 자식들의 도움으로 '집주인'이 되었다.
만약 청약이라는 일생의 카드를 기다렸다면, 죽는 순간까지 ‘내 집’에서 살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그때까지 몰랐다. 우리 앞에 펼쳐질 큰 불행의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생은 정말 짧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사를 하고 엄마와 동생, 그리고 아빠까지 모두 활력을 얻었다. 짐이 빠지는 것만 보고 출근한 아빠는 새로 이사한 집으로 퇴근했다. 인터폰 사용법을 모르는 아빠는 전화로 물어가며 현관문을 열고 어렵게 집으로 들어왔다.
“아… 집 정말 깨끗하고 좋네. 좋네.”
그날 밤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서로 마주 보고 엄마표 김치찌개와 수육을 먹으며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치고 큰 거실에 어울리지 않는 작고 오래된 TV를 보다가 아빠가 엄마에게 말했다.
“여보, 내가 텔레비전은 요즘 그 얇고 큰 걸로 하나 사줄게. 드라마 좋아하잖아.”
엄마는 농담을 던지며 빨리 사 달라고 독촉했다. 이사 후 엄마는 아침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동생도 일을 시작하면서, 우리 형제의 강력한 반대로 엄마는 야간 식당 일을 그만두었다. 마침 이마트 식품 조리 하청업체에 자리가 나서 취직했다. 집에서 이마트까지 매일 버스비를 아끼겠다며 40분씩 걸어 다녔다. 추운 겨울에는 목도리를 꽁꽁 두르고, 여름에는 작은 손부채를 들고 엄마는 운동이라며 힘든 노동을 마치고 언덕 위 집까지 오는 제2의 노동을 감당했다. 버스카드를 만들어 주며 몸 혹사하면 나중에 병원비가 더 든다고 말해도, 엄마는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이사한 신축 빌라는 이마트와 5분 거리였다. 넉넉해진 출근 시간 덕에 엄마는 식탁에 앉아 여유 있게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일터로 향했다.
집 때문에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한 번도 초대한 적 없던 엄마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며 이모들과 함께 웃고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렇게 평범한 걸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한 여자의 삶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왜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냐고 묻지 않았다. 어린 나조차 감추고 싶었던 집이었으니 물어볼 가치가 없었다.
동생은 바퀴벌레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에 마냥 행복해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지는 자기 방을 꾸미기 시작했다. 액자에 사진을 끼워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작은 소품들을 사서 정리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사람답게 사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잠만 자는 곳쯤으로 여겼던 집이라는 공간이, 이처럼 웃음소리와 활력을 불러올 줄 몰랐다. 행복해하는 식구들을 보며, 무리해서 빌라를 산 것에 대한 후회와 은행 이자에 대한 걱정은 모두 사라졌다.
그동안 죽도록 일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가던 돈을 붙잡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그래서인지 남들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것들을 사러 쇼핑 갔을 때, 엄마는 한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마치 어린이날 선물을 고르는 다섯 살 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눈동자로 행복해 보였다. 동생과 내 손을 붙잡고 3인용 소파와 침대를 보러 돌아다녔다. 비싸지는 않지만 집에 어울리는 것을 찾고 또 찾았다.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가 이렇게 실내 장식에 민감한 여자인지 알게 되었다.
“이거 어때요?”
“이건 벽지랑 집 분위기랑 안 맞아….”
“엄마, 이 소파는요?”
“이건 재질이 좀 별로인데….”
까다로움의 끝판왕이었다. 엄마는 거실 벽시계를 고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아무거나 사서 두고 살았지만, 사실 엄마도 예쁘게 꾸미고 살고 싶은 여자였다. 돈이 뭐라고 50년을 참고 살았는지,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주문한 물건들이 집으로 배송된 날, 엄마는 사랑하는 자식들 머리카락을 만지듯 소파와 침대를, 그 거칠고 관절염으로 구부러진 손으로 쓰다듬었다.
