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드로잉 시화 14
연속적인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나의 그림은 거의 대부분이 레이어를 쌓어 올려서 그렸다. 그전에 첫 번째는 배경을 정하고, 두 번째는 스케치를 한 다음 각 그림에서 순서를 정해 레이어를 묶는다. 그런데 이번 그림은 두 번째가 없다. 머리에 있는 배경을 그대로 옮겨 놓기는 했으나 벼를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쓱쓱 그고, 대충 모양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추상적으로 생각만 했는데, 막상 스케치를 그릴려니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초록 배경 위에서 몇 번을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다 벼 한 줄을 쓱 그려 넣었다. 초록색으로 끝으로 갈수록 가는 브러시를 이용해 쓱쓱 몇 줄을 긋고, 나뭇잎 브러시를 제일 작게 만들어 벼삭을 표현했다. 그걸 복사해서 몇 겹을 거쳐 겹치고, 겹치고 또 겹쳤다. 그런 다음 레이어를 잠겨 두고,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표시하고, 각 레이어를 선택해 어떤 것은 크게 또 어떤 것은 작게 만들었다. 논두렁 옆에 미운 잡초를 그리러 원래는 노란색을 선택했다. 가을엔 잡초도 노랗게 물이 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 벼 이삭이 노랗고, 배경도 노란색이 섞어 있어서 그런 아무리 황토를 섞은 노랑으로 선을 그어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갈색 중에서 제일 노랑에 가까운 색을 몇 번 바탕에 그어 눈에 띄는 색을 골랐다. 거친 브러시로 대략 기울임을 들여 각기 따라 뻗은 잡초를 그린 다음 뭔가 허전한 배경을 노려보다 허수아비를 그려 넣기로 했다. 처음엔 하나만 그리고, 다음엔 글을 입혔다. 글을 넣고 보니, 농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즘은 시골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듯 노부부가 함께 벼농사를 일군다. 그래서 여자 허수아비를 하나 더 그렸다. 허수아비니까 예시 그림 없이 막대기 두 개, 볏짚 얼굴, 팔랑이는 몸빼 바지 상상했으나 실상은 정말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종이 괴물이 나왔다. 원하는 그림은 차승원 배우처럼 길쭉하게 그래도 좀 핸섬한 모습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좋아하다 예능프로그램 '삼시 세끼 고촌편'에서 유해진 배우가 허수아비를 만드는 장면이 보였다. 그 아래 차승원 배우를 꼭 닮은 길고 핸섬한 허수아비를 보는 순간 모델로 두고 그렸다. 모델은 모델일 뿐, 초보 작가에게는 할로윈 호박과도 비슷하게 보인다. 어찌 되었든 보고 그린 덕에 구도는 얼추 맞게 그려졌다. 처음처럼 괴물처럼 보이지도 않고 말이다.
이제 조몽쌤을 그려야 했다. 도장 캐릭터답게 그림의 일부여야 했다.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찾아야만 보이는 곳을 찾아 화면을 이리저리 굴렸다. 일단 모든 레이어를 비활성화해놓고, A4 큰 화면에 조몽쌤의 포즈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림과 맞게 사이즈를 조절했다. 가늘고 길게. 늘 그렇듯 검은색으로 그렸더니 너무 잘 보였다. 색을 좀 옅게 만들어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도록 사이즈를 조절했더니,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다.
원래는 [오늘의 시제는]이라는 공저에 수록될 글이었다. 정겨움과 어울리는 글을 쓰다가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벼를 의인화하여 농부들의 감사함을 표현했다. 겨우 발언 기회를 준 벼는 말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벼를 두고 말하는 가장 보편적인 비유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겸손을 뜻하는 이 표현을 달리 표현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