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집값, 가장에 무게감에 짓눌린 아버지
집을 사고 1년이 흘렀다. 바쁘지만 종종 확인했는데, 집값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값은 내려가 있었다. 들어오기로 한 지하철은 지연되고, 시간이 지나자 작고 작은 경전철이 들어온다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돌았다. 교통만 좋아지면, 집값은 오를 거라는 사장님의 말을 믿은 난 바보가 되어있었다. 안전하다고 들었던 아파트 투자에서 손해를 보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조금 떨어져도 단위는 몇 천만 원의 손해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더 떨어지기 전에 팔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누가 봐도 호재가 사라진 지역에 그것도 '나 홀로 아파트'를 사줄 것 같지 않았다. 급매로 내놓으면 손해는 더 심해지게 되고, 내 주머니는 더 가벼워질 것이 뻔했다. 한동안 이런 혼란 속에 나를 안심시키는 유일한 것은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월세였다.
단돈 몇천 원 더 벌겠다고 없는 일도 만들어 초과근무를 하는 선후배들이 많았다. 그것도 돈벌이 수단이라며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 가장 소중한 자산인 ‘시간’을 날리고 있었다.
주택 가격 하락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초과근무 수당보다 더 많이 들어오는 월세 소득을 발판 삼아, 일이 없으면 과감히 일찍 퇴근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눈치 안 보고 사무실을 나가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쓸데없이 남아서 일하는 시늉하는 것보다 '칼퇴근'하는 월급쟁이를 모두 선망하였다. 대신 일과시간에 1분도 아끼며 집중해서 업무를 처리했다. 남는 시간은 철저하게 미래를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집값이 내려간다고 해도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마음 편하게 먹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냥 나중에 내가 들어가서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견딜만했다.
일찍 퇴근하면서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영어 공부를 선택했다. 신분상 직장에서 크게 써먹을 일은 없어 보였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필수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사치가 아닌 내면을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내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첫 번째 결실로 군대에서 보내주는 영어교육 과정에 합격했다. 부사관은 1년에 10명 이내로 선발되는 과정이라서 좋은 혜택을 받았다. 6개월 동안 월급을 받으면서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돈 걱정 없이 아침에 눈떠서 눈 감을 때까지 공부만 할 수 있는 시간은 내게 천국이었다. 입교할 때만 원어민만 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던 울렁증이 있었는데 수료를 앞두고 간단한 농담을 던질 정도로 대담해졌다.
수료를 앞두고 큰 고민에 빠졌다. 6개월이면 학업에 대한 목마름을 충분히 채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목이 말랐다. 결국 해소되지 않는 갈증 때문에 '무급휴직'으로 어학연수를 알아보게 되었다.
득 보다 실이 많은 결심이었지만, 앞만 보고 밀어붙였다. 손해는 막심했다. 1년간 연봉을 포기해야 했고, 필리핀으로 연수를 간다고 해도 최소한 2천만 원 정도의 경비가 필요했다.
유학을 간다는 소문이 군대에 돌자, 나를 가장 먼저 찾은 건 역시나 박 선배였다.
“야…. 너 왜 그러냐? 진급 생각도 하고,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선배, 나 한번 해보고 싶었어.”
“6개월 가서 공부했으면 충분한 거 아니냐? 큰 혜택 받았잖아.”
“아니, 이제 겨우 몇 마디 할 수 있게 됐는데…. 미련이 남아.”
“너 미친 거야. 집 사면서부터 네가 뭐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하는 거 같은데…. 그거 은행 것이지, 네 것도 아니잖아.”
박 선배는 술병이 늘어날수록 후배 걱정에 폭풍 잔소리를 늘어놨다. 그런 선배의 충고나 걱정이 듣기 싫지는 않았다.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축복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미친 짓이라며 나를 말리려 했고, 어떤 사람들은 미치고 이상한 사람급으로 나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나라 지키라고 돈 주니까 정신 나가서 쓸데없는 짓거리 한다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걱정하지 마. 1년만 다녀올게.”
“진급은?”
“좀 늦게 하지 뭐. 하하.”
“미친놈…. 거기에 쓸 돈 있으면 거지 같은 차 좀 바꾸고, 옷 좀 사 입어라. 무릎은 다 튀어나와서 누가 보면 무릎 보호대 차고 다니는 줄 알아. 아 정말 난 네가 부끄럽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반대와 눈초리를 이겨내고 인천공항에 서 있었다. 선후배들은 시간을 내서 공항으로 배웅을 나왔다. 말은 그렇게 해도 가장 서운해했던 건 박 선배였다. 주섬주섬 앞으로 와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쇼핑백 하나를 건네줬다.
“야…. 가서 우리나라 욕보이지 말고, 공부할 때는 옷도 좀 잘 챙겨 입어라. 네 형수랑 가서 반소매랑 바지 좀 샀다. 너는 정말… 답이 없다.”
“아…. 뭐 이런 걸 사….”
“네가 정상이 아니라서 그래. 몸조심하고, 거기 치안이 별로라던데….”