매달 동생 15만 원, 나 30만 원, 그리고 나머지는 엄마와 아빠의 돈을 합쳐 대출금을 상환했다. 엄마도 내가 집을 사고 더 절약했던 것처럼 사소한 것까지 더 아끼기 시작했다. 마치 대출 후 행동 변화라는 집단 교육을 받은 것 것처럼…. 어느 정도 집 정리가 끝날쯤 반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전역하시니 좋으시죠?”
“하하… 뭐 나쁠 게 있겠냐? 어디냐? 밥이나 먹으러 오든지?”
“네, 안 그래도 가려고 전화드렸습니다.”
“그래? 잘됐네. 조심히 와.”
반장님 전역 행사는 갑자기 취소되었다. 31년 군생활의 마침표는 초라했지만, 서운해하거나 섭섭해하지 않으셨다. 장군이 주관하는 전역식이 부대 사정으로 종종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반장님은 당당해 보였다. 그 아름답던 젊음을 군복 속에 모두 바쳤다. 한 몸이 되어 하루하루를 나라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살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았고, 경제가 붙타오르던 옛날에는 군대에 말뚝을 박으면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았다. 특히 부사관은 사고 치는 사람만 억지로 남긴다는 오명까지 있었다. 그 세월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수많은 지휘관을 왕처럼 모시며 그 뒤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했던 그 숨겨진 영웅은 오늘부로 새롭게 태어났다.
자신을 가두고 살던 세월을 벗어던진 그 순간, 반장님은 진정한 자유인이 된 듯했다. 30년 동안 품어 온 사명감을 내려놓고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선배들의 전역을 수없이 지켜봤다. 연금을 300만 원 가까이 받아도 얼굴 한쪽에는 늘 어두운 그늘이 가득했다.
55세 전역이면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다. 능력이라고는 ‘나라에 충성한 경력’뿐인 숨겨진 영웅들의 경력을 인정해 주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사설 경비로 취업하거나, 명함을 내세우기 힘든 초라한 일자리를 얻었다. 그나마 일자리라도 구한 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늙은 노동자의 삶을 받아들였다. 이런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나도 저렇게 되나 싶어 항상 불안했다. 하지만 반장님은 “나가면 할 게 너무 많다”라고,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스무 살처럼 들떠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둔 경제적 여유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식당도 잘되고 있었고, 겸직을 못 해 하고 싶은 걸 참아야 했던 세월에 대한 보상을 이제야 누리는 듯했다.
모든 선배가 반장님처럼 당당하게 희생의 대가를 보상받고 사회로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급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동등하게 고생한 시간으로 인정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그저 아주 작은 기계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정책의 노리개로 이렇게 옮겨지고, 저렇게 치워지는 그런 소모품. 그게 부사관이었다.
“충성! 반장님~”
“야! 민간인한테 경례하냐? 이거 군복 벗어야겠구먼~”
“하하… 그럼 어찌 말합니까? 안녕하세요?”
“그게 더 좋네. 앉아라.”
“고 중사님 오셨네요.”
“네, 형수님. 잘 계셨어요?”
“기다려요. 음식 가져올게….”
“도와드릴까요?”
“나라 지키는 위대한 손님이 일을 왜 해. 대신 술값은 받을 거니까 그냥 앉아 있어요. 호호.”
“하하. 돈 챙겨 왔습니다.”
그냥 반가웠다. 그냥 좋았다. 짧은 흰머리가 보여도, 가르마를 타고 편한 복장을 한 반장님은 마음 편해 보였다. 아직도 낡은 중고차를 몰고 다니는 반장님이었다. 무섭도록 철저한 내공은 보면 볼수록 닮고 싶었다. 당당함, 여유,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
나도 저렇게 늙고 싶었다. 아니, 나도 반장님처럼 부자가 되고 싶었다.
“얼굴이 좋은데?”
“저, 엄마 집도 하나 샀어요. 물론 돈만 보태 드린 거지만요.”
“잘했네. 잘했어. 그래, 없다고 계속 없이 살면 안 되지. 없어도 부자처럼 행동하고 생각해야 돈이 보이고 희망이 보이거든.”
