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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른 살, 우리 곁을 떠난 아빠

소년공이었던 그 어린 소년의 삶은 절대 초라하지 않았다.

by 고용환

다시 답답한 우물로 들어가려 하니 몸이 거부했다. 하지만 무모하게 밖으로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우물도 사실은 처절한 몸부림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저 남의 떡이 항상 먹음직스러워 보일 뿐, 맛은 거기서 거기였다.


복직 신고를 하고 다시 보직을 받았다. 2천만 원이라는 차 한 대 값을 투자해 공부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고졸의 한계는 여전히 넘을 수 없는 문턱으로 존재했다. 일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군대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항상 똑같은 군대 이야기로 말을 만들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단지 내가 의지하고, 힘들 때 커피 한 잔을 마시러 가던 안식처 같은 선배가 군대에 없는 것이 씁쓸했다.


“선배, 어디야? 오늘 볼까?”
“바빠….”
“왜요? 나왔는데. 보고 싶어. 갈게.”
“바쁘다니까…. 주소 보낼게.”


주소를 검색해 보니 인천 변두리 빌라촌이었다. 부대가 서울에 있어서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했던 선배였다. 시골에서 자라 스무 살이 넘어 처음 지하철을 탔다고 했다. 딸들에게는 이런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주말이면 갈 곳이 없어도 두 딸의 손을 잡고 지하철 여행을 하곤 했다. 분신 같은 존재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차를 몰고 김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못 보던 현수막이 사방에 걸려 있었다.

‘미분양! 김포 신도시 아파트 분양권 다수 보유! 동·호수 선착순!’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김포 신도시는 ‘미분양의 무덤’이라는 말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을버스보다 작은 두량짜리 경전철도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김포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필리핀에서 가끔 뉴스를 검색하면서 한숨을 쉬곤 했다.


아파트를 산 지 3년이 넘었지만, 잠시 떨어졌던 시세는 떨어진 상태 그대로였다. 48번 국도를 따라 고촌을 지나 풍무동으로 들어서는데 좌측에 아주 큰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 아파트 옆으로 5천 세대 넘는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고 있었다. 주변은 분주해 보였다. 자랑하듯 파란 모자를 쓴 아파트들이 누구 키가 더 큰지 경쟁하듯 끝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사장님~!”
“어이구, 우리 사장님 오랜만에 오셨네. 공부는 잘했어요?”
“원하는 만큼은 하고 왔죠. 별일 없으셨죠?”
“별일은 뭐, 다 공사판이지….”
“보니까 미분양이라고 도로에 광고를 쫙 붙여놨던데요.”
“안 그래도 연락 한번 하려 했어요. 저번에 매수한 아파트 팔고, 분양권 싸게 사는 건 어때요?”
“분양권이요? 제 아파트도 오르지 않았는데요. 그리고 분양권 샀다가 세입자 못 구하면….”
“아니, 지금 호수랑 동을 골라서 살 수 있을 때 위치 좋은 곳에 사두면 구축보다는 신축이 나중에 돈이 더 될 텐데요.”
“생각 좀 해볼게요. 근데 저는 나중에 들어가서 실거주하려고 산 거라…. 연락드릴게요. 선약이 있어서요.”



부동산을 나와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인천으로 넘어가면서 사장님의 제안을 생각했다. 왠지 속는 기분이었다. 복비를 더 받기 위해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 넘쳐흐르는 아파트들, 언제 개통될지 모르는 마을버스 두 대 크기의 경전철. 다시 큰 리스크를 안고 싶지 않았다. 분명 나 같이 어설픈 사람들 간 보고 넘어오면 쓸개까지 빼먹으려는 속셈이라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제안을 넘겨버렸다.


내비게이션 안내를 받으며 선배 집 근처에 도착했다. 좁은 골목길은 쓰레기 냄새로 진동하고, 주차할 곳도 없어서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아마 친하지 않았다면 선배는 집 주소를 절대 말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엄마가 자기 집을 갖기 전까지 누구도 집에 초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선배, 나 도착.”
“기다려. 올라갈게.”