형편없던 내 인생에 이런 환대를 받으니, 가슴 저 밑에서 뭔가 올라와서 뭉클했다. 태어나 처음 떠나보는 한국. 비행기 안은 좁았지만 내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졌다. 그렇게 28살,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비행기에 앉아 작은 창으로 밖을 바라보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항상 못 해준 기억과 고생만 시킨 아들에게 미안해하기만 했던 엄마. 유학을 떠나는 나를 보며 그저 숨죽여 조용히 응원해 주었다. 가난 때문에 모든 걸 포기했던 아들이 그동안 얼마나 참아왔는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느껴졌다.
“엄마, 잘 다녀올게요.”
“건강하고, 밥 잘 챙겨 먹고..”
“걱정 마요. 엄마도 잘 챙겨 먹고, 내가 자주 연락할게요.”
출국을 며칠 앞두고, 평소 전화가 없던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신발은?”
“어제 하나 샀어요.”
“그래? 아빠가 하나 사주려고 했는데….”
아빠는 항상 신발에 집착했다. 어릴 때, 계절마다 두 아들 손을 잡고 비싼 신발을 사러 가곤 했다. 옷은 몰라도 신발은 좋은 것을 신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아빠는 어릴 때 좋은 신발 신고 다니는 애들이 그렇게 부러웠다고 하면서, 좋은 신발을 신어야 좋은 길을 걷고 성공한다고 했다.
나는 1년에 두 번 있는 그날을 좋아했다. 신발을 사러 가는 날은 항상 기뻤다. 단칸방에 살아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새 운동화를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황홀했다. 엄마는 아껴서 더 저축하자고 말했지만, 아빠는 좋은 이게 더 중요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아빠 자신은 맨발로 진흙탕 길을 걷고 있어도 자식들은 꽃길을 걷게 해주고 싶은 그 부모 마음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식이라는 존재가 부모에게 어떤 의미인지, 부모가 된 후 겨우 알게 되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던 그 모든 감정이 내가 부모가 되니 이해되기 시작했다. 줘도 줘도 모자라고 계속 미안한 마음은 자식을 둔 부모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28살 유학생으로, 잠시 군복의 무게감을 내려놓고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졌다. 유학 생활은 행복 그 자체였다.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 새로운 경험은 내 삶을 더욱 풍만하게 만들었다. 꼭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나와는 다른 우물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희망을 품고 있었고, 미래를 비관하지 않았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흥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퇴사 후 이직을 준비하는 유학생들, 미래를 꿈꾸는 어린 대학생들, 그리고 항상 밝은 표정으로 가르쳐주는 필리핀 선생님들. 나는 매 순간을 즐기며 소중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기회는 다시는 내 인생에 없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 미친 듯이 영어 공부를 했다. 벽면을 기어 다니는 도마뱀을 경계병 삼아 늦은 밤까지 책을 놓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에 대한 유일한 보답은 공부라고 생각했다. 주말이면 가끔 여러 국적의 학생들과 함께 주변으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젊음과 지금의 시간을 영원히 가슴에 새겨두고 싶었다. 몇 달이 흐르고 나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동안 마음속에 담았던 가난의 억울함을 조금씩 털어낼 수 있었다. 가난이라는 환경 속에서 아닌 척했어도 피해의식에 억눌려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제는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니 시간은 몇 배속으로 더 빨리 흘러갔다. 너무 빨리 지나가는 시간을 부여잡을 수 없어 속상했다. 아무리 붙잡으려고 하루하루는 마치 한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렸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넘어 원하는 문장을 자연스럽게 영어로 구사하는 순간이 왔다. 영어로 소통하는 시간은 나를 흥분시켰다. 이렇게 민간인의 삶에 빠져있을 때쯤 한국에서 박 선배에게 카톡이 왔다.
“미안하다. 근데 걱정하지는 마라. 넌 꼭 성공해라.”
알 수 없는 의미의 메시지 내용은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국제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몇 통이나 걸어도 계속 연결되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어쩔 수 없이 형수님에게 전화를 했다.
“형수님, 뭔 일 있어요…?”
“연락했나 봐요, 요한 씨한테. 우리 애 아빠 어떻게요….”
“왜요? 무슨 일이에요, 형수님.”
“얼마 전에 징계받았어요. 전역한대요. 말려도 소용없고, 벌써 전역 지원서를 냈어요.”
“전역이요? 왜요…?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병사들한테….”
형수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두려워하고 있었다. 안심시키기 위해 몇 마디하고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누구보다 군복을 사랑했던 박 선배의 군 생활이 이렇게 빨리 마침표를 찍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명예를 먹고사는 선배에게 징계는 지우지 못할 상처로 남았을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부대 다른 사람들과 몇 통화를 하면서 그동안 박선배에 있던 일들을 확인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만약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말릴 수 있었을까?'
'극단적으로 지금까지 흘러갔을까?'
'선배를 설득해서 막을 수 있었을까?'
