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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루하 Oct 01. 2024

나 믿어요.

28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이 사람이 영원히 내 곁에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신 하고 상관없어요. 어머니와 제 문제니 까요. 저는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어머니 마음대로 무시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제 마음은 변함없어요. 제가 결혼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당신하고 할 거예요. 다른 사람 누가 반대하더라도.”

“어머니께서 저를 반대하시는군요.”


말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당황했다. 나는 일어나 내 차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이 많아져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이 났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다시 혼자가 되는 불행. 이게 결말이었던 것을 나는 왜 아등바등 그를 붙잡았을까? 내가 어머니 입장이라도 결혼을 반대했을 것이다.   

'아버지도 없이 자란 아이인 데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우울해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봤더라면 아마 더더욱 반대하겠지.'


우울감이 극에 달하였을 때 그가 또다시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나 믿어요. 나는 절대 당신 혼자 두지 않아요. 전에 말했죠? 기억나죠? 미소 씨. 약속 꼭 지킬 거예요. 어머니는 제가 알아서 해요. 당분간은 이렇게 서로 싸우고 그러겠지만, 언젠가는 어머니도 포기하실 거예요.”


포기? 나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포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미소 씨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면 분명 어머니도 미소 씨 좋아하게 될 거예요. 미소 씨 좋은 사람이니까 그건 제가 잘 아니까 당신을 믿고 저를 믿어요. 스스로를 다시 불행으로 밀어 넣지 말아요. 당신 불행의 아이콘 아니야. 행복과 불행은 한 끗 차이예요. 제 옆에 있어요. 당신 옆에는 제가 있을게요. 저는 있잖아요. 당신 옆에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에요. 미소 씨. 다른 생각하지 말아요. 제발.”


다시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울다시피 서 있던 그는 두 팔을 벌리고 그냥 서 있었다. 내가 먼저 다가오길 바란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갔다. 


“저도 이제 당신 옆이 제일 좋아요.”


사람은 잃어야 안다고 했던가? 나도 그랬다. 그를 영영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이 현실이 되어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리 어려운 말도 아닌데, 너무 힘들었다. 기다려준 그는 얼마나 듣고 싶었을까?


“맞아요. 그게 정답이에요.”


그의 말대로 서로를 믿기로 했다. 지금 그거 말고 다른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는 캠핑하는 내내 어머니와 통화를 한다고 힘들어했지만, 그것만 빼면 우리의 여행은 즐거웠다.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면서 서로에게 기대 보고, 처음으로 그가 자는 것도 보았다.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깼다. 갑자기 내린 비로 행여 그가 춥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번데기 같은 침낭에 몸을 넣고, 잠든 그는 추운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감기 들까 봐 차에서 담요를 가져와 그를 덮어 주었다. 그대로 돌아가기엔 그가 더 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잘 생겼네. 처음 봤을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내 남자다 생각해서 그런 건가?”


웃음이 났다.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인데, 모든 게 달리 보였다. 잠이 든 그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았다. 본격적으로 그를 보기 위해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았다. 아기처럼 잠든 그를 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텐트 위로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소리도 너무 좋았다.


“아, 커피 마시고 싶다.”


괜히 혼잣말을 하며 문득 찾아오는 잠을 쫓아냈지만, 그렇게 앉아 결국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그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텐트 속 또 다른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두 개의 침낭을 깔고, 덮고서 말이다. 비는 계속 오고 있었지만, 아침마다 산책을 나가는 습관이 있는 그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다음엔 나와 같이 가자고 해놓고, 또 혼자 갔네.”     

“혼자 안 갔어요!”


공동으로 쓰는 공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놀랐잖아요.”

“놀라게 해 주려고 했으니까요. 성공했네요.”

“치. 못된 사람이야.”


세수도 하지 않는 내가 뭐가 예쁘다고 다가와 외투를 걸쳐준다. 


“산책 가요. 비 오니까 지퍼 잠가요. 아니 제가 채워 줄게요. 그냥 있어요.”


그와 결혼한다면 이런 소소한 행복을 매일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의심하지 않으려 하지만,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이별의 예감이 나를 슬프게 했다.


“왜 또, 우울해하실까?”

“아니에요. 우울해 안 했는데.”

“알았어요. 가요. 여기 장화 신고.”

“아기 다루듯 하지 마요.”

“아기를 아기 다루듯 하는데 뭐가 문제지?”


얄미운 그의 등을 세게 때렸다. 아프다며 도망가는 그가 그늘막으로 세워둔 곳에서 비를 흠뻑 맞고 말았다.


“아, 꼬시다. 벌 받은 거예요.”

“너무 하네. 벌이라니…, 에취.”


나는 수건을 가져와 그의 머리를 말렸다. 자신이 하겠다는 말 대신 몸을 숙여 내가 머리를 말리기 쉽게 했다. 어느 정도 머리를 말리고 옷에 묻은 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럴 사이즈가 아니었다.


“옷 갈아입어야겠어요.”

“네. 그러네요.”


텐트 안으로 들어간 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따뜻한 커피를 내렸다. 오늘의 산책은 무산되었지만, 뭐 상관없다. 삶은 우연의 연속이고, 그 연속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까. 굳이 그걸 탓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커피 마셔요. 춥죠?”

“옷 갈아입었더니 괜찮아요.”

“거짓말.”

“아닌데.”

“지금 당신 떨고 있거든요.”


쑥스러운지 콧등만 만지고,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잡고 의자에 앉아 비 오는 밖을 구경했다. 나무 위로 내려앉은 빗물이 마치 하나의 유리구슬처럼 아름다웠다. 그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모른 척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남은 커피를 홀짝였다. 우리에게 점점 말은 필요 없어졌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몇 가지 과정들은 자연스럽게 생략되었다.


8일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다. 집으로 돌아온 날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굳이 깨워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거실 바닥에서 웅크리고 잠들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나는 엄마의 방에서 세상 편하게 자고 있었다.


“명호 씨?”

“네!”


뭐가 불안했을까? 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모든 게 불확실해졌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저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당연한 발걸음으로 여기에 올 테니까. 당신은 늘 그랬듯 나를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아셨죠?”

“네. 그럴게요.”

“대답만 하지 말고 믿어요. 아니 제가 믿게 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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