선배가 사는 집은 반지하 투룸이었다. 철창살 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과 신발이 보였다. 벽에 붙어 창문 밑에서 고개를 들어야 하늘을 볼 수 있는 높이가 꽤 낮은 반지하였다. 오랜만에 본 형수와 아이들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야…. 뭐! 반지하 처음 보냐? 목 빠지겠다.”
“뭐…. 말을 그렇게 해.”


수척해진 얼굴에 말투는 더 거칠어져 있었다. 영혼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은 내게 익숙한 한 사람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아빠는 사업에 쫄딱 망하고 집에서 멍하니 앉아 벽만 보았다. 선배의 표정은 그때의 아빠의 표정을 닮았다. 형수는 담담한 척하려고 애써 웃었다. 나는 군대 이야기를 최대한 하지 않았다. 선배는 물류 배송하는 곳에 취직해 아침마다 물건을 운반한다고만 했다. 허세를 부리며 돈벌이도 생각보다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자기 안부를 묻지 말라는 듯 거짓을 늘어놓았다.


집에서는 간단히 밥만 먹고, 빠르게 집 밖으로 나왔다. 낯선 동네의 조그마한 포장마차로 가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형수 앞에서 힘든 모습도 초라한 자신의 처지도 감추고 싶어 했다. 선배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요한아…. 내가 그 꼴 당하니까 후배건 선배건 지휘관이건 다 나한테 등을 돌리더라…. 그렇게 내가 필요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다 그렇지. 사람들이.”
“근데 더 억울하고 화나는 건, 나한테 더 화가 나더라…. 변해가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전역하면 평생 보지도 않을 애들한테 정주고 관심을 가진 내가 바보 같더라. 결국 이렇게 배신당할 걸 알았는데 미련하게 멈추지 못한 나한테 더 화가 나더라….”
“선배, 자책하지 마. 그냥 시대를 잘못 만난 것뿐이야.”
“아, 군인 이야기 하지 마라. 나 민간인이야. 그리고 젠장, 너 아파트 살 때 그렇게 말렸는데 지금은 네가 부럽다. 몸뚱이 굴려서 돈 버는 거야 하면 되는데, 모아둔 돈도 없고, 집도 없으니 사람이 이렇게 비참하네….

아무리 관사가 오래돼도 지하는 아니었는데, 딸들이 기가 팍 죽어서….

큰애 전학 오고 학교에서 오는 모습을 봤는데, 어깨가 축 처져 있더라. 차마 아는 척도 못 하겠더라…. 꼭 내 어릴 때를 보는 것 같아서…. 젠장, 좆같다. 사는 게.”


조용히 옆에서 숨조차 죽이며 선배의 한탄을 들어줬다. 자존심 때문에 힘든 티를 내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입에서 “힘들다, 지쳤다, 무섭다”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 그 안전하다고 믿었던 우물에서 쫓겨나 밖으로 나오니, 답답하고 지겨웠던 그 우물이 그리워서 미쳐버릴 것 같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선배는 쪽팔렸는지 화제를 돌려 내게 물었다.


“아…. 맞다. 우리 정신 나간 유학파 후배님 이야기 좀 들어야지?”
“참 좋았어. 미치도록.”
“그래? 필리핀? 그렇게 좋더냐?”
“아니. 그 나라가 아니라, 그 속에서 공부했던 내가 좋았어. 잠시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뭔가에 집중하면서, 민간인 척 살았던 것도 좋았고, 매일 긴장하며 살다가 나사 좀 풀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좋았어.”
“이 새끼…. 정말 좋았나 보네. 하긴 짠돌이 돈 이 천만 원씩이나 썼으니.”
“근데 선배…. 다시 복직하니까 여기가 너무 답답해. 뭐, 지금 할 말은 아니지만…. 답답해서 질식할 것 같아.”
“나오지 마라. 넌 시대 흐름에 잘 적응하니까. 연금 가득 채워서 나와. 미친 짓 그만하고 내 꼴 좀 봐라.”
“근데 나오지도 못하지. 나 미성년자 때부터 일한 거.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속을 채워도 밖이 무서워. 세상으로 나오는 게 아직도 미친 듯 무서워.”
“무서운 게 아니고, 공무원병 걸린 거야. 꼬박꼬박 10일 되면 월급 주는 그 생활에 길든 거야. 딱 죽지 않을 만큼 주는 월급인 걸 알면서도 중독돼서 자기 가치도 모르고 그냥 안심병 걸린 거지. 군대가 뭐 같아도 울타리 하나는 정말 튼튼하잖냐.”
“하하…. 맞네. 병 걸렸네. 선배 축하해. 선배는 완치돼서….”
“꼭 말을 해도 뼈 있게 한다. 너는 10년을 넘게 봐도 항상 재수 없다.”


