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루하 Oct 04. 2024

집에 가요.

29화

그는 약속을 지켰다. 다음날부터 늘 그랬듯 나의 집으로 왔다.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딱 하루 그가 오지 않았다. 나는 새벽까지 그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렸지만, 겁이 나서 받지 못했다. 시계가 새벽 두 시를 알릴 때 그의 구두 소리가 들렸다. 걷지도 뛰지도 않는 급한 발소리. 그리고 초인


종 소리.


“미소 씨? 왜 전화를 안 받아요.”

“무서워서요.”

“뭐가 무서워요? 그냥 회식이 있어서 오늘만 못 간다고 전화한 건데, 문자도 안 봤죠? 뭐가 당신을 그렇게 무섭게 해요?”

“당신 어머니요.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겁이 났어요. 오지 않을까 봐.”

“갑시다.”

“어딜?”


그는 결심이라도 굳힌 듯 말했다.


“집에 가요. 어머니한테 같이 가요. 제가 어쩌고 있는지 보여 줄게요. 당신 불안이 씻긴 다면 저 괜찮아요. 가서 우리 교제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말해요.”

“명호 씨?”

“대신 엄마가 뭐라고 하시든 상처받지 말아요. 다른 건 제가 다 막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 상처는 제가 막아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저만 봐요. 알았죠?”     


주말, 그는 부모님 집으로 예고 없이 찾아갔다. 아버님은 외출 중이었고, 집에는 어머니 홀로 청소 중이었다.


“명호 네가 웬일이냐?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굴더니.”

“손님 왔어요. 어머니.”

“손님? 누구?”


그의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아들에게 툴툴대면서도 사랑이 듬뿍 묻어 있었고, 차갑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나를 보는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뭐 하려고 데려 왔어? 나는 안 본다.”

“어머니. 아무리 그러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만 인정하세요.”


순식간에 어머니의 손이 그의 얼굴로 날아왔다. 그녀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지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물리진 않았다.


“내가 널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데, 네가 이러니?”

“어머니, 그냥 미소 씨, 한 번만 제대로 봐주시면 안 돼요. 정말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예요.”

“네 눈에는 그렇겠지. 내 눈엔 아니다. 나는 저렇게 우울한 며느리 받고 싶지 않다.”

“미소 씨, 우울하지 않아요. 왜 환경만 보시고 우울할 거라 장담하세요?”


그녀의 차가운 눈이 나를 향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아파져 오는 눈빛이 나를 간통했다. 그 사이를 그가 가로막았다.


“어머니의 그런 눈빛이 미소 씨를 우울하게 만드는 거예요. 왜 그 생각은 못 하세요?”

다시 어머니의 손이 날아왔다. 두 번째라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를 향한 원망을 쏟아내듯 세 번째, 네 번째 날아왔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여보!”


그의 아버지였다. 어머니를 말리며 대신 내게 사과를 했다.


“윤미소 씨라고 했나요?”

“네.”

“명호 아비입니다. 오늘은 제가 대신 사과하죠. 다른 날 다시 날 잡고 오면 좋겠는데, 오늘은 그만 가는 게 어떨까 싶네요.”


그와 비슷한 목소리가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그도 돌아서 나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나오는 데 다리의 힘이 풀려 그가 안듯이 차로 왔다.


“괜찮아요?”

“아뇨. 괜찮지 않아요. 미안해요. 명호 씨. 매우 아프죠?”


훌쩍거리며 부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을 잡은 그는 다시 물었다.


“이래도 나 못 믿어요?”

“아뇨. 믿어요. 믿을게요. 제가 억지 부려서 미안해요. 진짜로 미안해.”

“미안하면 의심하지 말아요. 저는 어떤 경우에도 당신 놓지 않아요.”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손만 꼭 잡고,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는 동안 서로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다 울었어요?”


코를 훌쩍이는 나를 놀리며 그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 노래방 갈까요?”

“지금요?”

“당신 노래 듣고 싶어서요. 저는 노래 못 부르거든요.”


정말이었다. 그는 음치, 박치였다. 신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노래방에서 주는 추가 시간까지 다 채울 때까지 나는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가 나의 노래로 평안해진다면 하루 종일도 부를 수 있었다.

“역시 당신은 가수를 해야 했나 봐요.”

“가수를 안 했으니까 만났죠. 그러니까 저는 지금 만족해요.”

“가수 했더라도 우린 만났을 텐데? 왜 모를까? 우린 운명인데.”

그의 운명론은 여전했다. 여전히 나는 운명론은 믿지 않지만, 지금 하는 말엔 반박하지 않았다. 정말 운명이라면 그의 말대로 어디서 어떤 모습을 했더라도 우린 만났을 것이다. 그 생각이 좋았다. 내가 불행해서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니까. 시간은 늦어지고, 집에 갈 시간이 되어서 그가 일어났다.

“이제 집에 갈게요.”

“얼굴 한번 봐요.”

“괜찮아요. 제 어머니 생각보다 힘이 세지 않네요. 예전에는 얼굴이 퉁퉁 붓도록 때렸는데, 많이 늙으셨네요.”

그의 슬픈 눈을 보면서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그와 어머니 사이에 내가 있으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저히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미안해하지도 말아요. 저는 단지 제 마음을 보여주려고 데려간 거지 당신 마음에 짐을 주기 위해 데려간 거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만 그런 표정 지우고 웃어줘요.”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 볼을 꼬집 듯 잡았다.

“웃으라니까. 저 가고 울지 말아요. 당신 울면 제가 바로 눈치채는 거 알죠? 절대 울지 말고 푹 자기. 알았죠?”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약속은 지킬 수 없었다. 그가 나간 순간 눈물은 나를 힘들게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한참 후에 방에 돌아와 엄마 사진을 끌어안고 다시 울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랜만에 엄마 꿈을 꾸었다.     

“미소야? 미소야!”

엄마 목소리에 눈을 떴다. 출근하는 아침 늦잠을 자면 내 방으로 들어와 나를 깨우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여전히 따듯했다.

“엄마? 엄마.”

“우리 딸! 힘들지?”

엄마는 다 알고 있는 것일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물어오는 말이 다시 눈물샘을 만들었다. 결국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엄마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엄마, 미안해. 울지 마. 나 안 울게. 엄마 울지 마.”

엄마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