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데칼코마니

같지만 다른, 그러다 모두 의미 있는 우리 삶을 위하여

by 주영헌



데칼코마니, 이 용어를 들으니 중·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입니다. 오랜만에 들어본 단어라서 살짝 생소하기까지 한데요, 어른보다 아이들이 잘 아는 단어입니다. 종이의 한쪽 면에 물감을 뿌리고 물감이 다 마르기 전에 종이를 접에서 왼쪽과 오른쪽이 반대로 찍히는 기법이죠. 우리말로 옮기면 ‘전사법(轉寫法)’이라고 부른다는데요, 데칼코마니보다 이 말이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데칼코마니도 다양한 은유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두 개의 생명을 포함하고 있는 샴쌍둥이처럼, 데칼코마니도 하나의 몸으로 두 개의 삶을 잉태합니다. 두 개의 몸이 있다면 하나는 원본이고 하나는 사본이겠지만, 데칼코마니의 양식은 원본과 사본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두 개의 몸이 합쳐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데칼코마니는 오른쪽과 왼쪽이 붕어빵처럼 닮았습니다. 종이를 접어서 찍어냈으니까요. 데칼코마니를 생각하면서, 저는 긴 생을 같이 살아가는 부부를 떠올렸습니다. 다른 모습의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꾸리면서 데칼코마니의 삶은 시작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종이의 한 면이 되는 것이죠. 그렇게 삶 속에서 그들만의 삶을 하얀 종이에 찍어냅니다. 그들의 인생이 반대쪽 종이에 고스란히 찍힙니다. 은유적으로 그것을 삶이라고 부릅니다. 붕어빵 같은 아이도 태어납니다.


데칼코마니의 특징 중 하나는 ‘예상할 수 없음’입니다. 양면이 겹치기 때문에, 대칭되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특징이 있지만, 대략적인 형태를 제외하고는 우연에 가깝습니다. 물감이 다른 편의 종이와 만나면서 눌리고 섞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예상보다 예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우연과 조화의 힘으로 데칼코마니는 완성되는 것이죠. 그것은 가족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집의 가족 구성은 총 5명입니다. 저와 제 아내 세 딸이죠. 큰딸은 음악을 하고요, 둘째 딸은 연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막내딸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있지만, 제가 계획한 대로 우리 가족이 삶이 진행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의 구상은 데칼코마니를 만들 때 머릿속에 떠올린 예상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엇비슷한 형태에 가깝겠지만,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근 냉정하게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룬 책들이 있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 중의 하나가 <환장할 우리 가족>(문예출판사) 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정상 가족’이라는 단어입니다. ‘정상’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인데요, ‘가족’이라는 단어 앞에 ‘정상’이라는 단어를 붙이니 이질적 의미의 단어가 됩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정상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가진 것들은 배제해 버립니다.


정상 가족이라는 의미에서 우리 가족은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한 부모가 아닌,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아이들이 있는 안정적인 구조니까요, 그런데요, 3~40년 전만 해도 우리 가족은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없기 때문이죠. 오늘의 시선으로는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전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가부장적 제도의 폐해죠.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데칼코마니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양쪽의 모습이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종이를 비뚤게 접거나 또는 두드릴 때, 종이를 펼 때 힘이 잘못 쏠리면, 양쪽이 미세하게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정상에서 비정상의 데칼코마니가 된 것이죠. 수업의 일부로서 만든 데칼코마니라면 여분의 종이와 물감으로 새롭게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요, 데칼코마니가 아니라 우리 삶이라면, 어떨까요.


부부의 해체와 재결합이 일상적인 일이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참고 사는 것보다 나와 닮은꼴의 사람을 찾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수 있지만, 완전히 같은 닮은꼴의 사람을 이상적인 닮은꼴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닮은꼴은 <환장할 우리 가족>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정상’의 범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정상 가족이 그토록 바라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닮음이란 동일성을 의미합니다. 타자에게서 나와 같은 무엇인가를 발견할 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호감을 느낍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나의 면을 누군가에게서 발견할 때, 그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누군가의 모습, 내 닮은꼴을 말하는 것입니다. 싫어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부정할 수 없음으로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나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닮고 싶다’는 희망은 데칼코마니와는 다른 것입니다. 데칼코마니는 실제의 나와 닮아있는 것(실체로서의 유사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희망이란 내가 만들어갈 새로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미술 기법으로서 데칼코마니는 변형할 수 없지만, 삶의 데칼코마니는 바꿔 갈 수 있으니까요. 우리 삶이 미술 기법과 삶이 다른 까닭이기도 합니다.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까닭은 '구조화된 틀'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기법으로 같은 방식으로 과거와 동일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모방에 불과할 것입니다.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정상’과 ‘제도’라는 구조화된 틀에 사로잡혀 버린다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은 발견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2009년에 계간 시인시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16년 첫 아이를 잃은 슬픔을 담은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시인동네, 2016년)를, 2020년 위로의 시편을 담은『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걷는사람, 2020년)을 출간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한편의 산문을 쓰고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공유합니다. 브런치를 통해서는 일주일에 한두편, 재미있는 산문을 중심으로 원문을 연재합니다.


주영헌 시인의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jooyoung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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