“맞아요. 엄마가 식탁 고르고, 새집인데도 하루에도 열 번 넘게 걸레질하는 모습을 보니까 제가 다 기쁘면서도 참 슬프더라고요. 싸게 사긴 했지만, 빌라라서 마음에 걸리긴 하고….”
“빌라도 입지가 좋으면 결국 올라. 전세나 월세로 평생 눈치 보며 사는 것보다 정신 건강에 몇 배는 더 좋으니 걱정하지 마. 잘한 거야.”
“근데 아파트 사고 엄마 빌라까지 사니까 계속 시세만 보게 돼요.”
“처음에는 어쩔 수 없지. 나도 그랬어. 집은 좋은 투자 수단이거든. 사는 건 간편한데 파는 게 힘들지.”
“그게 나쁜 거 아닙니까? 돈 필요할 때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아니지. 주식하면 망한다고 하잖아? 부대에서도 주식하면 도박으로 보고 찍고 그러잖아.”
“네. 뭐 하는 사람마다 손실만 보니까. 개미들은 항상 피해를 보고….”
“근데 잘 보면 주식이 부동산보다 더 잘 버는 수단이 될 수도 있어. 문제는 사고파는 게 쉬우니까 오래 못 들고 있어서 그렇지. 근데 집은 팔고 싶어도 안 팔리니 어쩔 수 없이 오래 보유하게 돼. 결국 투자는 ‘시간’과의 싸움인데, 그래서 부동산으로 돈 벌었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은 거야.”
“시간과의 싸움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내가 너한테 저번에 커피 마시면서 한 말 기억나? 넌 나중에 정말 큰 부자가 될 거 같다고….”
“아… 뭐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신 거죠….”
“아니. 너는 일찍 시작했잖아. 싸구려 변두리 아파트라도 20대 중반에 탈탈 털어서 샀잖아. 그 경험은 무시 못 해. 만약 아파트 안 샀으면 이번에 엄마 빌라를 살 생각이나 했겠나?”
“아… 절대 못 했을 겁니다. 아마 지금까지도 은행에서 돈 많이 빌리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우리 부모님처럼.”
“부모님 세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지. 왜냐면 부모님이 너 나이 때는 은행 적금만 들어도 이자가 거의 10퍼센트 이상이었으니까. 반대로 말하면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10퍼센트보다 더 높은 금리를 은행에 상납해야 했고…. 그래서 까딱하면 부도나고 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10퍼센트 이상이요? 우와… 저축이 최고였네요.”
“그렇지. 그래서 저축만 잘해도 돈 금방 모였지. 근데 그 무시무시한 은행 이자를 감당했던 용기 넘치는 몇 명은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졸부?”
“돈을 빌려 이 땅에서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땅이나 건물을 산 사람들이지. 그렇게 지금의 평범한 졸부들이 탄생한 거야. 두려움을 감당한 결과를 보상받은 거지.”
“아… 듣고 보니, 왜 그렇게 부모님이 대출을 두려워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근데 지금은 대출받는 게 돈 버는 거야. 금리가 엄청 낮으니까.”
“네, 맞습니다. 9천만 원 대출인데 한 달에 30만 원 정도 나갑니다. 세입자가 월세를 밀려도 월급으로 커버가 가능하고요.”
“그래! 그게 돈을 굴리는 마음가짐이야. 야야, 곱창전골 먹자. 이거 국물이 끝내준다. 이거 포장해서 인터넷으로 팔면 잘 팔릴 텐데….”
“누가 냉동 음식을 인터넷으로 주문합니까? 하하.”
“모르지. 나중엔 모두 먹고살기 바쁘니까 다 만들어진 거 먹는 게 대세가 될지.. 식겠다, 빨리 먹자.”
반장님과의 대화는 내게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런 분이 내게 마음의 문을 열어 준 건 하늘이 날 도운 것만 같았다. 그날 술자리에서 소주 맛은 꿀맛 그 자체였다. 반장님은 최근 강남에 꼬마빌딩을 알아보고 다닌다고 했다. 결국 한정된 땅 중에서 가장 노른자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면서….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어린 풋내기에게, 반장님은 등대처럼 대가 없이 길을 비춰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