비틀거리며 좁고 좁은 골목길을 함께 걸었다. 선배가 집으로 들어갈 때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 사람이 군대 밖에서도 날개를 달고 높은 하늘로 비상할 수 있기를, 믿는 신도 없지만 온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선배, 힘내! 나 갈게.”
“미친놈…. 연락해라.”


답답함이 하루하루 누적되었지만 다시 군대에 적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냥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면 일에 더 몰두했다. 이해가 안 되는 일도 웃으며 넘기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1년 동안 타국에서 보낸 유학은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렸다. 다시 통장에 월급을 채우며 저축 계획을 세우고, 그동안 소비만 하느라 텅 빈 계좌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부동산 사장님에게 몇 번이나 전화가 왔다. 계속 분양권 이야기를 하며 지금 집을 팔고, 돈 조금만 보태서 34평 신축 아파트 분양권 두 개를 사라는 것이었다. 대출도 잘 나온다고 자금을 충원할 계획도 차분히 설명해 줬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장사꾼이 하는 헛소리라고 무시했다. 경험해보지 않은 ‘분양권 거래’는 내게 사기처럼 들렸다.




2013년이 되고, 나는 서른 살이 되었다. 앞자리가 바뀌자 이십 대가 그리워졌다. 나는 조용히 지나 온 그 시간을 돌아보았다. 그다지 처량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바쁘고, 무모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힘 넘치고 겁 없는 보통의 이십 대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다행인 것은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고, 부모님 거주 문제도 해결했다. 충분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 이 십 대였다.


하지만 한 직장에서 10년을 보내며 서른이 된 나는 혼란스러웠다. 변해가는 군대에 잘 적응할 수 있다고 박 선배는 말했지만, 사실 그렇지 못했다. 학위를 취득하고, 자격증을 따고, 유학까지 다녀왔어도 직책은 변함없었다. 마치 악마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한 자리를 계속 돌았다. 그 굴레가 고통스러웠다. 막상 서른 살이 되니, 지금 아니면 다시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졌다.


이런 불안은 사치라고 말하듯 주변을 보면, 변변한 일자리 하나 구하지 못해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친구들도 많았다. 덕분에 부사관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이제는 하나의 ‘직업’, 아니 ‘공무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조직에서 특정 부류의 수가 늘어나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중간에 낀 서러움은 계속 커져만 갔다. 수가 많아진다는 건, 조직이 이제 우리를 ‘굳이 붙잡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만둔다고 해도 설득하거나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나가려는 사람보다 오려는 사람이 많으니 부사관의 가치는 점점 추락했다.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넘쳐났고, 수가 늘어나면서 응집력과 가치는 낮아졌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나는 중소기업 몇 군데에 이력서를 냈다. 운 좋게 몇 번의 면접 기회도 얻었다. 면접 날이면 어김없이 긴장됐다. 몇 곳은 최종 합격까지 했다. 덕분에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했다. 작고 작은 회사에 내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저울질하면 할수록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나약한 나 자신이 싫었다. 최종 합격을 통보한 회사에 거짓말로 제안을 거절하면서 나는 더욱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한 동안 뭔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군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떡하냐…. 어떻게 해….”

엄마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놀란 나는 다그치듯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네 아빠가…. 갑자기 쓰러져서. 그래서 지금 병원 응급실인데….”
“아빠가 쓰러졌어요? 어디 병원인데요?”
“간암 말기 같다고 하던데….”