군복은 얼룩무늬에서 디지털 무늬로 겉모습이 변했다. 겉만 변한 건 아니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에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너무 빨리, 한순간에 닥쳐온 그 물결이 쓰나미처럼 강력했다는 것이었다. 미리 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큰 파도에 모두 쓸려 내려갔다.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들만 겨우겨우 생존했다.
생존자들도 거친 파도에 온몸에 상처가 나고 크게 다쳤다.
계급장 하나면 모든 힘과 권력이 생기던 곳에서, 낮은 계급을 가진 집단인 병사들이 ‘갑’의 자리에 올라서는 사회적 현상은 빠르게 가속화되었다. 인권의 이름 아래, 존엄성과 분단국가의 처지에서 억지로 젊은 시절 2년을 상납하는 그들은 충분한 보살핌과 자유를 누려야 하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며, 명령하고 지시하는 중간 관리자들이 위기에 봉착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들이 쉽게 징계로 이어졌다. 처벌당한 수많은 선배들의 명예는 산산이 조각나고 금이 갔다. 억지로 왔으니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는 편의주의 문화는 빠른 속도로 퍼졌다. 그 어디에도 중간에 낀 '부사관'의 편은 없었다. 그들은 변화를 정면으로 맞으며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버티고 있었다.
이 땅의 거의 모든 아버지가 군인 출신인 대한민군, 자기 자식이 힘들게 보내는 것을 그냥 보고 넘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변화는 당연한 권리가 되었다. 하지만 박 선배는 거친 물결을 역행했다. 정당한 지시에 고개를 쳐들고 당당하게 거부하는 일부 병사들에게 군인다움과 ‘애국심’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을 접지 못했다.
싹수없는 태도에 언성은 점점 높아졌고, 계속되는 불손한 태도에 급기야 하지 말아야 하는 폭언은 이어졌다.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선배를 지지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한 성격의 소유자라서 언젠가는 사고를 칠 것 같았다고 앞과 뒤에서 선배를 깎아내렸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지휘관조차 선배의 행동을 이해하지 않았다. 민원을 두려워했고 변한 군대에 맞는 신세대 감각을 갖춘 지휘관으로 보이기 위한 단장에 신경을 쓸 뿐이었다. 위에서는 더 심한 징계를 줘야 한다며 고개를 쳐들고 있는 박선배의 목을 좋았다.
지휘관이 죽으라면 당장 죽는시늉까지 했던 선배는 변해버린 군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선배와 술 한잔할 때면 언제나 “군인이라서 고맙고 자랑스럽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 신념은 나까지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완벽하게 조각나서 모든 게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선배와 통화할 수 있었다.
“괜찮아…. 선배….”
“걱정하지 마. 아, 쪽팔려서 정말…. 그래도 다행이다. 네가 인사과에 있을 때 이런 일 터졌으면... 너한테 비참한 꼴 보였을 거 아니야.”
“그놈의 자존심은 정말…. 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지랄…. 무서워 죽어 버릴 거 같다. 뭐로 먹고사냐. 나 전역하고 1년 안에 너한테 늦은 밤에 전화하면 받지 마라. 절대로.”
“왜?”
“받지 마. 그동안 전역해서 돈 빌려달라고 전화 온 우리 선배들처럼…. 되기 싫다. 아니, 너한테 그러고 싶지 않다. 보니까 1년 조금 넘어서까지는 전화 오다가 그다음부터 죽었나, 살았나 선배들이 연락도 없더라….”
“별말을 다 하시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준비 잘해.”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나도 너처럼 무리해서 어디 아파트나 한 채 사둘걸…. 후회된다. 요즘 월세 알아보러 다닌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선배의 목소리는 초점과 힘을 잃은 듯했다.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가 바다 건너 필리핀까지 들렸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두 딸을 둔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지금 상황을 잘 해결하기 위해 바둥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선배는 가장의 무게감에 깔려 질식하기 일보직전인 사람 같았다. 정규직이 안 돼서 전역한 선배들은 그래도 당당하게 나갔다. 하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부분 힘들어했다. 군대에서 위엄 있고 당당했던 모습은 ‘사회’라는 큰 우물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내게도 몇 명의 전역한 선배가 술에 취해 전화 온 적이 있었다. “돈 좀 있냐”는 그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주잔을 기울였을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만취가 돼서 언제나 마지막에 어렵게 말을 꺼내곤 했다. 빌려줄 돈이라도 넉넉하면 좋으련만 육군 중사의 주머니 언제나 가벼웠다. 좋은 말로 돌려가며 거절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고 힘들었다. 거절을 당한 선배들은 마지막에 한결같이 같은 말을 했다.
“군대가 답답해도 그냥 붙어있어라. 밖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누구보다 무서운 세상을 알았기에 그래서 사회에서 빠르게 도망쳐 온 내게, 그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박 선배는 자신도 그런 꼴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더 이상 군대는 안전한 철밥통이 아니었다.
선배는 한순간에 사회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그쯤 내 찬란한 유학 생활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철책으로 단단히 만들어진 우물에서 잠시 나와 다른 사람들의 큰 우물을 들여다보았던 그 꿈만 같았던 시간이 끝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