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영혼을 잃지 않고 공학연구 하기 - 3
필자는 2019년 2월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간 과정이 고되어 몇 년간 글을 쓰지 못했다..), 감사하게도 2019년 한국연구재단 학문후속세대 박사 후 국외연수 과제 (흔히들 연구재단 포닥 과제라고 한다)에 선정되어 2019년 여름부터 미국에서 포닥을 하고 있다.
국내 연구자 커뮤니티 게시판 글이나 댓글들을 보면, '왜 굳이 한국에서 돈을 싸짊어지고 가려고 하냐'는 어조의 말들이 많으나, 필자가 생각하는 연구재단 포닥 과제가 가진 이점이 있다.
연구주제 상관없이 풀 펀딩을 제공해주는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꼭 함께 연구하고 싶은 교수님이 계신 경우, 해당 교수님이 가진 펀드가 포닥을 고용하기에 부족한 경우가 있다. (미국에 가려는 한국 연구자가 충분한 펀딩을 증명하지 않으면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 학생비자(F1)의 경우 부모님의 통장 잔고로 증명하기도 하지만 포닥(J1)의 경우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즉, '무급으로라도 이 분께 가서 일하겠다'라는 건 미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아닌 한 아예 불가능한 선택지라고 보면 된다.) 이 때 학문후속세대 국외연수라는 선택지가 있기에 본인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연구재단 포닥 과제는 1년에 140여명 정도만을 선정하고, 이 안에서도 그나마 단일 국가에 50% 이상을 선정하지 않는다는 제약이 있기에(당연히 미국) 경쟁이 치열하다. 심지어 분야가 나뉘어 있지도 않고 이공계 전체 풀에서 경쟁이 이뤄진다. 그래서 그 간의 선정과제 목록들을 살펴보면 의료, 바이오, 재료공학 분야가 대부분으로 보인다. 필자가 선정된 해(2019)에는 경쟁률이 공개되지 않았으나, 그 전까지는 약 20%였다.
필자가 해당 과제를 준비할 당시에는 주변에 선정 경험이 있는 HCI분야의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해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준비해야 했다. 필자의 경험이 노하우나 비기가 될 수는 없지만 다른 HCI 연구자들에게 약간의 참고는 될 것이라는 생각에 필자의 경험을 공유해본다.
매년 양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연구재단 과제 지원 패키지는 크게 세 파트로 이루어진다. 다른 자잘한 것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만 추렸다.
1. 연구 제안서
2. 포닥 지도(예정)교수의 추천서
연구실적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고 각자 알아서 잘 준비할 것이기 때문에 제외했다.
한국의 대학원에서 연구재단 과제 제안서를 써본 경험이 있다면 익숙한 양식일 것이다. 필자가 지원할 당시에는 중견연구과제의 양식 및 항목과 거의 흡사했다. 2020년 과제의 항목은 조금의 변동이 있었다. 제안서를 준비할 때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들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그간 해온 것이 무엇이고, 1년 간 무엇을 할 것이며, 나와 내 지도교수는 그것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역량을 갖추었는지 약 팔지 않고 솔직하게 쓴다.
1년 내로 수행할 수 있는 적절한 규모의 제안을 한다.
그간 썼던 논문을 바탕으로 새롭게 제안하는 과제가 자연스운 맥락으로 이어지게 하고, 이미 해왔던 것들이 있기에 포닥을 시작하면 곧바로 연구에 착수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시각디자인과 컴퓨터공학 학위를 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발과 디자인이 둘 다 가능하며, 실제 대상 사용자에게 앱을 배포하는 필자의 연구에서 이러한 background가 매우 강점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에 추가로, 모든 지원자에게 해당되는 경우는 아니지만 필자의 경우는 포닥 지도예정 교수님이 이미 박사과정 동안 공동연구를 오랫동안 함께 해온 분이셨다. 그래서 이 점도 강조하였다.
연구재단 포닥과제의 특징은 포닥 지원 기관이 미리 정해져 있어야 하고, 지도예정 교수의 추천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추천서와 다른 점은, 지원자를 다른 곳에 추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지원자를 포닥으로 뽑고 싶으니 이 사람을 지원해 달라'고 쓴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의 경우 포닥 지도교수님이 원래 함께 연구를 해온 분이셨기 때문에 필자의 스킬셋과 강점을 잘 알고 계셨고, 필자와 포닥 연구를 꼭 수행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아주 강력한 추천서를 써주셨다(추천서를 받아 국문으로 번역해서 제출시 첨부해야 하기 때문에 번역하는 과정이 상당히 오그라든다;;).
선정 후에는 또다른 번거로운 과정들이 기다린다. 예를 들면 미국 대학의 비자서류 펀딩 증빙에 필요한 선정 확인서.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연구재단의 프로세스인데, 분명 해외 기관에 필요한 서류임에도 불구하고 국문 양식만 발급해준다. 매년 영문 양식은 없냐고 같은 질문이 올라오지만 제공하지 않는다는 복붙 답변만 달린다. 심지어 미국 대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펀딩 증빙의 경우 Certified translation(공증 번역)을 요구하는데, 필자의 경우 직접 영문 버전 문서를 만들어 공증 번역사에게 제공함으로서 공증 비용에 디스카운트를 많이 받았다 (번역사 입장에서는 도장만 찍어주면 되니 윈윈).
필자는 선정 공고를 해외학회 출장 나가는 도중에 환승 공항에서 받았다. 카톡으로 온 연구재단의 결과 확인하라는 문자를 받고 공항의 느린 인터넷으로 떨며 연구재단 웹사이트를 접속하던 그 때의 긴장감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방문하려던 학회에는 포닥 지도교수님도 오셔서, 기쁜 소식을 직접 전해드릴 수 있었다. 연구재단의 심사 일정이 밀리고 밀려 결과가 나온 것이 5월 중순, 프로그램 시작은 9월 1일에 무조건 해야 하기 때문에 비자 및 출국준비 또한 긴장의 레이스였다. 출국과 비자준비는 또 다른 글에서 다뤄보려고 한다.