엄마의 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돈 없고 힘들게 살았어도, 친인척 포함 암에 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말기’라니 더 믿을 수가 없었다. 황급히 부대에 보고를 하고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빌라를 사고 나서 우리 가족은 아무 일 없이 잠시 고요했다. 모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평범으로 가는 길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아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병실에 가니 아빠는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지쳐 잠들어 있었다. 엄마는 코너에 앉아 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쓰러졌다고요?”
“응…. 일하다가 세차장에서 쓰러지셔서 119로 응급실에 왔는데, 피검사하고 내가 도착하니 의사가 간암 이야기를 하더라고….”
“아니 정밀검사도 안 했는데, 그렇게 빨리 진단이 나와요?”

나는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고 다급히 의사를 찾았다. 간호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내일 아침 회진 때까지 기다리세요.”


멍하니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으니 아빠 직장 동료분들이 줄줄이 찾아왔다. 몇 달 전부터 안색이 좋지 않아 병원 가보라고 했지만, 아빠는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다. 누구나 죽음이 앞에 도착하면 외면하려고 한다. 그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고, 무슨 착오가 있는 거라고. 지겹고 희망이 없던 세상이라도 마지막은 모두 피하고 싶어 한다. 아빠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괜찮을 거라고 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를 모두 무시했다. 그 작은 것들이 되돌릴 수 없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죽음을 마주한 아빠를 보니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어학연수까지 간 나 자신이 한심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엄마 역시 자신을 자책했다.


깨어난 아빠는 애써 웃었다. ‘간암’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옆구리도 지금은 안 아프다며, 링거 맞아서 괜찮다고 말했다. 간암이라니 말도 안 된다면서 부정했다.


다음 날 아침, 의사와 면담이 있었다.


“간암 말기입니다. 길어야 1년 정도 되겠네요.” 젊은 의사는 무표정으로 아주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마치 저 환자는 내 가족이 아니니 이렇게 감정 없이 이야기해도 된다고 표현하는 듯했다. 살면서 의사를 자주 보며 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하지만 내 가족 일이 되니 증오심 생기고, 그들의 오만함이 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피검사만 했어도 이렇게 되지 않으셨을 텐데… 안타깝네요.”


‘안타깝네요’라는 말로는 우리 가족을 절대 위로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피검사 결과와 MRI에 속에 보이는 큰 암덩어리는 우리를 굴복시켰다.


아빠의 목소리를 닮은 나는, 지쳐 잠든 아빠를 바라보며 한없이 미안함을 느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못 하는 성격도, 자존심이 세서 굽신거리지 못하는 미련함도, 겉보기와 다르게 착한 성품도 — 모두 아빠를 닮았다.

한때는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돈도 못 벌고 집에서 논다고 아빠에게 모진 말을 퍼부었다. 아빠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 본 적도 없는 어린놈이 허세를 부렸다. 그리고 아빠의 그 자리를 빼앗았다. 모든 잘못했던 행동들이 나를 괴롭혔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옆에 누워 있는 아빠를 볼 때마다 고통스러워서 숨이 막혔다.


부대에 보고하고 칼퇴근해서 주로 병실을 지키고, 틈나는 대로 휴가를 써서 아빠와 병원을 다녔다. 이렇게라도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짧은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면서 아빠는 병원비를 걱정했다. 나는 허세를 부리며 아빠한테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그래야만 했다.


“아빠, 걱정 마세요. 아들, 아파트도 있고, 짱짱한 공무원이잖아요. 아무 문제없어.”

아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지만, 아빠는 나를 응원했다. 죽음 앞에서도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빠지만, 표정과 눈빛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중간에 자퇴하면서 아빠에게 실망을 안겨드렸지만 나는 아빠의 첫 번째 아들이자, 영원한 자랑거리였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난 언제나 아빠의 1순위였다.



아빠를 간호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작고 좁은 병실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후회로 물든 대화는 매번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으로 끝났다.

이렇게 산산 조각나고 무너져 자식에게 짐이 될 줄 몰랐다는 듯,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니 아빠는 눈물 흘리기도 했다. 아빠랑 조금 친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살면서 과연 몇 마디나 제대로 했을까? 아빠라는 존재는 항상 곁에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그런 존재였다. 사고도 많이 치고 무능한 모습이 되었지만 나는 아빠의 찬란한 순간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잠시나마 아빠도 꿈을 꾸고, 더 큰 성공으로 처자식을 호강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아빠가 친구 밑에서 그것도 세차장에서 남의 차를 닦고 있는 것이 나는 싫었다.


“왜 세차장에서 일했어요?”
“그냥…. 정신없이 돌아다니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좋아서...”


짧은 말이었지만, 거기엔 아빠의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다. 아무와도 마주하지 않고, 누군가 찾아와도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싶었던 —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아빠와 병실에서 오랜 시간 이야기 하면서 나는 한 남자의 인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돈이란 아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의사가 말한 시간이 다가오자 암세포는 빠르게 아빠의 몸을 장악했다. 마치 의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다는 태도였다. 나는 아빠 몸속에 있는 그 암세포 덩어리들을 경멸했다. 모두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항암치료도, 방사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아빠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강했던 남자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살았던 아빠는 살고 싶다고 울고 있었다.


옆에서 아빠를 지켜보면서 많은 후회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주유소에 찾아갔을 때 밖에서 아빠랑 남자 대 남자로 소주 한 잔 할걸. 사실 아빠는 그날 내가 온 걸 알고 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아주 멀리서 내 걸음걸이를 보고, ‘아들이 왔구나’ 눈치를 챘지만, 아빠의 자존심은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 나라도 초라 모습을 보이기 싫어 외면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나중에 내가 남긴 "정규직 됐어요"라는 문자에, 진심을 담아 축하한다는 말을 못 한 게 후회된다고 했다.

열심히는 살았는데, 어쩌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는데, 운이 나빠서 좋은 성적표를 못 받았다. 자신이 받지 못한 그 성적표를 자식인 내가 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군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 그것도 부사관이 되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화가 났다고 아빠는 말했다.


'뻔히 고생할 걸 알면서 말릴 수도 없는 자기 자신한테 너무 화가 났다고.'


1958년에 태어나, 치열한 경쟁과 가난 속에서 버티며 살아온 아빠를 미워할 수 없었다. 국민학교도 못 마치고 공장에서 일을 한 그 작은 소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버티며 열심히 살았다. 누군가는 비슷한 처지였지만 큰돈도 벌고, 지도자도 되고, 자식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었지만 그래도 아빠의 삶은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빠는 우리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과 작별을 했다. 지겹게 암세포와 싸우던 그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릴 적 친척 형이 말하던, 깨어나지 않는 영원한 잠에 들어버렸다.


아빠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남긴 것은 한 줌도 안 되는 재와 빚뿐이었다.
억울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아빠는 달리는 경주 마를 보며 매 순간 ‘희망’을 걸었던 게 아니었을까.


매 순간 앞만 보고 달리는 말처럼, 아빠도 그렇게 달리고 싶었을 것이다. 장례식을 마치고 동생과 상의해 남은 돈으로 아빠의 빚을 모두 갚았다. 모자란 돈은 내가 채웠다. 법적으로 갚을 의무는 없었지만, 돈을 빌려줬던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해 정리했다. 죽은 아빠를 원망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200만 원을 동생에게 주었다. 좋은 병원을 알아봐서 건강검진 시켜드리자고 말했다.
“엄마는 잘 보살피자.” 꼭 지키고 싶었다. 기회가 있다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부여잡아 이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고 싶었다.


아빠가 떠나고, 내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흉내만 내던 가장의 역할을 진짜로 해야 했다. 엄마는 말수가 줄었고, 홀로 남은 외로움에 점점 활력을 잃어갔다. 그토록 고생시켰던 남편도, 세월이라는 시간 앞에서는 결국 ‘그리움’으로 남았다.

아빠가 아니면 먹지 않을 오이장아찌를 잔뜩 담가 김치냉장고 깊숙이 넣어두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지만 한참 동안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그거 누구 먹으라고 그렇게 해요….”
“그냥 오이가 좋아서 샀어. 네 아빠가 이거 하나면 밥 한 공기 뚝딱 먹었는데…. 어릴 때 먹을 게 없어서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거라 그랬어….”
“그냥 놓아줘요, 엄마….”

“알았어.”라고 말하면서도, 엄마는 라벨지에 날짜를 적어 장아찌를 계속 넣었다.

엄마의 첫사랑이자 끝사랑인 아빠의 빈자리는, 엄마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았다. 누가 절대로 채울 수 없는 한없이 깊은 구멍이 영원히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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